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95화 (60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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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자유는 이미 구속되어있는 상태였다.

특수한 재질로 된 사슬이 팔 다리를 묶고 있고, 바닥에 각인 되어 있는 기하학적으로 생긴 문양이 그녀의 힘과 마력을 지속해서 빨아들이고 있다.

‘이건...’

비슷한 일을 당해봤기에 그녀는 굳이 기억을 되짚지 않아도 현 상황을 이해했다.

‘또 잡혔구나.’

그래도 루시아는 안도했다. 다른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자신에게 붙은 제사장의 수 만 무려 14명이다.

때문에 이강호가 준 특효약을 사용했음에도 저항하는 데만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그것도 적이 생포하려했기에 그 정도나 버틴 것이지 만약 살인이 목적이었다면 더 빨리 당했을 터다.

그녀는 동료들의 무사를 다행이라 여기며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뻥 뚫려있는 하늘 위로는 수많은 망자들이 그녀를 감시하듯 배회하고 있었다.

‘......’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살아나갈 수 없겠지.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

그녀는 그리 생각하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망령?’

망령을 다루는 자는 추종자들이 아니라 크라베스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망령들의 틈 사이를 비집고 한 인형(人形)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피부, 그와는 대조되게 전신의 곳곳을 비추고 있는 기하학적인 노란빛의 문신.

“드디어 깨어났군.”

“...당신은?”

“크크크, 나말인가? 크라베스라고하면 잘 알겠지?”

역시 예측이 들어맞았다.

이전 이강호가 설명해 준 외관과 차이가 있어 솔직히 사칭인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 중요한건 눈앞에 있는 자가 추종자의 패거리는 일단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쩌면...

“들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군요.”

“흐음, 그렇지 뭐. 사실 이 형태도 본래의 형태는 아니다만... 그보다 역시 놈들의 동료답게 머리 회전이 빠르군. 단번에 납득하다니.”

“뭐, 지금의 추종자들은 망령을 다루지 못하니...”

“크크크, 그걸로 눈치 챈 건가. 뭐 아무래도 좋아. 그럼 넌 내가 왜 너를 살려 두고 있는지는 아나?”

유세현, 루시아의 머릿속에 그가 떠올랐다.

“제가 순순히... 당신의 뜻대로 이용당해 줄 거라 생각하나요?”

“붙잡힌 신세인데도 당돌하군. 불가능할거라 생각하나?”

“물론이죠.”

루시아는 이종족들과 연합을 맺은 뒤 천문대를 한 번 더 이용함으로써 크라베스의 세력이 계속해서 이동해가며 주요 던전을 파괴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야 그 의도를 전혀 해석할 수 없었지만, 현재 연구소를 거친 그들은 자신들이 정보를 얻은 것처럼 크라베스 또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지금도 그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계속 나를 이곳에 지속적으로 묶어 둘 수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저를 통제할 수 없게 되겠죠.”

루시아가 다부지게 말하자, 크라베스의 노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호오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순간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

신념에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크라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세...’

일반적으로는 그리 생각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크라베스의 입장에서도 그들의 집단은 일반적인, 전혀 정상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그래서 크라베스 또한 유세현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그리 확신한 것 아닌가.

크라베스가 실소를 내뿜었다.

“거참 눈물 날 정도로 대단한 희생이군. 이용당하기 싫어서 자살이라니, 유세현이 네가 자기 때문에 자살한 걸 알면 아주 기뻐하겠어.”

“......”

“흠, 좀 더 내가 우위를 점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사실 네 말이 맞다. 나는 지금 계속 움직여야 되는 상황이고 너를 이곳에 잡아 두고 있어봐야 의미가 없지. 그래서 말인데...”

크라베스가 눈을 빛냈다.

“우리 거래하지 않겠나?”

“거...래?”

“그래, 거래. 난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수 있지만 사실 딱히 죽일 가치를 못 느낀다. 추종자들과 달리 네 영혼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하도록 하자.”

루시아는 크라베스를 돕는다.

크라베스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나면 절대 해가 가지 않게 풀어준다.

“내 영혼을 걸겠다. 영혼각인에 대해선 놈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

“...그럼...”

“단, 너도 조건을 몇 개 걸어야겠다. 나도 뒤통수 맞는 건 싫으니.”

“조건 말인가요?”

“그래, 조건. 별거 아니다. 첫째, 넌 내게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일이 끝날 때까지 일행과도 접촉하지 않는다.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어길 시에는 각인은 무효로 돌아간다.”

“무효? 흠,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루시아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협력관계가 되는 것이 별로 탐탁지는 않지만 유심히 잘 생각해보면 놈이 내건 조건은 루시아에게 있어서 절대 불리한 게 아니었다. 아니, 되려 좋다.

각인이 무효화 된다는 건 죽는다는 뜻이 아니니까, 틈이 보이면 약속을 어기고 도주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크라베스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크라베스는 지금 대놓고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완벽한 순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한 번 도망쳐보라고.

음험하게 웃은 크라베스가 손을 내밀었다.

“자... 어떤가? 참고로 파격적인 만큼 조건을 더 좋게 해달라는 망발 따윈 듣지 않겠다. 이 제안을 거절할 시엔 네 뜻대로 지금 당장 깔끔하게 죽여주마.”

루시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죽는 게 맞지만 살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 붙잡는 게 맞다.

이는 자신을 위함이기도 했지만 유세현을 위함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강호처럼 유세현의 감정마모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 * *

“감시자가 붙었군.”

유세현의 중얼거림에 이강호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감시자?”

그 또한 유세현처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마력탐지를 사용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강호뿐만이 아니다.

다른 동료들은 당연하고 델바람의 카그네프 제벨이나 엘프의 카시우스 조차도 눈치 채지 못한 느낌.

‘그렇다면 엄청난 능력자다.’

델바람의 용인술도 그렇지만 특히나 엘프들은 마법적 능력이나 감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적의 감시에 엄청 민감하게 반응하는 종족이었다. 그런 자들의 이목을 속이고 감시가 가능하다는 건 상대가 정말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일단 놔둘까?”

“흠...”

이강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들은 이제 곧 구덩이에 다다르는 상황이었다.

스텟이 딸리는 델바람이나 엘프들이 퇴로를 위해 후방 장악에 들어갔고, 그들도 천족과 마족 진형의 용태를 살핀 뒤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의 정보를 염탐하게 놔두는 건 썩 좋지 않다.

“어쩔 수 없지. 방향이 어디야?”

“이강호, 네가 하게?”

“아니, 우리가하면 오르엠에게 걸릴 가능성이 높으니... 김주희, 네가 해라. 빙공은 사용하지 말고 디네를 불러서 그냥 물로만... 무슨 뜻인지 알지?”

“물론이죠 선배!”

김주희가 디네를 부르자, 소환된 디네는 곧장 물의 창을 만들어냈다. 몇몇 엘프들의 시선이 쏠린다.

“역시... 물의 상급 정령 에르아나야.”

“그때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대체 인간 따위가 무슨 수로 계약을...”

시기심이 대놓고 묻어나온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김주희는 아무런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디네가 한 마디하며 무심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에르아나라고 부르지 말래? 나 그딴 이름 아니거든?”

딱-

쉬이이익-

유세현이 알려준 방향을 향해 폭풍 치듯 물의 창이 날아간다. 허나 같은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물체는 운디네가 만든 창, 하나가 아니었다.

쌔애애액!

카시우스가 날린 바람의 화살!

화살과 창이 순차적으로 정확히 같은 곳을 꿰뚫었다.

거의 동시에 쐈음에도 화살이 20초가량 더 빨랐다는 걸 가정했을 때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맹렬한 바람과 마력에 의해 광학미채가 흔들리며 회피한 타겟의 모습이 일순간 드러났다.

검은빛의 머리칼, 쌍안경으로 타겟의 모습을 살핀 카시우스가 중얼거렸다.

“데프하우어로군.”

“데프하우어? 벨제뷔트에게 잡아먹힌 그 빌어먹을 드래곤 말이냐?”

“그래.”

카시우스는 카그네프에게 그리 답하며 김주희를 응시했다.

활을 쏘긴 했지만, 그는 사실 직접 데프하우어를 감지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프하우어는 블랙드래곤 차기 로드로써 일반적인 생명체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10서클 영역에 도달한 자였다.

코찔찔이 꼬맹이가 완력으로 어른을 결코 이길 수 없듯이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데프하우어의 상위 마법을 탐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거리도 제법 있었고...’

그런데 저 여자는 감지해냈다. 로리엔도 놀랍지만, 카시우스는 유세현 일행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데프하우어는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그대로 방향을 틀어 자취를 감췄다.

마침내 진형을 갖추고 무저갱의 바로 앞에 도착한 카시우스가 끝없이 펼쳐져 이어져있는 나락을 내려다 봤다.

“드디어 당도했군.”

“크, 여긴 언제 봐도 무지하게 넓구만.”

쭉 둘러본 카그네프는 쌍안경을 들고 서쪽과 동쪽을 응시했다.

저 멀리 서쪽에는 마족대군이, 동쪽에는 천사대군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개미처럼 보인다.

지금이곳에 판도라의 패권을 다투는 네 종족들이 집합했다.

* * *

무저갱 탐사를 위한 사전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선 천족이나 마족의 기습을 대비하여 무저갱 남쪽 일부를 확실히 확보했다.

뭐, 물론 그래봤자 몇 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없는 것보단 100배 나으리라.

그 이후에는 진지를 구축하고, 각 15명씩 구성하여 팀을 나눴다.

그들은 의견을 조율해 10개의 팀만 내부탐사를 하기로 하고 나머지 팀은 경계와 적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기로 했다.

탐사 팀이 꽤나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의 모토는 안전이었다.

주둔하고 있는 적들이 장난이 아닌 만큼, 괜한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서 착실히 나아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내 한 팀이 된 카시우스와 카그네프, 그리고 유세현 일행.

무저갱에는 벽면 사이로 내부로 진입할 수 있게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유세현이 툭 물었다.

“여기에 와본 적이 있나?”

“몇 번 이상하다 생각되어 와보긴 했었지.”

“나도다.”

“그런가? 그럼 길은 몰라도 이 구덩이의 끝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겠군.”

“아니, 모른다.”

무저갱의 깊이는 그들로도 측정불가였다.

“이전에 왔을 때 3km 이상을 내려가 봤지만 끝이 안보였다. 그때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길은 내부에서 찾아야 되는 것 같다만...”

“내부도 미로처럼 얽혀있어서 영 난감한 게 아니란 말이지. 안 그러냐 카시우스?”

“동감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들은 결국 일단은 아무 곳이나 찍어서 내부로 돌입하기로 했다.

* * *

추종자들이 마족 편에 붙은 이상, 사실 제일 빠른 탐사 방법은 마족의 뒤를 쫓는 것이었다.

문제는 고립될시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기에 대놓고 마족이 구축해 놓은 영역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통로에서 마족의 흔적을 찾기로 결정했다.

유세현이 탐지를 위해 잔뜩 집중했을 때였다.

쿠구구궁!

10m나 되는 천장 벽이 난데없이 흔들리며 딛고 있는 땅이 요동쳤다.

무저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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