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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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그래서 당신에게 흥미가 있는 겁니다.”
루시펠이 입을 닫았을 때 일행은 꽤나 충격 받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천사 루시펠이 천족을 이탈한 이유.
장대한 꿈에서 비롯된 이탈이 아닌, 흔해빠진 감정적인 이유로 천족을 배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했던 이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정말 의외라 믿기지 않을 뿐.
유세현은 순간적으로 모종의 수단을 동원해 속인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강호가 꼬투리를 잡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루시펠이 정말로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세현이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오르엠을 죽이기 위해 천족에서 이탈을 했다?”
“예.”
이번에도 비도는 울리지 않았다.
명백한 진실.
이에 이강호가 턱을 어루만졌다.
현재 그는 영문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듯한 감각.
‘뭐지?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천족이 거의 근접한 게 느껴졌는지 바깥쪽을 향해 한순간 시선을 돌린 루시펠이 말을 이었다.
“충분히 답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
일행이 안색을 굳혔다.
사실 해명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루시펠은 자신의 목적을 전부 털어놓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정보의 유용성을 떠나, 훨씬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꼭 듣고 싶은 게 있지 않는 한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으니까.
목적도, 힘의 대한 질문도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과연 루시펠은 일행에게 무엇을 듣고 싶은 것일까.
“저는 유세현, 당신과 오르엠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직접적으로 악연이 얽힌 경위와 이유에 대해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의문이 생기지 않도록.”
“...?!”
일행은 마음속으로 경악했다.
그런 걸 질문하다니?
이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
난처하다.
그리고 이는 무척 심각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답하면, 신물 파편이 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이해시켜주기 위해서는 과정을 설명해야 되는데, 단순히 ‘전투를 해서 그렇다.’라는 건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의 비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강호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연기했다.
“오르엠이 누구지? 우린 그런 자의 이름 따위는 모른다.”
그러자 루시펠은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유세현을 재차 응시했다.
“유세현, 당신이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직접적으로 악연이 얽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말을 꺼내 비도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저는 더 이상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겠습니다.”
“......”
“역시 하지 못하시는 군요.”
한 박자 쉰 루시펠이 유세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유세현, 당신은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제가 그 부분에 대해 질문하면 답하기 꺼려할 것이란 걸 단번에 눈치 챘죠. 제가 답하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내심 생각하셨을 겁니다. 실제로도 꽤나 망설여졌고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그 말을 꺼냄으로써 되려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천족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말이죠. 그 중에서 당신들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은 최상급 천사 부대나 대천사 혹은 오르엠 정도인데...”
입을 원천 봉쇄하고 시간을 끌기위하여 처음부터 큰 수를 둔 것이 되려 그녀의 의구심을 높여 발생한 현상이었다.
“아무쪼록 조금 있으면 천사들이 일대를 메울 테니 바로 이야기를 시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설마 제 이야기만 듣고 끝낼 생각이신 건 아니시겠죠?”
외통수.
완벽한 외통수였다.
으득-
이강호가 입술을 곱씹었다.
이강호가 유세현이 마음대로 조건을 내거는 것을 막지 않은 이유는 루시펠이 기껏 해봐야 아까 했던 질문을 그대로 물어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천사가 도달할 때까지 약 5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만 유세현 당신이라면 간추려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겠죠.”
“......”
“자, 어서.”
루시펠이 쐐기를 박았다.
말하지 않으면 공격을 감행할 기세였다.
그리고 이탈 동기를 들어 본 바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복수의 길은 멀고 험한데 타인에게 휘둘리기만 한다면 결코 이룰 수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군.”
마침내 심기를 다잡은 것인지 유세현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물조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머리좋은 루시펠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점점점 확장되는 동공.
“놀랍군요.”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루시펠은 거기까지는 마치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듯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유세현이 말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군.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다. 왜 우리의 질문에 답 해준 거지? 네 답변대로라면 해줄 이유는 없었을 텐데?”
“...!!”
그 순간 이강호의 포커페이스가 깨지며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줄곧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루시펠은 당초 유세현의 질문에 답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관심 있던 것은 유세현의 정체였으니까.
인간의 몸으로 어둠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첫 번째 질문으로 확인한 순간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루시펠이 재미있다는 듯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유세현이 매서운 눈초리로 재차 물었다.
“왜 자신에 대해 털어놨지?”
“후후, 이거 때문입니다. 유세현, 저의 두 번째 포켓에서 제가 지칭하는 아이템을 좀 꺼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루시펠의 말에 유세현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아이템 명을 말했다.
“영혼의 서약서.”
명칭만 들은 것에 불과했지만 어떤 효과가 있을지 대충짐작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그런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이템명: 영혼의 서약서.
등급: 에픽 [S Rank]
상세정보: 창세의 관, 영신자가 제작한 영혼과 영혼을 연결해주는 서약서입니다. 서약서에 동의한 서약자는 6개월 동안 서로 동맹관계가 되며, 정한 룰에 따라 행동의 제약을 받습니다. 어길 시에는 서약에 따라 영혼을 잃게 됩니다.
루시펠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저는 당신들과 임시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 * *
안 그래도 무거웠던 장내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동맹 제안.
하지만 그리 납득하지 못할 제안은 아니었다.
그녀는 관찰하고 싶은 것이다.
권능을 얻은 유세현을. 그리고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그의 동료들을.
유세현이 차분히 말했다.
“거절한다면?”
“그렇게 되면 아쉽게도 제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하나죠.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 하더라도 오르엠은 저보다 당신에게 더 관심이 있을 거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제겐 비장의 수단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
거절할 수 없는 협박이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네, 맞아요.”
“당신 잘도 그런 소리를 내뱉는...”
김주희가 뭐라 하려 했으나 루시펠이 잽싸게 말을 끊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당신들에게도 손해는 아니지 않나요? 제가 따라다니는 동안 저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건데.”
“......”
“이 서약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템이에요. 스텟의 제약이 걸려 있는 일반적인 계약서와 달리 스텟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죠.”
확실히 이 서약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과거 몬스터 연합의 수장.
트롤의 왕 트루크가 지니고 있던 계약서는 스텟의 제한이 걸려있었다.
S랭크를 넘기면 자동적으로 동맹 계약이 해제되는 것.
허나, 이건 그렇지 않다.
“때문에 서약자가 아무리 성장해도 계약이 중도에 해제되지 않죠. 룰을 어기면 그대로 끝이기에 룰에 빈틈만 두지 않는다면 절대로 배신 할 수 없습니다.”
일행은 침묵했다.
루시펠을 아무것도 모르기에 저렇게 말하고 있으나, 현재 일행이 노리는 것은 루시펠의 아이템.
동맹을 맺게 되면 그럴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유세현과 이강호는 동의를 표했다.
“좋다. 동맹을 맺도록 하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
망설여봤자 루시펠이 의심할만한 건덕지를 던져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후~ 잘 생각하셨어요. 제가 대충 룰을 적어뒀으니 한번 읽어보시고 부족한 게 있으면 추가로 기재해 주세요. 기재 방법은 서약서에 손을 올린 뒤 마음속으로 원하는 룰을 떠올리면 됩니다. 중복 되도 상관없어요.”
“...알았다.”
일행은 서약서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룰은 이러했다.
서로간의 공격불가능.
미리 합의하거나 의식하지 못해 실수로 공격을 가한 경우에는 괜찮지만, 의도적으로 공격한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계략, 모책, 거짓말 불가능.
배신 불가능.
소지물품 탈취 불가능.
능력 유출 불가능.
그 외에도 사소한 것이 무척이나 많이 적혀있다.
루시펠은 대충 적어놨다고 말했지만, 이건 도무지 대충 적은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치밀하다.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조금도 남겨놓지 않았다.
일행은 혹시 모를 속임수를 방지하기 위해 루시펠이 적어놓은 것을 한 번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룰도 조금 더 추가했다.
“다 됐으면 곧바로 시작하죠.”
“천사들이 주위를 수색중이다만...”
“괜찮아요.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도 천사들이 알아차릴 염려는 없어요.”
“......”
서약이 시작되었다.
서약서는 루시펠이 미리 언질 했던 대로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6등분으로 찢어져 몸속에 스며들자 손등위로 서약의 증표가 떠올랐다.
이젠 좋건 싫건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 *
[쿠어어어어-]
쿠구궁!
쾅!
난데없이 포효와 폭발음이 귓가를 울렸다.
괴물들과 천사들이 맞붙는 소리였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한순간에 결판이 났겠지만, 이곳은 암흑지대.
몬스터들의 수준이 차원이 달랐기에, 소리가 잦아들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여파가 미치면 어쩌나 했지만, 꽤나 떨어진 장소였던지라 다행히 미치지 않았다.
천사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크으으! 빌어먹을! 어떻게든 찾아라! 놈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예측 범위가 너무 광범위합니다. 게다가 이 지역의 특색 때문에 숨어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지를 할 수 있어야 되는데...냄새를 지웠는지 저의 냄새감지 스킬로는 추적이 안 됩니다. 뭐 느껴지시는 거 없습니까?”
“크윽, 마기와 신성력 둘 다 완벽하게 감췄다. 마기 쪽은 몰라도 신성력 쪽은 분명 루시펠이 분명하건만!!”
천족들은 한참을 뒤졌지만 일행을 발견하진 못했다.
유세현은 멀어져가는 신성력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가지고 있지 않았어.’
일행은 숨을 때 살짝 긴장했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언더월드 공략에 힘쓴 종족인 만큼 탐지 아이템을 지니고 있을 확률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행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유세현은 루시펠과 대화를 하면서도 오르엠이나 대천사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마력에 주의를 기했었다.
일행은 천족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그 상태로 있다가 반나절이 흐른 뒤에야 숨어있던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스트레칭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자 루시펠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뭘 할 건가요?”
“......”
일행은 그 말에 잠시 멍한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현재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루시펠이 지니고 있는 달의 빛 때문이었다.
허나, 이제는 힘으로 뺏는 건 불가능해진 상황. 당연히 달라고 할 수도 없다.
현재 일행은 목적을 잃어버린 것과도 다름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시도라고는 루시펠을 달의 샘 소환 장소까지 데려가 달의 빛을 꺼내보도록 유도하는 것 정도인데...
‘과연 그런 게 통할지...’
아무쪼록 일행은 방향을 다시 문라이트로 잡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지역으로 이동할거다.”
“호오, 그래요? 무슨 목적으로 가시는 거죠?”
“그런 거까지 말해줄 의무는 없을 텐데.”
“그건 그렇죠. 하지만 불의의 사건이 터져 흩어지지 않는 한 좋건 싫건 6개월 동안 같이 다녀야 되잖아요? 목적을 알려주시면 제가 좀 더 확실히 도움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무조건 동행하기.
이건 루시펠이 추가로 정한 룰이었다.
따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전에 동의를 구해야 된다.
“...상황을 봐서 말해주도록 하지.”
“흐음, 알았어요.”
일행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하나의 지역을 지났을 때, 그들의 앞에 모종의 인물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다. 루시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