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족 아가레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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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륵- 스륵-
흑색의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경계지대를 벗어났다는 뜻으로 엘프들을 거의 따돌렸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유세현의 표정은 찝찝한 얼굴 그대로였다.
보다 못한 김주희가 물었다.
“선배님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적이 아직도 추격해오고 따라오고 있나요?”
유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놈들은 우리를 완벽하게 놓쳤어.”
“음...그럼 왜...”
김주희가 중얼거렸다.
이 경계지대로 들어와 엘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세현의 상태는 매우 좋았다.
이것 말고는 딱히 짚이는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김주희의 생각은 사실 어느 정도 들어맞은 상태였다.
유세현은 엘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엘프들이 아닌, 바로 앞까지 다가온 로리엔에 대한 생각.
‘찝찝하단 말이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짚이는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뭔가 놓치고 있는 느낌이랄까?
‘로리엔...로리엔 디엘 라비에네크.’
그녀의 풀네임을 떠올린 유세현은 이강호에게 그 여성 엘프에 대해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잘 몰라.”
로리엔이라고 불리는 엘프는 회귀 전에도, 그리고 회귀를 위해 정보를 캐낼 때도 언급되지 않았던 비중 없는 인물인 탓이었다.
유세현은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은 살다보면 모름지기 아무 근거도 없이 묘한 감각에 휩싸이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택시에서 내린 순간 가지고 오지도 않은 물건을 두고 내린 것처럼.
일행은 결국 그녀가 기억의 던전에서 만난 엘프, 제르펠 디엘 라비에네크와 동일한 미들네임과 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도, 그로인해 이전에는 얻지 못한 특별한 힘을 얻기 직전이란 것도 눈치 챌 수 없었다.
일전의 일로 근신을 받고 있던 로리엔이 일행의 얼굴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반드시 찾아 없애주마.’
그 순간 로리엔의 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고유특성이 개화되었습니다.]
* * *
이동의 이동을 거듭한 일행은 한 개의 지역을 더 거쳐 마침내 목표 지역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김주희가 돌입하기 전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귀찮은 이종족들이 없기를...”
유세현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눈앞으로 길게 이어진 협만이 들어선다.
물은 눈 덮인 산 정상으로부터 여러 갈래를 통해 흘러내려오고 있었는데 꽤나 장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유세현이 탐색을 위해 마력의 파도에 몸을 실었다.
한 순간 꿈틀거리는 그의 미간.
일대에는 몬스터로 추정되는 마력, 이종족으로 추정되는 마력 등등 여러 가지가 분포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별난 마력이 존재했다.
어두우면서도 난폭한 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힘.
하지만 유세현에게는 한 없이 친근하게만 느껴지는 힘.
“이건...”
마족.
이 지역에는 마족이 존재했다.
김주희가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으아아...이런...많이 강해요?”
“흐음...”
유세현은 좀 더 정신을 집중했다.
일단 적의 수는 대충 어림잡아도 약 5천이 넘었다. 무척이나 많은 수였다.
게다가.
‘엄청난 순도다.’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순도를 몸속에 내포하고 있었다.
권속이 되기 전의 아퀼라, 튜토리얼의 아키몬드 따위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소 아스모데우스 급.
허나 유세현은 이에 대해 엄청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놈들... 마력의 총량이 그리 높지 않다.’
또한 그들은 오르엠이나 대천사들처럼 마력을 숨기지 못했다.
다른 이들처럼 마력이 전신에 퍼져있는 것은 덤.
유세현은 이런 존재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인 마족이 아니었다.
높은 순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에게 만들어진...
‘되살아난 시체.’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 말고는 말이 안 된다.
‘일단 키메라는 아니다.’
키메라는 고위 흑마법이다. 시체를 부품으로 사용해 이어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내공심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핵심 코어에 마력이 꽤나 집중 되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그런 특징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아닌 것.
지금 지레 짐작 해볼 수 있는 건 구울이나, 스켈레톤 정도였다.
물론, 틀릴 수도 있다.
세상은 넓으니까.
하지만 만약 추측이 들어맞는다면 놈들의 지능은 그리 높지 않을 테니 상대하는 건 엄청 힘들지는 않으리라.
유세현은 지휘자급의 마족을 걸러내기 위해 애썼지만, 높은 순도의 어둠의 마력에 섞여있는 데다가 마족 또한 본인 스스로가 마력을 숨기고 있었기에 탐색은 힘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강자리라.
그때 이강호가 질문해왔다.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데?”
장소가 겹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 한 것.
유세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이강호가 혀를 찼다.
무슨 뜻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여기까지와 언데드 군단이 있다고 포기할 그들이 아니었기에 일행은 곧장 풀숲에 몸을 숨겨 이동을 개시했다.
얼마를 나아갔을까.
스슥- 스슥-
인기척이 대놓고 느껴졌다. 고지대에 있던 일행이 슬쩍 고개를 내밀어 살폈다.
달그락- 달그락-
살 한 점 붙어있지 않는 깡마른 뼈.
인기척의 정체는 바로 스켈레톤 병사였다.
허나, 그 스켈레톤들은 지금까지 던전에서 봐온 보통의 스켈레톤 병사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난잡하지가 않고 질서 정렬하다.
유세현의 시선이 특정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충 갑주를 두르고 있는 일반적인 스켈레톤과는 다른, 갑주로 전신을 감싼 특이한 개체가 존재했다.
마치 기사의 모습을 본 딴 듯한 모습.
놈의 육신은 회색빛의 연기로 이루어져있었는데 모습을 확인한 이강호가 중얼거렸다.
“데스나이트.”
죽음의 권능을 이용하여 갑주에 영혼을 강제적으로 속박시킨, 명령 없이도 독자적으로 생각과 판단을 내릴 수 있어 지능과 순수 전투력으로는 키메라를 뛰어넘는 최상급 언데드.
데스나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생전 영혼이 사용했던 기술을 그대로 재현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데스나이트가 검을 뽑아 앞으로 쭉 내뻗자 스켈레톤들이 다음 장소를 향해 나아간다.
일행은 그들을 피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허나.
“여기까지군.”
일대는 거의 마족의 땅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추적 장치를 찾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 멀지않은 시일 내내 다다르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투가 필요하다.
시선을 교차한 유세현과 이강호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 *
“뭐? 데스나이트가 당해?”
쫙 찢어진 입과 앞으로 돋아난 4개의 뿔이 유난히 돋보이는 마족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마족이 조소를 흘리며 이를 비웃었다.
“쯧쯧, 관리를 어떻게 했으면...”
뿌득-
마족의 이가 갈렸다.
아가레스가 자신을 비웃은 그렉크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라 그렉크스.”
허나 그렉크스는 더욱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크크크. 이거 나 원 참. 살 떨려서 뭐 말도 못 꺼내겠군. 하지만 아가레스 네가 뭘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넌 이제 내 상관이 아니야. 같은 위치지.”
“...네놈...”
“그리고 실수로 팔 하나 날려먹은 네가 이제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정말 한 번 해볼까?”
그렉크스가 더욱 비아냥됐다.
아가레스의 표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일그러졌다.
지금 그렉크스가 건드린 것은 역린이었다.
셀론을 잡으러 넘어간 판도라 외부.
내부에 있던 자가 외부로 넘어갈 시에는 패널티로 시간제약이 생기며 스텟이 일정 수준까지 하락한다.
그 때문에 아가레스는 붙잡은 셀론을 떼어내지 못했고 팔을 내주어야만 했다.
전투에 있어서 양쪽 팔의 유무는 하늘과 땅 차이.
덕분에 앞날이 꽤나 창창했던 아가레스였지만 추락하고 말았다.
애써 분을 삭인 그는 곧장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아가레스를 깔본 그렉크스였지만 그 또한 동행했다.
문라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이윈드.
행여나 카시우스가 직접 나선 경우에는 다른 마땅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훑어본 그렉크스가 말했다.
“엘프쪽은 아닌 것 같군.”
“확실히...”
엘프의 전투에는 특별한 흔적이 남는다.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기에 화살에 의한 관통상이 지형지물에 새겨지는 것.
“전투를 치룬 이후 곧바로 빠져나간 것 같은데...딱히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되겠어.”
아가레스는 이런 말을 내뱉은 그렉크스를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돌대가리 같은 놈.’
데스나이트는 이제는 좀처럼 만들기 힘든 개체로 대악마가 직접 제조한 것이었다.
게다가 스켈레톤 수준 하나하나가 꽤나 뛰어났다.
적을 완벽히 당해내지는 못했을지언정 적의 시신, 아니 아무리 못해도 잘려나간 신체부위나 살점 정도는 남아있어야 정상이었다.
즉, 이건 힘의 격차가 상당히 컸다는 뜻.
그런 놈들이 이 장소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을까?
‘우리가 노리고 있는 걸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뚫은 뒤 더 깊은 장소로 들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아가레스가 고개를 홱 돌려 뒤를 응시했다.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세현 일행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이 좋은 놈이네. 기척을 완벽히 숨겼는데...”
“뭐, 강자들의 대부분이 그렇지.”
일행은 일부러 전투를 했다. 추후를 대비해 놈들의 실력을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는데, 그냥 파악하기는 힘드니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카엘 같은 대천사급은 아닌 것 같아. 그 이하. 하지만 무척 강해.”
유세현은 최상급 천사에 빗대었다.
“흠...그렇단 말이지.”
이강호가 턱을 짚었다.
두 명에 불과하니 격파는 충분히 가능한 존재들이었다. 문제는 주위에 보좌하고 있는 수하들의 질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과 그 밖에 더 강한 다른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일행은 욕심을 버리고 처음의 계획처럼 목적만 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일이 항상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 법이었다.
“큭큭큭!”
스산하면서도 비릿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그렉크스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소리였다.
일행은 현재 목표지점의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외곽은 촘촘한 했지만 내부는 이에 미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문제는...
“크하하하하!”
그렉크스의 광소가 이번에는 일대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놈은 손에는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나침반이 들려있었다.
유세현 일행이 그토록 원하던, 세 개의 보물의 위치를 추적해주는 아이템.
[달빛의 나침반]
마침내 마족이 발견해낸 것이다.
그것도 일행이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크크크, 아가레스의 표정이 눈에 훤히 비치는 군.”
즐거워하고 있는 그렉크스를 보며 일행은 정확히 5초 동안 의견을 나눴다.
“처리하자.”
“그러죠.”
이강호의 제안에 김주희가 적극 동조했다.
루시아와 아퀼라, 유세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위에 위치해있는 병력들만 해도 1천이 그냥 넘었지만 한 번 마음을 정한 일행은 망설임이 없었다.
유세현이 허공에 검을 그었다.
스킬을 운용한 것인지 아닌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천마의 무공.
[천마광룡참.]
스슥-
몸통이 잘려나가 쓰러지는 스켈레톤들.
가장 가까이 있던 놈들은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 바로 뒤에 있던 스켈레톤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한 때쯤에는 이미 100구가 넘는 스켈레톤들이 지면을 뒹굴고 있었다. 능력을 고려하자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날아온 선을 잽싸게 회피한 그렉크스의 눈이 쫙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