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2)
-------------- 338/606 --------------
만약에 이곳에 다다른다면 과연 무엇을 얻게 될까?
‘고유특성’
특수특성이 개발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세현이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때문에 유세현은 이 알림창이 최초로 등장했을 때 곧바로 이강호에게 물었었다.
혹시 위치를 알고 있는지.
가능성은 무척 높았기에 그때 유세현의 기분은 살짝 고양되어 있었다.
허나.
“모르겠어. 들어본 적이 없어.”
그 기분은 1분도 가지 못했다.
검은 성, 불타오르는 성 등등 판도라 내의 수많은 성을 알고 있는 이강호조차도 철의 성에 대한 것만큼은 알지 못했다.
그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이강호조차도 알지 못하는 장소를 고작 100억 명이 희생되어 만들어졌다는 한 개의 단서만을 가지고 찾아내야 되다니.
이건 사실상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평생이 지나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유세현도 사람이기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
허나, 유세현은 이를 겉으로 절대 티내지 않았다.
그가 내면을 너무 잘 다스리기 때문이 아니라 고유특성의 개화를 보다 더 간곡히 바라고 있는 눈앞의 여성, 김주희는 이런 자그마한 희망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약 3년 반에 가까운 공백이 있었다지만 줄곧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유세현은 김주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경지가 높아진 지금에와서도 창술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빙공의 증진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이강호를 뛰어넘기 위해서.
빙제를 뛰어넘기 위해서.
그래서 유세현은 김주희가 더욱 안타까웠다.
고유특성은 운과 재능.
노력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게다가 고유특성은 성격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그녀의 성격은 독하지만 여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강호의 고유특성과 비슷한 빙계능력의 강화겠지만, 만약 고유특성을 얻게 되도 그런 힘을 얻진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특수특성 쪽으로 관심을 돌린 것 같은데...
특수특성 또한 얻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세현은 마왕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죽었을 것이고, 루시아는 의지가 조금만 약했더라면 정신이 붕괴되어 이곳에 서있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새 비교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특수특성란을 응시하는 김주희의 표정에서는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는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는 것이 유세현의 두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불침번 초번초는 아퀼라와 루시아였기에 스테이터스 대조를 끝낸 둘은 곧바로 숙면을 취할 준비를 했다.
빠른 공략을 위해 몸을 격하게 움직인지라, 피로감이 몰려온다.
유세현은 잠들기 전 김주희를 바라봤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행운이 따르기를...
* * *
이틀이 더 흘렀을 때 그들을 맞이해준 것은 두개의 갈림길이었다.
이 던전은 방심만 안하면 당하지 않을 수준이었기에, 유세현은 팀을 나누기로 했다.
휘이잉-
영문 모를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다시 한 번 장내에 감도는 비장함.
세 명의 눈빛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이전에야 불침번으로 끝났지만 이번에 갈라지면 보스룸 앞에서 재회하기 전까진 유세현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세 명은 마치 목숨이 걸려있는 게임처럼 사력을 다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승리자는...
“후후. 수고해라. 인간들아.”
아퀼라가 거만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루시아는 가위를 낸 스스로의 손을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봤고, 김주희는 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으으!! 아퀼라!!”
이윽고 간단히 작별인사를 나눈 뒤 저편으로 사라지는 유세현과 아퀼라.
두 사람이 떠나가자 둘만 남게 된 공간에는 더욱 진한 정적이 감돌았다.
친하지 않은 둘.
아니, 어색한 둘.
허나 어쩌겠는가, 이제는 둘 밖에 남지 않은 것을.
“그...저희도 출발 할까요?”
“아...예. 그러도록 하죠.”
김주희의 조심스러운 말에 루시아도 조심스럽게 답했다.
김주희는 가슴이 콱 메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던전 공략...어쩌면 공략의 최대의 적은 몬스터보다도 이 답답함이 될 것만 같았다.
* * *
김주희와 루시아는 빠른 속도로 던전을 나아갔다.
그들은 묵묵히 걷는 것보다도, 전투를 하는 것이 더 달가웠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어색함이 흐르지 않으니까.
그간 함께해온 것이 있어 둘은 전투에 관해서는 죽이 척척 들어맞았다.
“루시아씨 거기!”
“알겠어요!”
콰아아앙-
심마의 절규가 몬스터들을 휩쓸며 정신을 붕괴시키자, 루시아가 빙공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코인분배.
두 사람이 길을 재차 나아가기 시작하자, 적막이라는 사신이 다시 그들의 곁으로 찾아왔다.
얼굴만 아는 친하지 않은 친구와 걸을 때의 그 불편한 감각.
김주희는 이참에 더 다가서 볼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같은 성별을 지닌 여자들과는 친하지 않았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기에 견제를 당한 것도 이유이긴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굳이 다가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친해지기 위해서는 취미생활이던 뭐건 공통분모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 걸 함께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눈치보고 돈 들여가며 동성친구를 사귈 바에는 차라리 돈을 안 써도 뭐라 하지 않는 이성친구를 사귀었다.
덕분에 동성친구를 사귀는 법은 잘 모르는 김주희.
연기라면 가능하지만, 그것은 동료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란 것을 김주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는 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한 연적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 끝판왕이다.
물리쳐야 되는 적이지만 순수한 힘으로는 물릴 칠 수 없는 거대한 적!
그렇게 생각하자, 김주희의 비상한 뇌가 다른 방면으로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중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맞아. 얘는 적이다.’
그렇다면 비겁하지만 이참에 둘만 있게 된 거 약점 한두 가지를 알아내 두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약점 같은 게 있나?’
이 세계는 사회가 아니다.
마음만 맞으면 바로 잠자리를 함께할 정도로 성에 대한 인식도 자유로웠고, 살인이나 강간 등을 제외하고는 제약이 별로 없었다.
‘약점은 무슨...’
괜한 생각을 했다고 한 김주희는 다시 던전을 공략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 뒤.
“어? 주희씨 여기 뭔가가...”
드르륵-
루시아가 던전의 숨겨진 길을 발견했다.
* * *
루시아가 발견한 길은 던전을 빠르게 공략할 수 있는 그런 비밀통로가 것이 아니었다.
보다 더 난이도가 높은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이, 더 큰 보상이 주어지는 히든보스로 향하는 숨겨진 스테이지였다.
때문에 한 개의 방을 처리한 두 사람은 정해야만 했다.
일반적인 통로로 나아갈지, 아니면 이 숨겨진 통로를 공략해야 될지.
“루시아씨가 발견해낸 길로 가죠.”
김주희의 말에 루시아가 안색을 굳혔다.
숨겨진 통로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스텟은 그들에 비하자면 여전히 낮았지만, 신경독 스킬이 장난이 아니었다.
최소 S랭크되는 저항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몸이 굳어 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흠...위험하지 않을까요?”
“재빠른 놈들이 아니니 주의하면 괜찮아요. 그리고 놈들이 저항력 코인도 줄 테고.”
김주희는 더 강해지고 싶었다.
고유특성이나 특수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순수한 스텟만이라도 다른 이들보다 높길 원한다.
그런 면에서 고유특성과 특수특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루시아는 그녀 입장에서는 정말 부러운 존재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쪽으로 가죠.”
반면 루시아도 김주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창술이나 무공 등 그녀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자신으로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저 당당함 유연한 사고방식.
서로를 부러워 하는 둘은 이윽고 몬스터를 빠르게 휩쓸기 시작했다.
* *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허나, 그런 때야말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되는 법.
돌발 상황은 정말 갑자기 발생했다.
김주희가 디딘 장소가 트랩이 설치된 장소였던 것인데 수많은 마법이 쏟아져 내리고, 더욱 많은 몬스터들이 들이 닥쳤다.
“크윽!”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
루시아가 피해를 입었다.
이름 모를 거미형 몬스터가 뒤에서 등장했는데 놈이 찌른 독침에 발목을 제대로 당한 것이다.
“미안해요. 제가 트랩을 발동시키는 바람에...”
김주희의 사과.
루시아는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독의 해독까지는 평균적으로 30분 정도가 소요되기에 둘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또다시 감도는 적막감.
김주희는 시간이 이렇게 안 갈 수 있나 싶었다.
1분이 마치 1시간 같은 느낌.
조금이라도 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자, 루시아의 얼굴이 보다 더 상세하게 비친다.
‘얼굴도 앳되고...창백한 거 빼면 피부도 좋고...몇 살 때 이곳으로 넘어 온 거지?’
그렇게 생각한 김주희는 아직 도루시아의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김주희가 대화도 할 겸 물었다.
“루시아씨, 루시아씨는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예?”
당황한 표정이 되는 루시아.
김주희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아...그게, 다른 분들의 나이는 전부 알고 있는데 루시아씨만 아직 몰라서...혹시 실례라면 안 가르쳐 주셔도...”
“아, 아뇨! 저, 저는 그러니까...올해로 22살이에요.”
22살.
꽤 어리다고 생각한 김주희의 미간이 살며시 좁혀졌다.
알테리아 대륙인들은 만 나이로 계산한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현재 김주희의 나이는 24살.
게다가 생일은 12월 23일로 생일이 늦어 아직 안 지났을 테니 22살.
즉.
‘어라? 동갑이네?’
김주희는 정신적으로 큰 쇼크를 받았다.
분명 자신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거 완전 타고 났구만.’
자외선을 평생 피해 살아야 됐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현실적인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김주희가 나이를 밝히자, 루시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반대로 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주희의 외모도 사실은 충분히 어린 외모였지만 능수능란한 행동 때문이었다.
“와....동갑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네요.”
“아...저도요.”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악수.
김주희는 이참에 이 어색함을 끊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어색함을 끊는 방법.
간단하다.
친구가 되면 된다.
물론, 동성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기에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차피 계속 같이 다닐 것 같은데...서로 말 놓으실래요?”
“어...예?”
“그러니깐...친구먹자는 건데...별로 내키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김주희가 밑밥을 깔았다.
루시아는 그 말에 혼란을 일으켰다.
친구.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가상의 존재.
이전에도 단지 나이가 같다고 이런 식으로 친구를 먹는 것을 본적은 있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의견이 갈려 싸우고 자시고 난리도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자신만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고 김주희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 결코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유세현과 이강호처럼.
같은 한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와 자신이.
루시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살면서 친구를 사귀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친구란 줄곧 가지고 싶었던 로망.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루시아가 말했다.
“...그럼 말 놓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