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와 패자(5) >
조금만 더 몰아붙인다면 끝장을 낼 수 있다.
엘리아크가 오르엠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치켜세운 거대한 손이 오르엠의 육신을 향한다.
정타로 맞으면 끝!
예상치 못 한 사건은 딱 그때 발생했다.
우우웅!
팅!
엘리아크의 팔이 무형의 기운에 부딪치며 튕겨져 나간 것!
엘리아크의 거구의 육신이 쓰러지며 일대를 휩쓸자 유세현은 살짝 당황했다.
‘공간을 격리시키고 있는 결계는 부셔졌을 텐데 어째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는 유세현을 향해 답을 내놓은 것은 엘리아크였다.
[저는 이 이상 나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
유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추측이 갔으니까.
이전 고대 병기에 대하여 물었을 때, 이강호는 이렇게 답했었다.
[난 고대병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봤다면 정보를 알고 있었겠지.]
이는 시나리오 종료 이후, 고대병기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고대병기의 활동영역이 여기까지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괜찮아. 거신이 서포터만 해줘도 충분히 다 잡을 수 있는 상황이다.’
“후욱...후욱...”
미카엘이 이틈을 타 이곳에서 이탈하기 위해 거친 날갯짓을 펼쳤다.
잽싸게 달라붙는 유세현.
“크으! 이 귀찮은 바퀴벌레 같은 놈이! 이제 그만 좀 포기하고 떨어져라!”
미카엘은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하늘을 밟다니! 게다가 방향을 바꿔도 속도도 줄어들지 않는다.
법칙을 깨부수는 저 특이한 스킬을 대체 뭐란 말인가?
이어서 솟아오른 흙이 가시가 되어 쇄도하자 수틀린 미카엘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크...주변의 지형지물을 마음대로 다루다니!’
공간의 부츠에 걸려있는 마법의 효과.
현재 공간의 부츠는 마법의 효과 말고도 순수한 방어력 면에서 제값을 똑똑히 발휘하고 있었다.
방어력은 곧 공격력이었으니까.
천마군림보를 응용한 발차기가 정확히 미카엘의 등에 꽂혔다.
슈우웅!
쾅!
지면에 처박히는 미카엘.
“크으으!”
오만인상을 구긴 채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선 미카엘은 헛바람을 들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느 샌가 낙하한 유세현이 검의 그의 목 바로 앞에 있었다.
슈우욱!
쾅!
유세현은 순수한 힘으로는 미카엘을 짓누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한손뿐이었다.
한손과 양손의 힘은 천지차이.
허나, 낙하속도는 이런 힘을 커버해주었고, 루베르크는 미카엘의 목젖 바로 앞에 있는 상태였다.
창으로 방어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갔을 터.
유세현이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미카엘은 또다시 부패의 어둠인가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마왕의 전용 비전마법.
[흑뢰검.]
치지직-
“이자식이!”
미카엘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마왕과 비슷한 순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똑같은 스킬까지 지니고 있다니!
“크으으!”
아무쪼록 미카엘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꾸구구국-
밀어내려 힘을 주었지만, 유세현은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다.
미카엘은 이미 상당히 많은 체력을 소진하여 도무지 정상적인 육체상태가 아니었다.
“미카엘님!”
미카엘을 돕기 위해 수많은 천사가 날아왔다. 그중에서는 아퀼라와 루시아, 김주희를 상대하던 라파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세현이 무공을 운용했다.
반경의 위치한 모든 것을 비틀어버리는, 일반적인 광역스킬과는 남다른 스킬.
[천마대멸겁(天魔大滅劫)]
꾸구구구-
“?!”
일부는 회피했지만, 일부는 회피하지 못했다.
뚜둑- 뚜두뚝-
달려오던 중급천사 3명의 관절이 기괴하게 수틀리며 쥐어 짜이기 시작한다.
“끄윽...끄으으윽”
천사는 신성방어 마법을 응용하며 버티려 했지만 한 번 먹잇감을 물은 천마대멸겁은 천사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치치직-
어둠의 마력과 섞인 패도의 힘이 가소롭다는 듯 지친 천사들의 힘을 깨부순다.
콰드득! 콰드득!
“끄악! 끄아아악!”
한 명의 폭사되었다.
육신의 파편과 함께 코인이 주위를 뒤덮자, 똑같은 기술에 걸린 나머지 두 명은 잔뜩 사색이 되었다.
버티지 못하면 그들 또한 방금 죽어나간 동료처럼 될 것이기에.
아퀼라의 견제가 곧바로 이어지자 라파엘은 이를 악물었다. 미카엘을 돕고 싶지만 그 또한 도저히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연달아 날아오는 물리적인 공격도 공격이지만, 서큐버스 퀸이 슬쩍 슬쩍 걸어오는 환각.
본래라면 침투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대천사의 정신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니까. 아니 그것을 떠나 몸을 지켜주고 있는 신성력 때문에라도 침투하지 못한다.
과거 서큐버스 퀸, 나차쉬도 라파엘을 홀리지 못하고 그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지쳤다고 하나 뚫리다니?
‘크윽! 이건 일반적인 환각술이 아니다.’
스르륵-
의식이 현실에서 벗어나려 한다.
“흐하합!”
라파엘은 점점 고갈되어가는 신성력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사이 목을 향해 쇄도하는 아퀼라의 검.
환각도 환각이지만 눈앞에 있는 서큐버스 퀸과 나차쉬 사이에는 또 다른 큰 차이점이 존재했다.
나차쉬는 본래 지니고 있던 환각과 마법만으로 대응했던 반면, 바로 앞에 있는 서큐버스 퀸은 몸을 직접 움직이는 무기술을 사용한다는 것.
게다가 실력도 수준급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파엘이 보기에 눈앞의 서큐버스 퀸은 보통 마족은 결코 아니었다.
나차쉬를 제외하고도 여태까지 무기술을 사용하는 서큐버스 따위는 본적이 없었으니까.
서큐버스들은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마법적 한계를 잘 알면서도 마법만을 사용했다.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는데, 지니고 있는 마법으로도 대부분의 적은 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튜토리얼을 한다고 생각해봐라.
아무 능력 없던 사람은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반면, 서큐버스는 마법만 쏘면 적이 픽픽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다.
적을 쉽게 죽일 방도가 있는데 과연 누가 몸을 움직이려 할까?
‘젠장...이래서는 정말 여기서 당한다.’
딱 그때였다.
오르엠의 앞으로 갑작스럽게 한 인물이 등장한 것은.
푸른빛이 맴도는 머리카락.
“가브리엘!”
그렇기 불린 가브리엘이 외쳤다.
“긴급 탈출욜 게이트를 열겠습니다!”
꿈틀거리는 유세현의 눈가.
이렇게 변수가 발생하다니.
지금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이 신성력을 전부 끌어 모아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대지 뒤엎기!’
콰아아아!
땅을 관장하는 천사, 라파엘이 손을 들어 올리자 흙이 솟구치며 해일이 되었다. 단순한 흙이 아닌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는 흙이었기에 웬만한 스킬로는 대응이 안 된다.
“비켜라!”
미카엘도 온힘을 다한 발차기로 유세현의 몸을 밀쳤다.
“우리엘!”
“알고 있다!”
타르탄과 붙고 있던 우리엘도 퇴각.
포탈이 열린다.
유세현은 모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와서 아쉽게 놓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적은 현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는 상태.
‘충분히 맞출 수 있다.’
그가 일검을 휘둘렀다.
후웅!
바람이 그 자리에 남는다.
천마광룡참은 주위에 있는 천사들을 가르며 열린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온힘을 다한 일격으로 일시적으로 나마 알테라그를 떨쳐내는데 성공한 오르엠의 눈이 수틀린다.
공간 자체를 잘라버리는 능력이라니!
부딪치면 포탈은 100% 닫힌다.
“더 속도를 높여라! 바로 포탈 속으로 들어가라!”
쉬이이익-
살아남은 천사들은 포탈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은 그런 잡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라파엘과 미카엘, 우리엘에게만 신경 썼다.
맹렬한 기세로 나아가는 천마광룡참은 제일 뒤처진 우리엘에게 거의 다다라있었다.
살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그 순간, 오르엠이 생성해낸 빛의 방패와 천마광룡참이 맞부딪쳤다.
급조해낸 방패는 채 1초를 버티지 못했다.
문제는 1분 1초를 앞 다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짧은 시간이 무척 크게 작용한다는 것.
우리엘이 전속력으로 날며 흘깃 뒤를 살폈다.
병력의 일부가 고기방패가 되어준 덕에 아슬아슬하지만 포탈 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치지직-
콰아아앙!
세 명의 대천사들을 향해 떨어지는 낙뢰.
“크으으으으!”
스토크가 발산한 것이었다.
위력은 마력이 여의치 않아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낙뢰는 약화 된 대천사들의 몸을 한 순간 경직시켰다.
“으으으!”
대천사들은 필사적으로 날았다.
제일 앞서있던 라파엘이 먼저 내부로 들어가고 연이어서 미카엘이 들어갔다. 가브리엘은 우리엘과 함께 먼저 들어갔기에 상태였기에 이제 우리엘만 들어가면 끝이었다.
손끝이 포탈에 닿자 우리엘의 안색이 펴졌다.
자신도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지만.
쉬익-
귓가에 울려 퍼지는 바람소리.
“아...”
포탈이 닫힌다.
우리엘은 한 순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현실을 인지한 것은 잘려나간 하반신이 망막에 맺혔을 때.
“마...말도 안...”
손을 뻗고 중얼거리는 그의 눈앞으로 흑빛의 뇌전을 담은 섬광이 뚝 떨어졌다.
* * *
휘이잉-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현재 이 자리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종족은 알테라그를 따르는 티탄과 인간, 그리고 스토르 벤뿐이었다.
“후우우...”
유세현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비로소 전투가 끝이 났다는 것이 실감난다.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어, 응. 넌 어떠냐?”
[...그 건에 대해서 잠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엘리아크가 손을 내밀었다.
발걸음을 옮겨 올라타자 눈높이를 맞춘 엘리아크는 뭔가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로 유세현을 응시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엘리아크가 마침내 입을 뗐다.
[아버지. 공간이 이동되면서 제 동력부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겼어요.]
“......”
[이건 특성상 복구가 불가능할 것 같아요.]
유세현은 엘리아크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왜 더 이상 거신이 등장하지 않는지도.
엘리아크는 지금 유세현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약 5분 후에는 기능이 완전 정지 될 것 같아요.]
“......”
유세현은 슬픈 표정을 지어주었다.
비록 본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건 엘리아크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아버지의 작품이라 기뻤습니다. 일개 병기에 불과한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엘리아크가 가슴의 수정구에서 아주 작은 파편을 꺼내 손위에 내려놨다.
[제가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모인 제 힘의 정수입니다. 아버지께만 드리는 제 선물입니다. 연구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파편은 순식간에 깃털로 변화했다.
‘어?’
정말 아차 한 순간이었다.
자동적으로 유세현의 등에 흡수되는 깃털.
[단 하나밖에 없는 파편조각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에 10% 추가상승 효과가 적용됩니다.]
[소유자의 능력계발을 위한 방향이 일부 제시됩니다.]
[남아있는 유적의 힌트가 일부 제공됩니다.]
유세현의 눈이 빠르게 감았다 뜨고를 반복했다.
대리자가 보기에 기분 좋을 법한 알림창이 꽤나 많이 나타났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망했다.’
신물파편은 한 번 귀속되면 되돌릴 수 없다. 죽을 때까지 귀속되는 것이다.
다른 외부 신물파편이야 다른 이들에게서 빼앗으면 된다지만...이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부디 행복하시길...]
동력원에 불이 꺼지며 엘리아크가 이내 작동을 완전히 멈췄다.
< 승자와 패자(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