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와 패자(4) >
곧바로 날릴 수도 있었지만 오르엠은 참았다.
비록 카르가스의 능력이 알그하브에게 밀린다고 하나, 그도 크로마스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었다.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
놈은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황은 이보다도 더 최악으로 치닫게 될 터다.
신중하게 타이밍을 살피는 오르엠.
그 순간.
쿠구구!
파앙!
알테라그가 만든 파동의 검격이 오르엠의 육신을 덮쳤다.
몸을 뒤덮고 있던 온갖 신성마법이 깨지며 그 충격이 고스란히 뼈와 살에 파고든다.
잔뜩 혈안이 된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르엠은 아픔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고작 단 한 마리,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단 한 마리의 벌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다니!
과거, 거슬리는 드래곤 한 마리를 붙잡아 처단할 때, 놈이 내뱉었던 조롱이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계속 자극한다.
[이 세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오르엠. 여타종족들이 마냥 덜떨어져 보이나 본데, 넌 분명 언젠간 네가 하찮게 여기는 미물에게 큰코다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오르엠은 지금껏 이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찮은 미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발버둥 정도니까.
그런데 이번 발버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쓰나미였다.
“크윽!”
확실한 틈이 생기기까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은 없다.
오르엠이 손을 휘저었다.
공격과 방어에 사용되고 있던 10개의 창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창이 일제히 카르가스를 향해 날아갔다.
은근슬쩍 주위에 분포 시켜놨기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3초도 되지 않았다.
“...!!”
깜짝 놀란 카르가스가 격렬하게 몸놀림을 선보이며 회피하기 시작한다.
한 개, 두 개. 세 개.
‘크으! 젠장!’
초조해진 오르엠은 창 컨트롤에 보다 더 신경을 집중했다.
‘제발 맞아라!’
오르엠의 비원대로 카르가스가 창에 적중당한 순간은 그가 일곱 번째 창을 피했을 때였다.
푹-
오른쪽 가슴을 관통하며 정확히 심장을 꿰뚫는 여덟 번째 창.
허나, 카르가스는 그냥 크로마스가 아닌 돌연변이였다.
왼쪽에는 한 개의 심장을 더 지니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에 비해서 재생력이 높았다.
“크으으! 오르엠! 네놈!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
카르가스가 격분을 토해내자 오르엠의 인상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실패.
이제 자신이 놈을 죽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될까?
살기위하여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의 눈동자에 근처에 있는 케르트란이 들어왔다.
현재 이 싸움의 승리자는 천족도 티탄도 아닌 인간.
계산을 순식간에 끝마친 오르엠이 체면 불구하고 있는 힘껏 외쳤다.
“케르트란! 카르가스를 죽여라!”
* * *
유세현의 거신 탈취.
그 모습을 본 케르트란의 마음은 무척 심란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신물 파편에 대한 것은 이미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상황은 단 1%도 나아진 게 없었다.
이곳에서 천사들이 전멸한다면? 오르엠과 대천사, 최상급 천사들에게서 나온 코인을 인간들이 흡수한다면?
되려 거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천사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멍청한 놈이었다면 코인을 가로챌 생각을 해보았겠지만, 케르트란이 보기에 유세현은 무척 철저한 놈이었다.
자신의 입장을 알고 지금까지 힘을 숨겨왔으니까.
수작을 부리려는 것을 보는 순간 거신을 이용해 은근슬쩍 공격을 해올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
‘크으...대체 어떻게 해야...’
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찰나 오르엠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케르트란! 카르가스를 죽여라!”
케르트란은 그 순간 머리가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그는 오르엠이 내뱉은 말들을 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타다닥-
카르가스의 머리위에 드리우는 거대망치!
“크으으! 이놈들이!”
카르가스가 다급히 팔을 들어 올려 방어를 했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그가 정타로 내리꽂은 그 일격을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뿌드득-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며 튕겨져 나가는 팔!
거대망치는 그대로 카르가스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죽어라! 죽어! 죽어!”
케르트란은 코인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몇 번이고 내리쳤다.
트득.
트드득-
쨍그랑!
시나리오의 종결을 알리듯, 지금까지 공간을 격리하고 있던 무형의 장막이 우수수 부서져 내린다.
순식간에 안색이 밝아지는 케르트란.
두 왕이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모두 이 장소에서 이탈하라!”
병력들이 대거 몸을 돌린다.
케르트란도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우리엘을 상대하던 타르탄이 그것을 보기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지금 어딜 가는 것이냐! 당장 돌아와서 싸워라!”
케르트란의 미간이 움찔거린다.
평소였다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손해만 잔뜩 본 그는 좀처럼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오만쌍욕!
“지랄하지 마라! 과거의 유산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이냐! 현 티탄의 왕은 바로 나다! 바로 나란 말이다!”
“저, 저놈이!”
타르탄은 당장에 쳐 죽이고 싶은 표정이 되었지만, 우리엘을 신경 써야 했기에 그 이상은 관여하지 못했다.
거대한 고목이 즐비해있는 숲속을 가로지르는 케르트란.
“허억....허억...”
거신이 점차 멀어진다.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자 생존의 기쁨은 빠르게 수그러들고 분노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빌어먹을...’
꽁지 빠져라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니, 이건 그의 생애에 있어 최고의 수치였다.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간다.
케르트란은 다짐했다.
어떻게든 힘을 더 키워 천족이건 인간이건 모조리 부숴버릴 것을!
그런데 그때였다.
눈 앞이 번쩍였다.
콰아아아앙!
반응할 새도 없이 피어올라 케르트란의 육체를 잠식하는 청염의 불기둥!
“끄아아아아악!”
일부 주홍빛을 띠고 있는 그 불기둥의 위력은 그 강한 인내심을 지니고 있는 케르트란의 입에서 비명을 내뿜게 만들 정도였다.
치이익-
쿵-
이내 케르트란의 거구가 지면에 고꾸라졌다.
“끄으으으...이게 무슨...”
케르트란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했다.
허나.
트드득-
새까맣게 그을린 육체에 균열이가며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케르트란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크윽...내몸이...내몸이 어떻게 불길 한방에!!’
케르트란이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육신은 더욱 빠르게 분쇄되어갔다.
저벅. 저벅.
저편에서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케르트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케르트란은 떨리는 눈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네놈은!”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어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유세현의 동료 이강호.
그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호오...이걸 잘도 견뎌냈군.”
“......”
케르트란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펌프질을 했다.
지금 이강호가 창을 휘두르면 아무리 케르트란이라고해도 견뎌낼 수 없었다.
놈의 행동에 모든 것이 좌우되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절로 넘어가는 마른침.
케르트란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그에게는 제일 아끼는 오른팔과 왼팔이 남아있었다.
화염을 봤을 테니 필히 달려올 터.
내장까지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이곳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복구가 가능하다.
“사, 살아있었나?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뭐, 보고 있는 대로다. 멀쩡하지.”
“...어떻게 이런 불꽃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케르트란이 물었다.
그는 시간을 끄는 것을 제치고도 이것만큼은 정말로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레드드래곤도 이정도의 열기를 내뿜지는 못한다.
이건 스텟의 격차를 뒤집는, 한낮 미물은 결코 지닐 수 없는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능력이었다.
이강호가 손가락을 좌우로 반복해 저었다.
그를 영웅까지 만들어준 능력의 비밀.
아무리 죽일 인물이라고는 하나 누가 그것을 밝히겠는가.
“케르트란. 난 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이강호의 말에 케르트란의 심장박동 소리가 두 배 빨라진다.
어떻게든 버텨야 되는데!
“너에게 신의 철퇴와 태양의 왕관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비보를 넘겨라. 넘기면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마.”
“...?!”
케르트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눈꼬리를 날카롭게 올린 케르트란이 입 열어 말했다.
“네놈...일부러 날 죽이지 않은 거로구나.”
“...어떻게 할 테냐 정해라. 정할 시간을 딱 10초주겠다.”
“......”
케르트란은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노림수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완벽한 외통수. 헛수작은 부릴 수 없다.
“...내가 비보를 넘기면 정말로 날 살려줄 것이냐?”
“약속하지.”
케르트란이 이강호의 눈동자를 묵묵히 응시했다.
대뜸 터져 나오는 폭소.
“크하하하! 너희종족은 거짓말도 청산유수로 잘하는구나!”
“거짓말이 아니다. 넘긴다면 내 이름을 걸고 너를 살려...”
“큭큭큭, 내가 보기에 네놈은 절대 그럴 놈이 아니다. 받는 즉시 나를 제거하겠지.”
케르트란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더 이상 구질구질한 면모를 보일 생각 따윈 없었다.
이강호가 마음속으로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보를 얻을 수 있었으면 금상천화였을 텐데.’
허나 그도 케르트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접은 상태였다.
이강호가 묵묵히 창을 치켜세우자 케르트란이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이렇게 가게 될 줄이야...인생은 부질없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꼭 들어맞는구나. 허나, 네놈이라고 그 끝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너도 언젠간 나처럼 이렇게 어이없게...”
이강호는 케르트란이 악담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푹-
싸늘한 음색이 공간을 울렸다.
케르트란의 친위대가 도착한 것은 치솟은 화염이 주위를 활활 불태우기 시작할 때였다.
“케르트란님! 어디 계십니까! 저희가 왔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이제 그곳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흩날리는 재밖에 없었다.
* * *
유세현이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이 시점에서 자신의 아군을 제거해서 빠져나갈 생각을 해내다니.
‘하지만 놓치지 않는다.’
번뜩이는 붉은 안광이 미카엘을 향했다.
케르트란은 그렇다 쳐도 유세현은 극상성의 힘을 지니고 있는 놈들만큼은 이곳에서 결코 곱게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놓치지 마라 알테라그! 놈들 때문에 이 전쟁이 여기까지 온 거다!”
“알고 있다!”
알테라그가 오르엠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유세현은 이어서 엘리아크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엘리아크! 이제 더 이상 잔챙이 따윈 신경 쓰지 마라! 오르엠에게 집중해라!”
[예! 아버지!]
오르엠을 향해 고농도로 압축 된 마력포가 쏟아진다.
무척 빠른데다가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인지라 전부 피하는 것은 불가능.
콰앙!
“크으윽!”
충격으로 인해 멀찍이 밀려나는 오르엠.
“허억...허억...허억...”
놈의 거친 호흡을 확인한 유세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승자와 패자(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