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르트란(1) >
“많군.”
티탄족이었다.
일대를 봉쇄하고 있던 놈들은 대화고 자시고 뭘 해볼 틈도 없이 스킬을 쏟아 부었다.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일행이지만 막 이동된 찰나라 반응이 살짝 늦을 수밖에 없었다.
콰과과광-
구울들이 폭사되며 사방으로 육편이 튀었다.
막강한 화력이었지만, 일행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허억...허억...”
루시아의 노고 덕이었는데 방금 전과 같은 화력을 또다시 막을 힘은 없어 보였다.
“호오, 이걸 버티다니 제법이구나.”
저편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살핀 이강호의 입이 악 다물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현재로서는 스치기도 싫은 최악의 인물이었다.
파괴왕, 케르트란.
판도라의 티탄족을 이끄는 티탄족의 왕.
‘젠장...걸려도 하필 놈에게 걸리다니...’
“세현아, 저놈 판도라의 티탄이다. 팔찌 내밀어 봤자야.”
“......”
유세현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력을 읽을 수 있는 그는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단번에 파악한 상태였다.
‘현재까지 만났던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강하다.’
알그하브가 본래의 힘을 되찾았을 때의 감각.
하지만 순수한 힘은 그 이상이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눈앞의 케르트란만 해도 암울한데, 강한 건 놈뿐만이 아니다.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티탄족 한 명 한 명의 수준이 제르펠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수 만해도 무려 100명이 넘는데 말이다.
정예 중에 정예.
일생일대의 위기다.
“네놈들...우리가 이곳으로 빠져나오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냐?”
유세현이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틈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놈들 중 일부를 일격에 죽인 후 구울화 시켜 난전으로 상황을 몰고 가 틈을 만든 뒤 이곳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케르트란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네놈이 감히 내게 질문할 입장이 아닐 텐데?”
동시에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유세현을 향해 쏟아진다.
살짝 경직되는 육체.
“질문은 짐과 같은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니 짐이 묻겠다. 네놈들은 뭐하는 종족이냐. 엘프처럼 생겼지만 엘프는 아니구나. 뭔데 던전에서 생판 처음 보는 네놈들이 튀어나온 거지?”
두근두근-
유세현은 거칠게 펌프질을 하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놈은 빈틈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없었다.
아니, 일부러 드러내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시키기 위해서,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부숴버릴 생각으로.
완벽하다. 틈을 노릴 수가 없다.
아퀼라의 환각도 이정도 수준의 강자들을 전부 속일 수는 없을 터다.
“우리는...”
일단 대충이라도 지어내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소란스럽군. 드디어 나온 건가?”
저 편에서 또 다른 티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젠 뭘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유세현의 손이 포켓으로 향했다.
주섬주섬 걸려나오는 카드 한 장.
[기적과 절망의 포츈 카드]
너무 극단적이라 정말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이것밖에 없었다.
그가 찢으려는 순간, 이강호가 그를 말렸다.
“잠깐.”
“왜? 이제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
“아니, 잘 봐. 희망이 생겼어.”
“뭐?”
유세현의 시선이 이강호가 바라보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꽤나 익숙한 얼굴의 티탄이었다.
동시에 절대 그럴 것 같지 않던 케르트란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오셨습니까. 대장군님.”
“그래, 그보다 아이템은 회수했나?”
“아직 입니다. 지금 막 회수하려던 참입니다.”
“흐음...방금 전의 일격을 버틴 모양이군.”
대장군이라 불린 티탄이 일행을 바라봤다.
대장군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리는 반면, 유세현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서로가 누군지 둘 다 알아챈 것!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군. 타르탄.”
유세현이 손을 들어 아는체하자 타르탄은 지그시 혀를 찼고 케르트란은 순간적으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쥐고 있던 거대망치를 치켜세우는 케르트란.
“이놈! 어디서 감히 대장군님의 존함을!”
허나, 놈은 유세현을 공격하지 못했다.
“멈춰라.”
타르탄이 막은 것이다.
이에 케르트란은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어 타르탄을 쳐다봤다.
아니, 실제로 그는 믿을 수 없었다.
타르탄은 판도라인이 아니라 이 세계에만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도 모르는 타 종족을 알고 있다니?
또한 티탄족은 애초에 타종족에 우호적인 종족이 아니다.
언제 말을 놓은 정도로 친해진 것이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거대한 흐름을 타기 위해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접고 그들의 일부, 병사가 되는 것을 선택했었던 케르트란이 이내 완전히 무기를 거두자 타르탄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지?”
“볼일이 있어서 왔다. 그보다 대장군이라...알테라그가 널 용서한 모양이군.”
“...그렇다.”
“전쟁중이라고 들었는데 알테라그는 아직 잘 있나?”
알테라그가 거론되자, 케르트란은 더욱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타르탄과 알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최강의 왕, 알그하브와도 연고가 있다니?
게다가 스스럼없이, 그것도 반말투로 본명까지 거론했다.
본래라면 자신이 아닌 타르탄이 먼저 무기를 내려찍었을 상황인 것이다.
‘대체 저놈들은 정체가 뭐냐...’
이어지는 대화.
“잘 있으시다.”
“그렇군...그보다 이놈이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해 오던데, 네 병사는 피아식별도 하지 않고 무작정 공격하고 보는 거냐?”
“......”
타르탄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왕의 은인을 무작정 공격.
죽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죽었다면?
덮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덮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인족이 알그하브를 도와 왕위를 되찾은 일화를 이제 모르는 티탄족은 없으니까. 팔찌를 발견한 순간 병사들의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다.
카르트란을 째려본 타르탄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너희들이 이 장소에 있는지 몰랐다. 정식으로 사과하마.”
“받아주겠다.”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저 소인족이 정말 바로 그?”
“분명 종족명이 사람...이였지?”
“오오 봐봐! 정말 팔찌를 착용하고 있어!”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는 알테라그 세계의 티탄족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케르트란의 부하, 판도라 세계의 티탄족은 그저 어리둥절한 모습.
케르트란이 부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의심받지 않게 소문에 대해 자세히 알아오라는 뜻.
그 사이 타르탄과 유세현 일행의 대화는 본론으로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크로마스놈들이 고대병기를 깨우지 못하도록 필요한 아이템을 가로채고 있는 중이다. 너희들이 빠져 나온 외곡공간에 잠들어 있던 아이템도 그중 하나다. 아이템을 지니고 있는 자만이 이곳으로 빠져나
오게 되어있지. 이건 최고기밀 작전이었다.”
알베타스의 시체가 이곳에 없는 이유였다.
타르탄은 당당히 요구했다.
“그러니 왕께 대한 의리가 남아있다면 그곳에서 얻은 아이템을 양도해주었으면 좋겠다.”
유세현과 이강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실, 기억의 명옥을 양도해주는 일은 그리 싫은 일은 아니었다. 가지고 있으면 위협이 닥칠 가능성이 크니까.
“좋다.”
“오, 그럼...”
하지만 그냥 넘겨주기는 아까운 법.
“하지만 그냥 건네기에는 우리도 이걸 얻는데 죽을 뻔한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뭘 원하지?”
“말이 통해서 좋군. 그건...”
유세현이 주위를 살폈다. 보는 눈이 많다는 뜻이었다.
아니, 보는 눈은 상관없지만 케르트란은 피해야 된다.
인원들을 물리자, 유세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 *
유세현이 보답으로 제시한 것은 거신이 잠들어 있는 땅에 대한 정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비보를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건 던전의 보상이었고 전쟁통에 줄 리도 없었다.
타르탄은 거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전까진 우리가 보관하고 있도록 하지. 적에게만 넘어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
단호히 말하자 타르탄은 살짝 심기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대장군으로서 자질구레한 정보까지 보고 받은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은 정보 입수 난이도가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땅에 있는 게 확실한가?”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유세현이 지닌 아이템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기에 토를 달수도 없었다.
“후...알겠다. 대신 그때까진 우리와 합류해 있어라.”
“그러지.”
흔쾌히 승낙했다.
그들은 강했기에 일행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타르탄이 명령을 내렸다.
“복귀하겠다! 전열을 정비해라!”
이윽고 부대로 이동을 시작하는 대군.
케르트란이 타르탄의 옆에서 걷고 있는 유세현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 유세현은 한 주먹도 안 돼 보이는 벌레였다.
그래서 더욱 열이 받았다.
자신보다도 놈들이 더 가치 있게 대접받고 있었으니까.
그때 소문을 알아내기 위해 떠났던 부하가 케르트란의 곁으로 돌아왔다.
“케르트란님 그게...”
내용을 듣는 케르트란.
케르트란이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이 세계와 이어져 있던 전속 시나리오를 놈들이 클리어 한거로군.”
“예. 그 과정에서 알그하브님도 되살아난 것 같습니다.”
“크...어쩐지 역사가 비틀려 있더라니...”
알그하브.
역대 최강의 왕.
케르트란조차도 비보를 장착하고 있는 알그하브 앞에서는 애송이였다.
“놈들도 신물 조각을 노리고 있는 걸까요?”
“글쎄, 타르탄과 거래를 한 모양이지만 아직까지 모르는 일이지.”
“거래 말입니까?”
“그래, 거래.”
무슨 거래를 했을까?
“놈들 중 한 놈을 족쳐서 물어봅니까?”
“아서라. 지금 어설프게 놈들을 건드리는 건 미련한 짓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애써 공들여 쌓아놓은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다.”
“흠...그럼 어떻게...덩치가 있어서 미행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일단 두어라. 어차피 때가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다. 병력을 언제든지 운용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해두고 현재에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부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케르트란이 눈을 번뜩 빛냈다. 제 3번 던전을 연 것은 그였다.
비록, 천족 및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다 끼어들었지만 이 세계에서 만큼은 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 *
타르탄의 안내를 받아 알테라그를 알현하게 된 일행.
알테라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그대들과는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진짜로 그렇게 될 줄이야. 소식을 듣고 나를 돕기 위해 온건 아닐 테고. 어쩐 일로 이런 장소에까지 온 건가?”
유세현은 실소를 내뱉었다.
보는 눈이 정확하다.
“타르탄과 거래를 했다. 자세한 건 그에게 들어라.”
“흐음...”
잠시 내용을 듣는 알테라그.
차분히 턱을 짚은 그가 이내 입 열어 말했다.
“어쩌면 거신은 고대병기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고대병기? 근거는?”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외곡공간의 출구를 알아내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을 가할 정도로 말이지.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건 고대병기가 잠들어 있는 장소와 그 정체 정도다. 그런데 이 땅에 거
신이라는 것이 잠들어 있는 장소가 또 있다니...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다.”
이른바 역추리였다.
화신의 신전의 위치도 발견해내지 못한 마당에 100%라고는 할 수 없지만 충분히 일리는 있는 말.
허나, 이건 웬만해선 틀렸으면 하는 말이기도 했다.
병기가 잠들어 있는 곳은 아수라장이 될 테니까.
“하나만 묻지, 그대들은 그 거신이라는 걸 노리고 있는 건가? 솔직하게 답해도 된다. 병기가 거신이고, 그것을 노린다고 말하더라도 돕지는 못할망정 그대들을 해치거나 하진 않을 테니.”
유세현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아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먼저 아이템을 넘겨줄 수 있겠나? 그대가 타르탄과 한 약속은 내가 책임지고 지킬 것을 약속하지.”
“흐음...”
유세현은 알테라그의 성격을 떠올렸다.
우직하다. 고상하다. 정직하다.
유세현은 알테라그가 왜 타르탄을 용서한 것인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크로마스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그만큼 잘 알고 있는 자가 없을 테니까.
동족을 위해 찢어 죽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은 것일 터다.
“좋다. 그러도록 하지.”
< 케르트란(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