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부의 끝(2) >
대체 언제부터 괜찮아 진 것이지?
마력재생과 마족화, 그리고 여러 스킬을 운용할 수 있다면 이 상황을 순식간에 뒤엎는 것이 가능할 터기에 유세현은 의식을 집중해 몸 상태를 살폈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심원이 갑자기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전투에 정신이 팔려 아픔을 잊던 것도 아니었다.
천마가 몸을 사용하면서 자리 잡아준, 회복된 기혈들이 마력을 순환시키며 부담감을 덜어주고 있다.
뭔가 이전보다도 운용이 훨씬 잘되는 느낌.
천마의 검법을 일부나마 이해한 덕분에 그 영향이 그가 창시한 무공에까지 끼친 것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유세현은 나쁘지 않은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의 눈빛에 이채가 띈다.
‘이 정도라면...’
한 번.
딱 한 번 정도는 커다란 기술의 사용을 시도해 볼 법도하다.
유세현이 가로막은 적을 한 마리 더 베어 넘긴 순간이었다.
“태광씨!”
리체의 다급한 목소리.
우측이었다.
유세현이 시선만 살짝 돌리자, 확연하게 밀리고 있는 이태광이 보였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거의 한계에 달한 상태.
그도 그럴 것이 이태광은 리체를 포함한 인원들을 안전을 위해서 처음부터 다른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열심히 움직였다.
그리고 실로 많은 인원들을 베어 넘겼다.
스킬로 처리한 적을 제외하고도, 칼질에만 죽어나간 적이 벌써 세 자리수가 훨씬 넘으니 말은 다한 것이다.
거기서 비약을 섭취한 크로커다일족의 수장과 놈을 지키고 있는 호위대가 함께 달려드니 아무리 이태광이라고 한들 상대가 될 턱이 있겠는가.
빠악-
“큭!”
이제는 거의 둔기에 가까운 발길질 아닌 발길질에 얻어맞은 이태광의 몸이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곧바로 마무리 공격으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크로커다일족의 수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어딘가를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그 어딘가는...
쿵!
유세현의 바로 앞, 발을 디디고 있던 지면이 마치 파도가 요동치듯 거칠게 흔들렸다.
크로커다일족의 수장, 엘리게이터가 유세현을 응시했다.
“이 힘...저 놈을 처리하기 전에 우선 네놈의 목부터 잘라주마!”
엘리게이터가 손을 치켜세우자 뒤 따라온 5마리의 호위병들이 유세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세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건만.
‘지금 시도해볼까?’
그런 맘을 먹은 순간이었다.
스르륵-
바람과 함께 유세현 앞으로 한 인물이 연기처럼 쓱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위용 있게 뻗어있는 두 개의 뿔과 보랏빛의 머리칼.
전투에는 맞지 않을 법한, 관능미가 넘치다 못해 한없이 야하기까지 한 옷가지.
아퀼라 라즈베리가 손을 펼치자 호위병들의 움직임이 한 순간 멈췄다.
환각.
거기에 그치지 않고 쏜살같이 검을 휘둘러 적 한 마리의 수급을 취한 아퀼라가 자세를 유지하며 말했다.
“군주시어 여기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새삼 든든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가능하겠냐?”
“버티는 정도라면...”
“큭! 인간에게 붙은 미천한 반쪽 마족 주제에 감히 누굴 막는다고?”
엘리게이터가 잔뜩 분노해 달려들었다.
아퀼라는 이에 굉장히 침작하면서도 유연하게 대처했다.
검술을 이용해 막을 수 있는 것은 막고, 안 되는 것은 무리하지 않고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고유스킬을 활용해 커버를 했다.
예전 홍등점주에게서 환희공이라는 무공을 갓 전수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체술은 완전히 쥐약이었었는데.
‘정말 강해졌군.’
유세현의 실종이후 그 장난기 많던 김주희가 변했듯 아퀼라도 복수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
“믿는다.”
유세현은 덜도 더도 않고 딱 한마디만 남겼다.
타다닥-
곧바로 뒤돌아 자리를 벗어나는 유세현.
아퀼라와 마주하고 있던 호위병 한 마리의 어깨가 움찔 거렸다.
공포 같은 감정 때문이 아니다.
아퀼라는 서큐버스.
종족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를 현혹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생명체.
현재 유세현의 말을 들은 아퀼라는 지나가는 남자, 아니 수컷이라면 전부 반할 수밖에 없는 매혹을 내뿜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퀼라가 천천히 손을 치켜세웠다.
“후후후...와라...내 지금 기분이 좋으니 이 기쁨을 너희들에게도 특별히 선사해주마.”
헤롱헤롱하는 부하를 한 대 쥐어박은 엘리게이터가 잔뜩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으득 이를 갈았다.
“오만한 년...10초안에 끝내주마. 죽여라! 지금부터 현혹당하는 놈은 내손에 죽는다!”
“예!”
쉬이익-
그것을 시작으로 일대에는 다시 피의 폭풍이 몰아쳤다.
* * *
유세현을 노리는 건 엘리게이터 뿐만이 아니었다.
하피 퀸, 시라카.
아라크네족의 여왕, 아크르네.
오우거의 수장, 우베루.
그들은 귀찮은 암흑투기를 사용하는 유세현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하던 인원들을 뒤로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에 대응하는 인간측 최강자들.
“선배님!”
높디높은 파도가 저공비행하고 있는 시라카를 덮쳤다.
거기에 더해진 빙백신공의 절기.
회피에 성공했음에도 여파에 의해 신체 일부가 빙결되자 시라카의 고운 얼굴이 꿈틀거렸다.
트루크가 준 비약은 화염저항력을 특히 많이 증가시켜주지만 그 외에도 다른 속성저항력도 고루 높여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디 웬만한 마법으로는 그녀의 신체를 얼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금 전 고랭크의 마법이야 이해가 된다만...
그러고 보면 이건 애초에 마법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한편, 그림자에서 뛰쳐나온 레피아가 우베루의 등을 노렸다.
허나, 호위병들에 의해 저지.
그걸 또 뒤엎으려는 듯 또 하나의 절기가 곧바로 뒤를 잇는다.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 뢰격주(雷激珠).]
남궁시영이 발산한 무공으로, 강렬한 뢰기를 담은 구슬이 호위병 두 마리를 휩쓸고 우베루가 죽일 듯이 그녀를 노려봤다.
“이 빌어먹을 암컷이!”
쿵! 쿵! 쿵!
육중한 몸을 이끌고 순식간에 남궁시영에 돌진하는 우베루.
남궁시영은 차분히 대응했다.
검 끝에서 펼쳐지는 비기, 제왕검형(帝王劍形).
허나, 안타깝게도 우베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체력도 많이 소진되어 있었고, 우베루도 절대 예사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
유세현은 주위를 싹 둘러봤다.
무림맹의 맹주이자 개방의 방주, 강태령.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제.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경.
근위기사, 엘뷘 마젤.
이벨린 발디안.
모두 분전하고 있지만 밀리고 있다.
어느 누가 픽 죽어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때였다.
고오오오!
콰아아아아앙!
지금까지 발생한 그 어떤 폭음과는 한 차례 차원이 다른,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저편에서 청염의 불기둥이 치켜 올라왔다.
전장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의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쉬이익-
퍼져 나온 열기 또한 어찌나 강한지 유세현이 위치한 장소까지 후끈하게 뒤덮었다.
누가 사용한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기에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곧 6개의 날개가 완성될 것이기에.
알베타스 때처럼 증표가 나타나 내부로 인도할 것이기에.
허나.
10초.
20초가 흘렀음에도 반응이 없다.
유세현의 머릿속에 의아함이 스쳐지나갔다.
이강호가 어떤 인물인가?
무려 20년 동안이나 판도라를 헤쳐 온,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다.
드래곤을 포함해 아직 조우하지 못한 마족, 천족과도 상대해본 인물이다.
작전이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이강호가 일격을 날렸다는 것은 완벽히 틈을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실패했다고?
‘뭔가 있구나.’
사실 유세현도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었다.
이 외부세계에서 사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버프 아이템을, 그것도 대량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돼도 너무 안 됐으니까.
“후우우우우.”
차분히 숨을 내쉰 유세현이 왼쪽 가슴을 툭 쳤다.
이건 마심원에게 건네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버텨줘라.’
마력을 사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이지 완전한 건 아니었으니까.
솨아아-
온 몸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온다.
찌릿-
어둠이 몸을 뒤덮는 순간, 아주 잠시 욱씬 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전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자신의 의지를 받들어 버텨주는 느낌.
물론, 그런다고 해서 마력 재생 같은 능력을 사용하면 100% 망가질 것을 확신한다.
그러니 이 5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만 했다.
‘5분...300초.’
유세현이 번쩍 눈을 치켜뜨자, 모습을 확인한 트롤 한 마리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 * *
“무...무슨...”
연합군은 한 남자의 행보에 좀처럼 벌어진 턱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도 그럴 것이.
서걱-
“크으으윽.”
훙훙훙.
턱-
잘려나간 팔 하나가 지면을 뒹굴었다.
흘러나오는 푸른 피가 지면을 한가득 물들인다.
그 너머로는 막 팔을 잃은 희생자가 있었다.
도깨비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거대한 육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위용을 떨치던 오우거의 수장, 우베루였다.
“크으...어떻게...”
오만 인상이 된 얼굴.
그는 수장으로서 체면이 있는지 비명을 내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당황이라는 감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상태를 본 아크르네도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에 이전 보고 내용을 떠올린 시라카가 입술을 악물었다.
익히 듣긴 했지만 이 정도였다니.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파앗.
쏜살같이 움직여 그새 5명을 처리한 유세현이 도약했다.
“?!”
누구를 노리는 것인지는 안 봐도 너무도 뻔했기에 시라카는 한순간 분노에 가득 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상이라면 몰라도 공중에서.
그것도 여왕이라고 불리는 자신을 노리다니.
아무리 빨라졌다지만 오만하다.
얕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내가 머저리처럼 정면승부를 받아 줄 것 같았느냐!”
황급히 궤도를 틀어 경로에서 벗어난 그녀는 큰 기술을 준비했다.
어이가 없긴 했으나, 이건 분명 놈을 죽일 찬스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동작을 취하기도 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다.
루베르크를 역수로 고쳐 쥔 그가 창대를 날리듯 힘껏 투척한 것.
“아니?”
시라카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완벽하게 물든다.
무기는 곧 생명이다.
뺏기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투척은 강탈당할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특히나 이런 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더더욱.
‘무슨 이런 미친놈이...’
아무쪼록 생각할 틈은 없었다.
스킬이고 자시고 그녀는 황급히 몸을 선회했다.
허나.
루베르크가 아슬아슬하게나마 날개의 일부를 찢고 지나간다.
“크으으...”
확연하게 저하되는 기동력.
“검을 잡아라!”
시라카의 말에 근처에 있던 연합군과 생존자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 중 사람들 일부가 한탄을 토해냈다.
“옘병! 대체 회수는 어떻게 하려고 지금 상황에 무기를 던져?”
하지만 그런 투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검을 쥔 아라크네 한 마리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황급히 손을 떼었기 때문.
“크아아악! 이, 이건!”
“시라카님! 귀속! 귀속 아이템 입니다!”
어느새 유세현은 루베르크가 꽂혀 있는 장소에 착지해있었다.
촤자작-
이루어지는 학살.
이 전부가 마족화를 시전한지 30초도 안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큭! 이렇게 되면!”
아크르네가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유세현의 머리위로 거미줄을 흩뿌렸다.
이건 그녀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스킬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한 번 접착되면 정말 웬만해선 끊기지 않아 무인들도 껄끄러워 하는 그런 물질이었다.
물론, 맞았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푸슉-
“크으!”
순식간에 접근한 유세현의 칼질에 아크르네의 8개의 다리 중 두개가 잘려나갔다. 사실은 죽이고 싶었지만 우베루가 방해를 해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이만 몸을 돌렸다.
완전하게 처리해주진 못했지만, 이정도면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을 터.
유세현이 몸을 날렸다.
시라카를 포함한 수장들은 도무지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길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저놈이 가지 않았다면 이기긴 커녕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수장들이 종족을 한데 모은, 괴팍하지만 강력한 인물을 떠올리며 지그시 읊조렸다.
“트루크...저놈은 네가 잡아야 된다.”
< 외부의 끝(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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