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봉(1) >
쉬이익-
슈우우우욱!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수많은 연합군.
허나, 이런 행동을 취하는 자들은 그나마 나은 쪽에 속하는 편이었다.
정면에서 스킬을 받은 이들의 대부분은 갈기갈기 찢겨 제대로 된 형체도 남기지 못했으니까.
일자로 길게 뚫린 길이 시야에 비친다.
유세현은 피칠갑이 된 몸을 이끌고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나아갔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그들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길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기에.
마침내 적을 베어 넘긴 저편으로 나타나는 풀숲.
드디어 적의 포위를 돌파한 것이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크으으으...빌어먹을 인간 놈들...”
애써 정신을 차린 하피 한 마리가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뿌득 이를 갈았다.
처음 전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연합군의 수는 무려 17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제 남은 수는 많아봐야 4만 명 정도뿐.
정말 막심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책임을 져줘야 될 대표급과 부대표급, 장군급이 모두 죽었다.
그것도 고작 11명에게, 아니 정확히 따지면 4명에게!
이젠 뒤가 없다.
날아오른 하피가 마치 괴성을 지르듯 외쳤다.
“이대로 패배하고 돌아가 봤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다! 놈들을 절대 놓치면 안 돼! 싸워서 놈의 코인을 쟁취해야만 일을 만회할 수 있다!”
“......”
주위 위치해있던 몬스터들의 시선이 재차 유세현을 향했다.
하피의 말처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죽는 건 똑같기에 두려움이 일부 가셔진 표정.
유세현은 지금이라도 하피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목을 자르고 싶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오우거가 번쩍 치켜세우며 눈을 빛냈다.
“그래...놓치면 끝이다...놈들을 잡자!”
“추격해라아아아!”
말과 동시에 흡사 광신도처럼 미친 듯이 돌진해오는 이들.
그리고 그 순간, 유세현의 마력이 전부 소진되며 일대를 짓누르고 있던 힘이 모습을 감췄다.
‘젠장, 하필 지금...’
결국 일행은 얼마 나아가지 못해 뒤따라온 적과 혈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다.
“끓어오르는 피의 검!”
“칼날의 발톱!”
콰아아앙-
“으으윽.”
루베르크로 황급히 막았음에도 유세현의 육체가 상공에 붕 뜨더니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엄청난 충격.
자세가 도무지 다잡아지지 않는다.
송사리 같던 놈들이 지금에 와서는 알베타스보다도 강하게 느껴졌다.
실로 절체절명의 상황!
유세현은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이제 단 한 개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원진기...그래, 진원진기 뿐이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어떻게든 사용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
유세현은 마력을 끓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허나.
“커헉! 컥...”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각혈.
실패를 뜻하는, 더 최악의 결과를 알리는 신호였다.
“세현씨!”
“오빠!!”
힘겹게 다수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던 루시아와 유혜인의 시선이, 아니 일행 전체의 시선이 일제히 유세현을 향했다.
어느 샌가 접근한 5마리의 연합군이 유세현을 향해 무기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
“하하하하하! 드디어 힘이 다한 모양이구나! 죽어라아아아!”
무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유세현은 눈동자만 움직여 일행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빌었다.
정말 정말 아주 아주 힘들겠지만 그들만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기를.
후웅!
세찬 바람이 목 끝을 타고 흐른다.
죽음을 예상한 유세현의 머리위로 난데없이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의 주인은 트롤도, 오우거도, 하피도, 그 무엇도 아닌 사람, 그것도 꽤나 긴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유난히 돋보이는 순백의 창.
여성이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트드드득.
창에 닫기 무섭게 얼음결정에 갇혀 움직임을 멈추는 몬스터들!
여성의 얼굴을 확인한 유세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웅얼거림.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은...
“선배님!”
[김주희.]
바로 그녀였다.
외모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나 입고 있는 방어구로 보나, 들고 있는 무기로 보나 이전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
“허억...허억...김주희...”
유세현이 힘겹게 입을 열어 말하자 김주희는 곧장 몸을 돌려 적을 바라봤다.
“운디네. 선배님을 치료해줘.”
“네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생각이었어!”
김주희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던 운디네가 황급히 유세현에게 날아와 치료스킬을 연발했다.
그와 동시에 흐릿해진 유세현의 시야로부터 자취를 감추는 김주희.
순식간에 적에게 접근한 그녀의 창이 궤적을 가를 때마다 일행에게 붙어있던 연합군들은 힘도 써보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나갔다.
김주희의 얼굴을 확인한 리자드맨 한 마리가 경악을 터트렸다.
“크...저, 저년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최고등급의 위험분자라는 것을 알아챈 것!
“젠장! 하필이면 지금 저놈들이 왜...”
욕을 내뱉던 리자드맨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김주희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
후웅!
화르륵.
어마어마한 열기가 공기를 타고 숲을 가득 메운다.
푸른빛으로 물드는 세상.
연합군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크아아악.”
측면에서 숲을 통째로 태우며 날아온 거대한 원형의 불줄기는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불살랐다.
이어서 이번에는 김주희가 창을 앞으로 내리뻗었다.
창끝으로 모이는 순백의 빛.
쉬익-
콰아앙!
트드드득.
“으아아아!!”
숲도, 나무도 연합군도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빙지옥이 펼쳐져있었다.
서로 교차한 불과 얼음.
연합군들은 기화한 수중기를 맞으며 퇴각하지도 달려들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마무리는 무조건적으로 해야 되었으나, 지금 나서면 100%의 확률로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어차피 뒤는 없다. 그리고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야 말로 놈들의 노림수...내가 앞장을 서겠다! 가자!”
“나도 네 뒤를 따르겠다!”
“크으으...젠장! 젠자아아앙!”
희생을 감수하리라 마음을 먹은 소수의 연합군이 용맹하게 앞으로 나서자 나머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순식간에 코인을 흡수한 이강호가 김주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김주희가 손을 살짝 내리그었다.
치지직-
허공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빠져나오는 삼지창.
삼지창은 김주희의 손에 잡히기 무섭게 거대한 해일이 뿜어냈다.
“이까짓 거!!”
연합군은 스킬을 이용해 때려 패듯이 물살을 깨부쉈다.
허나, 곧바로 바로 달려들 수는 없었다.
그들이 추가적인 공격을 행해올시 또다시 어마어마한 피해가 날 것이기에.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전진한 연합군.
“크으으윽! 어딜 간 거야! 어딜!”
“추적스킬! 추적스킬을 사용해!”
인원들이 도망쳤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광분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허억!’
눈을 번쩍 뜬 유세현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당장이라도 몸이 산산조각 부서질 것 같은 느낌.
허나, 그 감각이 결코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 아픔이야 말로 자신이 겪은 상황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으윽...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아직도 계속 달리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많이 시간이 흐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유세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업고 있는 김주희를 바라봤다.
그 순간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얼굴을 훔쳐보고 있던 김주희가 당황했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아...깨셨어요 선배?”
“응.”
“그...몸은 좀 어떠세요?”
“음...버틸 만 해.”
유세현은 신경 쓰이지 않도록 최대한 괜찮은 쪽으로 돌려 답했다.
이에 시선을 돌린 김주희의 입이 꾹 닫혔다.
많이 어두워져 있는 안색.
지금까지 유세현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로서는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재회였다.
나누고 싶은 대화는 차고 넘칠 만큼 무척이나 많이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어떻게 지내 왔는지. 왜 그간 소식이 전혀 없었는지.
허나, 그녀는 그 어떤 것도 물을 수 없었다.
파악하는 것도 늦었다. 도착하는 것도 늦었다.
지금의 이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 발생한 상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마음을 짓누르는 미안함과 죄책감.
이에 유세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야, 김주희. 왜 그렇게 울상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여기서 죽었을 텐데.”
그는 김주희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었다는 것을 게릭과 레피아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꽁꽁 얼어붙기라도 한듯 절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나 뭐라나.
허나, 적어도 유세현이 보기에 김주희는 이전 같이 다닐 때와 뭣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김주희의 입이 달싹였다.
“선배...하지만...”
“김주희. 넌 최선을 다했어.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 그러니까 만약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표정 풀어.”
“......”
김주희는 얼른 고개를 휙 돌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지가 2년.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왜 자꾸...’
지금 유세현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당장에 펑펑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김주희와의 간단한 대화 이후 유세현은 내부 마력을 다스리는 것에만 힘썼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완전히 따돌린 것 같군. 여기서 휴식하자.”
이강호가 이윽고 휴식을 선언했다.
확 돌변하는 아퀼라의 모습.
그녀는 둘러메고 있던 인원 4명 중 3명을 땅에 그대로 내팽겨졌다.
“앗!”
“으헉...”
피해자는 이한별과 리체, 이용석으로 악감정이나 살의를 담아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유세현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것뿐이다.
물론.
“아퀼라...나도 굳이 이렇게 내려주지 않아도...”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주자인 유혜인 만큼은 아기 다루듯 정말 조심히 대했다.
이윽고 유세현의 앞에 다다가간 아퀼라가 나무에 등을 받히고 있는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예를 취했다.
“마왕님을 뵙습니다.”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녀가 없었다면 이강호나 김주희가 빨리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유세현은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허나.
“아닙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도마뱀에게서 마왕님의 옥체를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이전 드래곤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자신을 질책했다.
김주희, 이강호와 한시라도 빨리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유세현은 아차 싶었다.
충성부분에 있어서는 이전부터 옹고집이 무척 강했다는 게 떠오른 것.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나이다. 마왕께서 원하신다면 목숨으로 실책을 값...”
“아니, 괜찮아. 그러니 그만해.”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어. 그만해라. 명령이야.”
명령.
그 말이 있고나서야 아퀼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유세현의 곁으로 몰려드는 인원들.
유세현의 우선 자신을 도와준 루시아와 아린, 이용석을 바라봤다.
“제 무리한 생각을 따라주셔서, 그리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없었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
이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씁쓰름하게 바뀌었다.
이제 더는 보이지 않는 유세현의 왼팔.
인물들의 표정과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부위를 확인한 이강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유세현이 이번 무리한 전투로 인하여 왼팔을 잃었음을.
“오빠...미안해...”
웅얼거리는 유혜인은 아예 울상이 되어있었다.
유세현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었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동생이 살아남았다는 결과에 만족한다.
유세현은 그 후 왼팔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들을, 친우를 드디어 만나는데 성공했는데 울적한 분위기는 극구 사양이었기 때문.
유세현의 시선이 이번에는 이강호를 향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지냈냐. 강호야.”
< 상봉(1)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