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멸(2) >
구릉지대를 하나 넘으면 나오는 거대한 강, 그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수로.
그곳에 도달하는 것이 생존자들의 최종목표였다.
복잡해서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 미로와 달리 최근 복귀한 팀이 이용했던 바가 있었기 때문.
또다시 죄여드는 포위망.
-캬아아아.
사람들은 항전하며 계속 달려 나갔다.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틈을 허용하는 순간 그곳에서 생은 끝날 것이기에.
눈동자만 움직여 주위를 살핀 유세현.
그가 살포시 혀를 찼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상황을 나아지게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다르기 전에 전부 쓰러지게 되리라.
아니, 살아남더라도 레피아나 자신 정도뿐이겠지.
사실 지금 당장 상황을 더 좋게 만들 방도는 손에 쥐고 있었다.
다만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이 능력에는 시간제한이 존재하니까.
쉬이익-
쿵!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생존자들의 앞으로 무엇인가가 뚝 떨어졌다.
먼지 때문에 이번에도 흐릿한 형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굳이 모습을 확인하지 않아도 생존자들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흙먼지 사이에서 뻗어 나오는 칼날.
슈우욱!
푸부북.
근처에 위치해 있던 병사 4명의 몸을 순식간에 도륙하며 모습을 드러낸 헤드리아의 얼굴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담겨져 있었다.
알라함은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어떻게 대응할 수가 없다.
게다가 헤드리아라는 놈이 곁에 있으면 특이개체들이 뛰어난 단결력을 보이며 몇 배의 시너지를 냈다.
안 그래도 뛰어난 스텟과 특수능력 때문에 버거운 놈들인데.
그때.
살짝 후미에서 팀과 함께하고 있던 유세현이 앞으로 나섰다.
모든 일의 근원.
알라함은 묵묵히 지켜봤다.
어차피 열을 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없을 뿐더러, 저놈이 저런 짓을 한다는 뜻은...
유세현의 몸 전신에서 어둠이 나풀거리기 시작하자 헤드리아를 포함한 생존자들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
아까전의 그 스킬로 마력을 전부 소진했을 터인데?
벌써 회복했다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이건 무슨 스킬인 것인가!
마력 재생으로 인해 주위로 퍼지는 어둠의 마력.
흉흉한 기운은 헤드리아 뿐만 아니라 생존자들에게 또한 소름끼치는 기분을 선사했다.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응시하고 있는 느낌.
그 순간.
파앗.
어느 샌가 헤드리아에게 접근한 유세현의 검이 벼락처럼 내리 꽂혔다. 살짝 놀란 헤드리아는 황급히 양팔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힘과 속도가 이전보다 확연히 올라갔다.
게다가 저 검신의 예기.
놈의 힘이 부족 했을 때도 상당히 성가셨다.
그런데 힘이 더해지니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쓰으으으-
귓가를 울리는 섬뜩한 음색.
갈라진다. 아니, 잘려나간다.
칼날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검신이!
날붙이에 있어서만큼은 뛰어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
표정이 와락 구겨진 헤드리아의 갈라진 칼날 속으로부터 새로운 검이 피어올랐다.
기존의 것보다 얇지만, 더 강한 강도와 예기를 지니고 있는 검이었다.
[고작 그 따위 힘으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헤드리아가 팔을 힘차게 펼쳤다.
콰아앙!
강렬히 뻗어나가는 파동!
유세현의 몸이 일순간 상공으로 튕겨 나갔다.
마족화를 사용했다지만 헤드리아의 스텟은 그만큼 월등히 높았다. 아니, 상대적으로 스텟이 낮았던 유세현이 이제야 레피아의 살짝 아래에 달하는 스텟을 지니게 된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피아가 잽싸게 가세하려 했지만.
[어.딜.]
적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제공격을 감행하는 특이개체.
그중에서도 레피아에게는 총 10마리나 되는 놈들이 달라붙었다.
퓨퓻!
타다다닷!
하나하나가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에 레피아는 미친 듯이 계속 움직여야 했다.
이어지는 검무.
촤자자작.
4마리를 순식간에 베어 넘긴 그녀였지만, 유세현의 싸움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상황이 안 좋은 건 여전했으니까.
그때였다.
솨아아아!
어둠이 스쳐지나갔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키에엑.
바스라지는 알비론의 몸.
부패의 속도도 차원이 달라졌다.
꿈틀대며 일어나기 시작하는 구울들.
허나,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못했다. 헤드리아가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쉬지 않고 견제를 가해온 탓!
챙챙챙챙!!
순식간에 펼쳐지는 수십 합의 공방.
검을 맞댈 때마다 파공성이 일었다.
그야말로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치지직-
흑뢰검으로 아주 찰나의 틈을 만든 유세현이 다가오고 있는 레피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앞을 계속 뚫으라는 의미였다.
그녀가 빠지면 돌파하는 속도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
현재 그녀는 페이스메이커였고, 길잡이였다.
헤드리아는 자신이 어떻게든 처리한다.
힘의 차가 아직 좀 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자신에게는 틈을 파고들 수 있는 라 아닐더와 천마가 물려준 무공이 있었으니까.
놈이 빈틈을 보이는 그 순간이 놈의 제삿날이었다.
유세현은 대치하는 그대로 눈만 살짝 돌려 동향을 살폈다.
자신이 나설 수만 있었어도 길을 순식간에 뚫어버렸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했던 것처럼 상황을 더 좋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이대로만 쭉 간다면...
유세현은 이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못했다.
이 상황에서 다른 판단을 내리고 딴 마음을 먹는 인원이 나오리라는 것을.
* * *
“젠장...”
알라함은 입술을 곱씹었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전 유세현이 했던 말이 계속 되뇌고 있었다.
지금 저 괴물과도 똑같은 수준을 지니고 있는 놈이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그 말.
헤드리아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드리아가 나타난 이상 놈의 등장은 거의 확정적.
과연 놈이 다다르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계획대로 될까?
불안, 초조, 두려움.
-캬아아.
달려든 알비론을 베어버린 알라함의 눈이 다수의 특이개체와 격전을 버리고 있는 레피아를 향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세현과 레피아가 위치해 있는 장소에만 알베타스의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다는 것을.
‘그래 맞아...그러고 보니 저 괴물들은...’
지금까지 대놓고 유세현을 노려왔다.
말려든 것 때문에 스스로도 분노하지 않았던가.
알라함은 일단 시험 삼아 일부 병력을 후방으로 물렸다. 역시나 기세가 앞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능할까.’
알라함은 시험해보기로 결정했다.
알비론을 막아주고 있는 구울을 흘깃 살핀 알라함이 부관에게 명령했다.
수군거리기 무섭게 화등잔만하게 변하는 부관의 눈.
“지, 진심이십니까?”
“어 바로 시작해라. 내가 볼 때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으니까.”
“......”
알라함의 말에도 부관은 영 찜찜한 표정을 가시지 못했다.
허나, 까라면 까야 되는 것이 군대.
“...장군님을 믿겠습니다.”
“그래, 가라! 기회는 구울이 되살아난 지금 밖에 없다.”
그 말에 부관이 검을 치켜세웠다.
“1부대는 나를 따르라!”
경로를 우측으로 살짝 꺾는 부관과 50명의 병사.
병사들은 뒤를 따르면서도 의아해했다.
레피아 일행이 뚫고 있는 장소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
“젠장...왜 방향을 이쪽으로...”
이해가 안 되면서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적을 죽여 나갔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뭔가 엉성하다는 것을.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다. 딴 방향을 보고 있다.
버림 수 혹은 미끼가 될 뻔 한 인원들은 신나게 숲을 가로질렀다.
알라함은 옳거니 싶었다.
역시 갈라지는 것이 답이었다.
알라함은 일부러 길드의 팀장들에게 통보하지 않았다.
행여나 놈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게 될까봐.
순식간에 방향을 꺾어 자취를 감추는 알라함과 300명의 제국군.
팀장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처음계획과 다르지 않은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저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게다가 저건 미끼 역할 밖에 되지 않을...
거기까지 생각한 팀장들의 머리가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아...”
깨달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군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
지금 자신들까지 모조리 이탈하면 이곳에는 고작 30명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정리하고 뒤따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러니...
“크으! 뚫어라 뚫어! 마력을 쥐어짜서 전부 퍼부어!”
“으아아아!!”
제국군이 사라진 방향을 흘긴 유세현의 눈가가 씰룩였다.
알라함.
제국군의 지휘관.
아주 영악하고 대단하기 짝이 놈이다.
그래, 벗어나려면 확실히 지금 벗어나는 게 맡긴 하지.
그리고 그걸 알아채다니.
기본적으로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유세현이다.
설마 이런 결단을 내릴 줄은 몰랐지만, 그들이 도망치던 말던 사실 상관없었다.
부족한건 채우면 되는 것이니까.
그의 손짓에 따라 다시 일어나는 시체들.
[네 멋대로 하게 두진 않는다!]
헤드리아 또다시 잽싸게 방해를 해왔지만, 유세현은 이미 꽤나 많은 시체를 부활시킨 후였다.
활개 치는 구울.
그러나 그런 구울들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금씩 죽어나갔다.
구울들은 생존자들을 일체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도와줄 수는 있지만 스스로 인지하여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것
지금까지는 제국군과 각 팀이 상호보완 작용을 하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불가능.
치직-
알비론에게 허벅지를 물어뜯긴 캐시가 실소를 내뱉었다.
“여기까진가...”
아주 잠시 꿈을 꿨다.
성물이란 것을 전부 모아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는 꿈을.
동료와 연인의 복수를 해내는 꿈을.
그녀의 모든 마력을 끓어 모아 스킬을 발동했다.
굉장히 작으면서도 초라한 불꽃이 한순간 번쩍였다.
* * *
계속 이어지고 있던 공방.
슈욱!
헤드리아의 뒤로 돌아간 라 아닐더가 목을 노렸다. 순식간에 등에서 돋아난 4개의 칼날이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치지지직.
입자검을 완벽히 당해낼 수는 없었다. 헤드리아는 경악했다.
자신의 검을 부수는 병장기가 두 개나 되다니.
게다가 저 기분 나쁜 검을 감싸고 있는 흑빛의 뇌전.
이것도 보통이 아니다.
3년 전 놈과 붙었을 때보다도 스킬의 위력이 강해졌다.
유세현이 손을 치켜세웠다.
[천마등공(天魔騰空)]
붕 떠오르며 일순간 제압당하는 육신.
황급히 사슬검을 지면에 박아 자유를 되찾은 그녀가 분에 차 소리쳤다.
[머리,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찢어 발겨주마!!]
유세현을 향해 비산하는 무수한 칼날.
모든 것을 다져버리는 헤드리아의 전용의 특수스킬.
[폭풍의 칼날]
바람조차 찢어버릴 것 같은 칼날의 예리함은 마족화로 내구력 스텟이 증가한 유세현조차도 버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대로 뒤집어쓰게 된다면 루크루프의 전쟁갑주가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헤드리아의 말처럼 전부 토막토막 잘려나가리라.
평범한 생존자들에게 대 위기.
허나, 유세현은 곧바로 몸을 날리지 않았다.
이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기회였으니까.
이 상황이라면 놈도 피하지 않으리라. 아니 못하리라.
스윽-
유세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횡으로 길게 늘어져 날아가는 선.
헤드리아는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
동그랗게 변하는 헤드리아의 눈동자.
찰나의 순간이지만 똑똑히 보였다.
자신이 날린 칼날이 잘려나가는 것이.
그녀는 황급히 몸을 숙였지만 0.1초라도 반응이 늦으면 회피 불가능한 스킬이 바로 천마광룡참(天魔狂龍斬)이었다.
쉬익-
채 1cm도 움직이지 못해 헤드리아의 가슴을 정확히 뚫고 지나가는 선.
제일먼저 헤드리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깔끔히 잘려 있는 팔의 단면이었다.
[...무슨...]
동시에 미끄러져 내리는 세계.
털썩.
헤드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일격.
화사하지도, 휘황찬란하지도 않았다.
헌데 위력은 여타 종족이 보여주었던 그 어떤 스킬보다도 강했다.
어떻게 이런 기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군체도 믿기지 않는지 어떠한 명령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유세현이 마무리를 가하기 위해 움직인 순간이었다.
치칫! 치치칫!
살갗을 찢어발기는 소용돌이가 그의 발밑에서 솟아올랐다.
< 전멸(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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