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38화 (238/612)

< 인형(3) >

그 말에 유세현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리버티의 산하 정보길드.

플로라와 4명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뚫어져라 쳐다본 유세현의 머릿속에 폭풍이 몰아쳤다.

플로라가 그러했듯 그 또한 사실 이들의 얼굴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났을 뿐.

헌데, 이 순간 완벽하게 떠올렸다.

“흑접림의 검은꽃들이군.”

“...?!”

깜짝 놀라는 플로라.

가끔 고객을 직접 접대했던 레피아는 그렇다 쳐도 플로라는 의뢰인에게 얼굴을 밝힌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유일하게 얼굴이 까발려졌던 경우는 이강호의 팀, 리버티의 습격에 실패하고 역으로 제압당했을 때.

그 이후로는 리버티의 산하로 들어갔기에 흑접림이라는 집단은 사실상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대륙이 붕괴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억하는 이들은 동료인 리버티의 팀원 정도뿐인데.

“너...대체 어떻게 우리의...”

심각한 표정으로 플로라가 질문하려는 순간.

“언니! 언니!”

옆에 있던 동생, 릴리아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어깨를 마구 쳤다.

무척 당황한 표정.

“이 남자 유세현이야! 그 유세현라고!”

“...뭐? 유세현이 대체 누군데...”

순간적으로 말꼬리를 흘린 플로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래. 과거, 육체를 짓누르는 힘을 사용하는 생존자가 있었다.

이강호가 그렇게 찾으려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실패한 인물.

“당신...살아있었던 거였어...요?”

게릭과 같은 반응에 유세현은 살짝 실소를 내뱉었다.

“예.”

“서쪽에 떨어지셨던 건가요? 아니, 그쪽도 뒤져 봤었는데...”

“설명하자면 깁니다. 일단은 보류하고 현재의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만...”

유세현의 말에 플로라가 아파트 단지 내의 창문 틈으로 지상을 내려다 봤다.

행여나 알베타스의 전투원들이 몰려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인데.

수많은 케르가나 중 한 마리를, 그것도 정보를 받기 전에 처치한 것이라 그녀의 예상처럼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알베타스라는 종족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실 테니 상황만 간단히 설명할게요.”

“예.”

그 후 그녀는 현 상황에 대해 정말 간결하게 요약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베타스의 습격. 감염된 인간들.

그렇게 5분정도의 시간이 흘러가고.

팀원들이 하나 둘 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할 무렵,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들이...’

알베타스.

이전 한 번 겪어본 것으로 인해 놈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영리한 종족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허나, 감염충을 족쇄로 사용할 생각까지 갖다니.

이는 발상의 전환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심리상태도 잘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때 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긴 했었지.’

더더욱 진화했다는 뜻.

플로라가 몸을 홱 돌렸다.

“인원들도 깨어났으니 여기서는 이 정도까지만 하죠. 계속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도록 해요.”

“아직 빌딩 내에 제 팀원이 남아있습니다만...”

“...그들은 못 빼내요. 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알비론들이 군집되어있는지 모르시죠? 당신의 실력이라면 그들을 죽이고 탈출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그럴 경우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알비론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리고 행여나 알비론들을 뚫는다 하더라도 혼종들이 막아설 거예요.”

“혼종?”

유세현이 반문했다. 혼종은 그 당시 듣지 못했던 정보였기 때문.

이에 플로라와 검은꽃들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양팔을 쓸어내렸다.

“예, 혼종. 인간과 알베타스가 합쳐져서 태어난 합성생물이에요. 인간과 알베타스의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죠...세현씨는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상상이 가세요?”

지금까지 들은 바로,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유추가 가능했다.

“잡혀간 인간들...”

“예, 맞아요.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잡혀간 사람들 중 여성만 이용하고 있죠.”

“......”

“여자는 만약 포획 당하게 되면...그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생지옥이에요.”

강제 수태.

죽을 때까지 괴물의 새끼를 낳아야 된다.

창백해지는 아린의 안색.

막 깨어난 팀원들 또한 뭐가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인지한 상태였다.

“그들의 스텟 평균치는 어떻게 됩니까.”

막대한 물량을 가진 놈들의 스텟은 B랭크 60% 이상.

게다가 어느 개체는 B랭크 최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만 보자면 확실히 그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

아니, 무척 옳다.

보통의 힘으로는 이것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허나,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탈출 방법이 떡하니 있는데.

다 같이 감염된 척 빠져나오면 되지 않겠는가.

허나, 이야기를 들은 플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들이 오늘 도시를 거니는 것을 봤어요. 그건 이미 늦었다는 뜻이에요. 밤은 더 이상 오지 않아요. 내일이면 놈들이 알베타스에게 인도할거에요. 그러니 안전하게 빠져나갈 기회는 지금 밖에 없어요.”

“......”

이에 유세현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저는 빌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 지금까지 제가 한 설명을 이해하지 못 하신 거예요? 가면 죽는다고요!”

“다른 방법으로도 탈출 할 수 있습니다.”

“아뇨, 절대 못해요.”

“...그 건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플로라씨께서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로서는 굉장히 억지스러운 말.

인상을 살짝 구긴 플로라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신...굉장히 감정적으로 변했군요. 이전에는 무척 냉정했던 것 같았는데...”

“......”

주위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정적.

침묵을 깬 건 플로라였다.

“후...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생각해보면 당신들은 항상 그렇게 행동해왔으니까...하지만 명심 하세요. 우리는 조금도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은신처 같은 기밀 정보도 알려줄 수 없어요.”

유세현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많은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토대로 기억에 있는 지형정보가 맞는지 틀린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질문이 끝나자.

“고작 이런 정보로 괜찮겠어요?”

“예.”

어이없다는 눈초리.

그러나 그런 눈빛과는 반대로 그녀는 포켓에서 요상하게 생긴 병 두 개를 꺼내 유세현에게 건넸다.

“최상급 해독약이에요. 전부 마시는 것으로 100% 감염된 것도 되돌릴 수 있고, 진행률 50% 이하까지는 한 모금만 마셔도 감염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제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이정도 뿐이네요. 이젠 가봐야겠

어요.”

플로라는 이내 몸을 돌렸다. 계단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녀가 내려가기 전 지긋이 말했다.

“...만약 살아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면 그때 강호씨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타다닥.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는 검은꽃들.

아파트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지금까지 지켜보던 팀원이 질문공세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검은꽃들의 보고를 받은 레피아가 나무줄기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그게 유세현의 팀이었다고? 그 남자 살아 있었어?”

“응, 언니. 서쪽 대륙에 떨어졌었나봐. 그쪽에서 이동해왔다고 하던데?”

“...허...”

레피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툭 내뱉는 말.

“여전히 강하디?”

“응...동생이랑 함께 덤볐는데 한 순간에 당했어. 하지만 강호씨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일단 지원 못해준다고 말해 놓긴 했는데...어떻게 할 거야?”

레피아는 플로라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적색의 땅, 무너진 도시, 망자의 땅, 윈트산맥, 녹빛의 호수.

동쪽 대륙에서도 서쪽에 위치하는 이 5개의 지역에서 현재 활동하는 생존자들은 이제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활동하고 있는 팀은 이제 기껏해야 20개 정도.

전부 잡히거나, 알베타스를 피해 이동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그들이 이곳에 계속 있는 이유는 어떤 존재를 추적해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여성을 강제적으로 수태 시키는 촉수생물, 갈락크를 생산하는 모체.

통칭, 갈락크락스.

현재까지 갈락크락스는 한 마리뿐이었기에 만약 죽인다면 혼종이 탄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수명이 짧은 칼락크를 낳기 위해, 놈이 군락지를 계속 무작위로 이동해 다니는 턱에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

그녀는 지금까지 여러 번의 작전을 펼쳐왔다.

군락지를 파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모체와 조우한 것은 단 세 번뿐.

그마저도 적의 화력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다.

희생자가 계속 발생해온 턱에 이제는 그녀도 이 지역에서 슬슬 철수해야 되는 상황.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도울 힘 따위는 없는 것이다.

“언니! 언니! 어떻게 할 거냐니까? 진짜로 보고만 있을 거야? 그가 그렇게 찾던 유세현인데?”

“......”

레피아의 머릿속에 이강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세현은 최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 말을 할 당시, 이강호는 그 답지 않게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이어 이제는 친동생처럼 아끼는 유혜인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레피아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스트레스에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에이 썅! 얌전히 좀 따라올 것이지! 왜 안 온데? 빌딩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대?”

“...언니, 아마 지금 말을 얼음마녀가 들었다면 창대가 날라 왔을 거야...”

“......”

꼭지가 돈 김주희를 떠올린 레피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앞으로 영원히 듣는 일 없을 테니 됐어...아무튼 플로라. 다른 팀에게 전갈을 보내. 군락지 바로 칠거니까 모이라고.”

“...군락지를? 과연 바로 올까?”

“오게 만들어야지. 모체 찾은 것 같다고 해.”

“...언니 그건 거짓말...”

“그리고 사실 모체 찾았단 말 안 해도 올 거야. 그들도 지쳤으니까.”

적진 생활은 힘들다. 그들은 모여서 한두 탕만 더 뛰고 딱 빠질 생각이었다.

이전처럼 공만 잔뜩 들이고, 허공에 삽질할 바에는 유세현이라도 살리는 편이 났지 않는가.

그는 이강호가 인정한 인물이니 말이다.

“플로라 넌 유세현의 팀의 뒤를 밟다가 그놈이 전투를 일으키거든 전서구를 날려. 그럼 우리가 그때 돌격 할 테니까.”

“으음...알았어.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꽤 괜찮은 방법인데? 시선 돌리는 거잖아.”

“그렇지. 아무튼 알았지?”

“알았어. 언니!”

플로라가 할 일을 하러 가자 레피아는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댔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그녀의 고민과 달리 새벽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 * *

유세현의 팀원이 빌딩내부로 돌아오는 것은 쉬웠다.

나갈 때와 똑같이 연기하면 된 것이었으니까.

그는 아침이 되기 무섭게 해독약을 나눠주었다.

내용이 적힌 쪽지를 들고 하나 둘 화장실로 향하는 이들.

“으어어...”

화장실에 갔다 온 카텐은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감염이 늦어, 자리를 잡지 못한 감염충은 귀를 통해 빠져 나오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쇼크로 작용한 모양.

유세현은 언제 탈출해야 될지 타이밍을 생각했다.

역시 지금보다는 이송 중이 훨씬 나으리라.

“흠흠...흠흠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했음에도 팀원의 행동은 뭔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감시자 레반코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냥 넘겼다.

오늘은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처리하는 날이었으니까.

일이 깔끔히 해결되면 찜찜함도 사라지겠지.

“자, 오늘은 간단히 식량을 구하러 가도록 하지. 다시 말하지만 우리들이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레반코프의 병사들이 유세현의 팀원을 둘러쌌다.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지 들뜬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시작된 식량 찾기.

수색은 도시가 아닌 4시간쯤 걸어가면 나오는 서쪽에 위치한 윈트산맥 초입부분에서 이루어졌다.

< 인형(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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