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교(1) >
한순간에 사라진 기척!
“무어냐 이건. 갑자기 어디로...”
빙제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고, 마력의 흐름을 살핀 유세현 또한 살짝 인상을 구겼다.
이미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다.
마법이 저장되어있는 스크롤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전 습격과 이강호의 설명으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마법을 스크롤에 담는 건 엄청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는 필히 이전 천마와 자웅을 겨뤘다던 세레나라는 여자가 만들어 준 것이리라.
‘도대체 뭐하는 여자지?’
이강호가 말한 바가 있었다.
대마법사가 아린이 이 세계에 없는 이상, 아르카드 제국에서 이벨린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다고. 그리고 그 뛰어난 아린조차도 마법을 담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그런데 인비지빌리티 마법에 이어 순간이동까지 스크롤에 담다니.
여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일단은 합류가 우선이다.’
흐름을 읽어보니 당운룡과 강태월은 중간에 도주한 덕에 무사한 것 같았다. 이강호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
그렇다면 나은 것은 아퀼라와 남궁시영뿐인데.
‘...?!’
유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퀼라는 근처에 잘 있었다. 그런데 남궁시영은...
유세현이 이강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화르르륵.
열기로 녹아내린 암석.
이강호의 앞에는 손에는 백령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패배한 것이 차마 믿기지 않는 표정.
“어, 어떻게 우리가...”
3대1의 전투.
사무월처럼 일격에 당하지 않는다면, 조심만 한다면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던 전투였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
이강호가 창을 치켜세우자, 백령이 깜짝 놀라 말을 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당신의 충복이 되겠습니다.”
“......”
마교가 무수히 많은 인원으로 되어있는 만큼,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없는 타입이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실력이 제법 되기에 당장 사용한다면 제법 쓸 만한 패가 될 수도 있다.
허나, 이강호가 추후 후환이 될 사람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한 번 주인을 갈아치운 자는 상황이 바뀌기 무섭게 두 번 갈아치울 가능성이 무척 높으니까.
그가 창을 내지른 순간이었다.
“이강호! 잠깐 멈춰봐!”
“...?”
백령의 미간.
그 바로 앞에서 창이 아슬아슬하게 멈춰 선다.
얇게 찢겨 나간 피부에서 피가 몇 방울 흘러나와 콧등을 적셨다.
“후우...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백령의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장되어 있었다.
이강호가 유세현을 바라봤다.
“왜, 멈추라고 한 거야?”
“그 전에 해줄 말이 있어.”
“뭔데?”
“남궁시영이 납치됐다.”
“......”
이강호의 입이 꾹 닫쳤다. 재수 없게 다른 놈에게 발각당한 것인가.
“아직은 살아있는 것 같아. 하지만 이대로 놔둔다면...”
필히 죽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유세현이 천천히 나가오자 백령의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동시에 턱 막혀오는 숨.
마냥 멀리서 바라볼 때랑, 수적 우위에 서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마치 장사월이 앞에 있는 듯한 느낌.
유세현이 무릎을 굽혀 백령과 눈높이를 맞췄다. 백령은 두려웠지만 이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느꼈기 때문!
“여자를 왜 살려서 데려가려는 거지? 뭘 하려고?”
“저, 전부 말하면 살려주시는 건가요? 살려만 주신다면...”
“...좋아. 약속하지. 대신, 어설픈 정보거나 거짓일 경우에는...”
유세현의 육신에서 투기가 뻗어 나왔다.
얼마 회복되지 않은 마력이라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지만, 마력이 다 떨어지고 심신이 제압된 백령으로서는 버티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백령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말해봐라.”
“그건...”
머리를 굴리는 것도 상대가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줘야 되는 일이다.
그러나 죽을 뻔 한 백령은 느끼고 있었다. 이자들에게는 얄짤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되던 안되던 그들의 성품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그중에서도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면 확률이 대폭 올라가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흠...”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 그러나 유세현은 의심부터 했다.
목숨을 잡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이 진실을 말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멍청이나 하는 생각이기에.
그때 김주희가 말을 덧붙였다.
“아, 그래서 저한테...”
“뭔데?”
“아, 저한테 처녀냐고 물어본 여자가 있어서요.”
“호오...그래?”
“예.”
김주희의 본의 아닌 변호에 백령의 안색이 살짝 밝아졌다. 유세현이 연이어 질문했다.
“그 의식이란 걸 준비 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짧으면 3일 길어봐야 7일 정도입니다.”
이는 재정비를 할 시간이 없다는 뜻.
유세현의 시선이 이강호를 향했다.
씁쓸함을 머금고 있는 표정.
“백령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마교에도 비밀통로가 있...”
“그만, 거기까지.”
이강호가 대번에 말을 잘랐다.
“세현아,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이해했어. 하지만 나 때문에 무작정 침투할 생각인거라면...”
이에 유세현이 피식 웃었다.
“하하, 짜샤. 말은 일단 끝까지 좀 들어봐.”
“...무슨 계획이라도 생각 난거냐?”
“물론.”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변하는 유세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것을 계획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백령. 대답은?”
“마존이나 부마존의 직속 대주들이 이용하는 통로가 있긴 있습니다.”
“너는 그걸 알고 있고?”
“예. 그렇습니다.”
백령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하기야 이 여자에게 있어서는 교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가는 게 이득일 테니 몰라도 안다고 일단 꾸며내리라.
“좋아. 그럼 바로 추격을 시작하자.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말 해줄 테니까.”
순식간에 방향을 정한 유세현이 몸을 돌리자 빙제가 혀를 찼다.
“그 소굴에 진짜로 들어가겠다는 게냐? 죽음을 면치 못할게다 이놈!”
“계획이 있습니다.”
“먼저 들어보자꾸나.”
“이런 건 시간이 생명입니다. 여기서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에이이! 나는 모른다!”
“김주희를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당운룡씨와 강태월씨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유세현이 인사를 하자, 당운룡과 강태월이 머쓱한 표정이 되어 볼을 긁적였다.
“끝까지 함께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목숨은 무척 중요하다.
그렇기에 의리 없이 빠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나무랄 수 없다.
“백령, 앞장서라. 허튼짓하면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백령이 앞으로 달려가자 유세현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김주희가 몸을 돌렸다.
“나중에 봬요. 할아버지.”
“...가면 못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계획이 있다잖아요.”
“에이이~! 계획은 무슨! 아닌 척 하지만 딱 봐도 남궁세가의 여식에 미쳐서...”
“후훗, 선배님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만약 할아버지께서는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소중한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해있다고 하더라도 두고 보기만 하고 계실 건가요? 아니시잖아요.”
“......”
빙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김주희도 유세현을 뒤따랐다.
관자놀이로 향하는 빙제의 엄지와 중지.
“돌아가시죠.”
당운룡이 말하자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빙제가 중얼거렸다.
“에이이! 수지타산이 안 맞아 수지타산이! 너희들 끼리나 돌아가거라!”
빙제의 신형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슈슈슉.
매섭게 질주하며 이어지던 유세현의 이야기는 칼의 협곡을 지났을 쯤에 끝이 났다.
어느새 뒤따라 붙어 내용을 듣고 있던 빙제가 혀를 찼다.
“이거 정상인 줄 알았더니 제일가는 미친놈이었군. 뭬라고? 예끼 이놈아!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마교에 입교할 것입니다. 제가 시선을 끄는 사이 여러분들이 남궁시영을 구출하시면 됩니다.”
“허허허.”
허탈함이 반쯤 섞인 실소가 빙제의 입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유세현이 계획한 것은 엉뚱하지만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마교는 힘의 순리를 따르는 곳.
입교만 한다면 그 힘에 의해 순위가 정해지고 직책을 받을 수 있다.
즉, 최고로 강하다면 교주가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유세현은 남궁시영을 구하기 위해, 마교의 교주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집어 삼키려던 심정일 수도 있다.
이놈은 누가 뭐래도 천마의 무공을 계승했으니까.
‘그래서 자격도 충분하지.’
그들은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수 일.
“유세현. 대놓고 우르르 달려들진 못하겠지만. 암살은 조심해라.”
“물론. 그보다 꼭 구출해내라.”
“알았어...고맙다.”
“그래, 나중에 보자.”
유세현은 일행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흐읍...”
다분히 터져 나오는 심호흡.
앞으로 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적이었다.
과연, 천마의 제자라는 자신에게 어떻게 반응해 줄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 천마의 비급이 남겨져 있을 것인가.
점점 깊이 들어가는 유세현의 귀고리가 잔잔히 진동하고 있었다.
* * *
-쾅!
마구잡이식으로 내려친 양무원의 주먹에 테이블이 단번에 박살났다.
패배.
양무원은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다.
천마의 무공을 계승했을지언정 자신이 이길 것이라 단언했다.
놈은 무공의 초짜인데다가 자신은 보조 마법 스크롤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대체 무어냐...그 흉폭한 내력은...’
마력이 형상화 되었을 때 그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살을 떨리게 만드는 기분 나쁜 감각을.
‘상위신공을 만들어내야 한다.’
천마의 무공에 필적하는 신공을.
양무원의 눈이 쓰러져 있는 남궁시영을 향했다. 사지는 다 붙어있지만, 격렬한 전투이후 아무런 음식도 섭취하지 못해 상당히 수척해진 모습.
부하가 남궁시영을 제압하여 빠져 나온 것은 악운 중에선 그마나 천운에 속하는 것이었다.
“후우...준비가 갖춰지는 데로 의식을 펼치겠다. 양미라, 이 계집이 진짜 처녀인지 아닌지 확인한 뒤 허튼수작 못하도록 잘 감시해라. 물과 음식은 계속 주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사지를 절단해야 확실하겠지만 처녀의 신체는 정상일수록 좋다.
양미라가 남궁시영을 끌고 빠져나가기 무섭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분이 좋지 않던 양무원이 불같이 성을 냈다.
“누구냐! 썩 꺼지 거라!”
-똑똑똑.
하지만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양무원이 주먹을 불끈 쥐고 문으로 향했다.
‘그래,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는 개박살을 낼 생각으로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빠르게 굳어가는 인상.
“셀론, 여긴 어쩐 일로 찾아 온 거지?”
셀론은 교를 잠시 떠난 세레나를 대신에 찾아온 자였다.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썹, 붉은 눈까지.
양무원은 여자인 세레나는 몰라도 조각미남인 셀론이 별로 마땅치 않았다.
특히나 저 아무 감정 없어 보이는 눈동자는 사람 기분을 더욱 잡치게 만든다.
셀론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제공해 준 스크롤의 상당수가 사라졌더군.”
“...그래서?”
“교주가 찾는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둘은 방을 나섰다.
* * *
셀론의 뒤를 따라 양무원이 도착한 곳은 산중에 박혀있는 마교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는 건물이었다.
다른 장소와는 달리 눈에 띄는 화려한 장식들.
높이 솟아져 있는 계단위의 의자에는 중년남성이 앉아 있었다.
천하일존(天下一存), 일존천하(一存天下)
독존하는 자.
양무원이 무릎을 꿇자, 장사월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교주.”
“존!”
“단 두개 밖에 없는 공간이동 스크롤까지 들고서 어딜 나갔다온 거지?”
“......”
질문하는 형태였지만, 묘하게 느낌이 싸했다.
마치 알고 있다는 눈치.
‘누가 나를 배신한 건가?’
양무원은 추측 속에서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 전 말씀을 드린 그대로 입니다.”
“흐음...마수사냥 말인가?”
“예.”
“...신교의 부교주나 되는 자가 마수를 퇴치하러 가는데 스크롤을 들고 가다니...그래 뭐 좋다. 그래서 스크롤은?”
“...안타깝게도 중간에 정파...”
“말을 바로 하셔야지요.”
그때 누군가가 말을 잘랐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얼굴.
백청이었다.
꿈틀거리는 양무원의 이마.
백청이 말을 계속 이었다.
“천마의 제자에게 패하지 않으셨습니까.”
“...백청...”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 원래부터 교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따르라 해서 따랐을 뿐이죠.”
이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양무원은 입을 악물었다.
수하들을 잃고, 천마의 제자가 살아 있다는 것까지 발각 되었다.
거기다가.
“되었다. 그보다 부교주. 처녀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본좌가 사용하도록 하지.”
“...존.”
완전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다.
양무원의 고개가 축 처지는 반면, 장사월의 입꼬리는 다분히 올라갔다.
천마의 제자의 등장은 확실히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허나, 반대로 말하자면 경지를 더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도 할 수 있었다. 천마의 제자 놈은 괴물 같은 천마 그 자체가 아니니까.
“부교주, 본좌에게 거짓을 고한 것은 죽을 죄다.”
“......”
“허나, 자네는 나와 같이 한 것이 있지. 그 수고를 치하하여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나...”
장사월의 눈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터져 나왔다.
“합당한 대가는 치러야 될 것이다. 팔을 하나 가져가도록 하지.”
“...큭.”
이렇게 야망이 무너지는가. 자신은 죽었다 깨도 교주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장사월이랑 자신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고!
천마가 존재할 때에는 둘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서열이 하나 더 높았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양무원이 검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우오오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장사월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문을 향했다.
그때 내부로 황급히 뛰어 들어오는 한 남성.
“뭐냐. 무슨 일이지?”
“그, 그게. 처, 천마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놈이 찾아왔습니다.”
“뭐? 천마의 제자? 놈이 죽으려고 온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그럼?”
“입교를 하겠답니다! 그리고 실력을 입증하듯 막아서는 자들을 차례차례 무너트려 나가고 있습니다.”
< 입교(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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