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63화 (163/612)

< 처단(2) >

얼굴의 이목구비와 몸매를 살핀 퓌렌트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간다.

가슴의 크기는 역시 알테리아 대륙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여자는 충분히 1등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되려 희소성을 따지면, 다른 1등급 노예보다도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물론, 망가질 것이기에 이제는 별 의미 없지만.

퓌렌트가 다가가 팔을 뻗자, 여성은 재빨리 몸을 뒤로 빼 회피하는 행동을 취했다.”

“어쭈?”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허허...”

말을 들은 퓌렌트가 골 때린다는 표정이 되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 보니 손이 묶여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노예가 자시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항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곳에도 마물이 있는 걸 봤어요. 그런데 대체 왜 같은 사람끼리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전혀 생소하지 않은, 퓌렌트로서는 무척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그리고 대개 이런 말을 누가 꺼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노예제도가 없는 곳에서 넘어 온 현대인이라는 작자들.

“크큭,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당연히 이거 때문 아니겠나?”

퓌렌트가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돈?”

“크큭, 그래 돈! 너 현대인 맞지? 그곳에서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들었는데?”

맞는 말이다.

현대에서 살기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까. 벌기위해 사족을 못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태반은 사실상 일의 노예.

“그렇다고 사람을 잡아다 팔다니!”

“크큭, 그게 뭐 어때서? 수단이 중요한가? 결과가 중요한 거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더럽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을 텐데?”

“......”

“킥킥킥, 그리고 말이야. 뭣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야.”

여성, 이한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구름섬 때처럼 강대한 적들 앞에서 판도라의 주민들이 어느 정도 하나가 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대다수의 정치인들처럼 썩어문드러진 인간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니.

“그러니 얌전히 말이나 따라라. 혹시 알아? 네가 나랑 궁합이 잘 맞으면 평생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을지? 아, 물론 지금까지 맞는 애는 못 봤지만.”

퓌렌트가 한걸음 더 다가가자, 이한별은 발차기로 응수했다.

허나.

-턱.

“크큭, 꼬맹이 같은 발길질이군.”

강대한 힘 앞에서 너무도 힘없이 막혀버린다.

이한별을 발을 붙잡힌 잡힌 순간 느꼈다. 이자는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힌 놈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넌, 강제적으로 하는 걸 좋아하나보지? 뭐, 가끔은 그것도 나쁘지 않지.”

퓌렌트가 발을 툭 걸었다.

한 발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와르르 무너지며 이한별의 육신이 지면에 나뒹굴었다.

“크으...”

이한별은 거칠게 몸을 움직여 저항했지만, 손이 묶여있고, 양발이 붙잡힌 턱에 소용이 없었다.

퓌렌트가 이한별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입맛을 다셨다.

꽤 귀찮긴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여자도 좋은 점은 있다.

바로, 정복욕을 자극해 성욕을 높인 다는 것.

가슴을 가리고 있는 천 쪼가리를 단번에 찢어낸 순간이었다.

이한별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동시에 크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

‘어느 정도까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최고로 밀착한 상황.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앞으로 오지 않는다.

“...!!”

동공이 커진 퓌렌트가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모든 마력을 담은 이한별의 스킬은 이미 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끼아아아아!”

-콰아아앙!

파멸의 울음소리는 퓌렌트를 관통하여 주위 사물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위가 무너져 내리며, 흙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무, 무슨 일이야!”

고함을 들은 이한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포기하면 안 된 것을 이태광을 비롯한 동료들에게서 배워 왔기 때문.

허나, 그런 생각은 채 3초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개씨발년이!”

-쾅!

퓌렌트는 겉피부가 찢겨져 나갔을 뿐, 별다른 큰 피해는 없어보였다.

다이어 울프를 상대할 때도 보았듯 일반적인 힘, 민첩 스텟에 아울러, 내구력 스텟까지도 높았던 탓.

그렇기에 사실은 D랭크 스텟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퓌렌트에게 이정도의 타격을 먹였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눈가에 핏대가 잔뜩 선 퓌렌트가 이한별의 고개를 확 젖혔다.

“개년아, 쉽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 말아라.”

“......”

퓌렌트가 이한별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우선은 네년의 사지를 전부 뜯어내주마.”

-트득!

지긋이 힘을 주자, 팔이 인형처럼 뽑혀 나왔다. 이한별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곧바로 왼팔을 붙잡았다.

“그 다음은 범해주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트드득

“내 부하들을 전부 상대해야 될 거다. 그리고 그 후에는 네년을 묶어서 아리에프 숲에 메달아 놓을 거다!”

동쪽에 위치한 아리에프 숲.

이곳에 사는 식인 까마귀들은 강한 마비 독을 지니고 있는데, 주로 D랭크의 새내기들을 먹잇감으로 한다.

놈들은 머리가 무척 좋아 사냥한 먹잇감을 죽이지 않는데, 대리자들의 육신이 일부 재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가 너무 많아 누군가에 도움이 없다면 탈출 불가능.

때문에 대개 한번 붙잡힌 저 랭크의 대리자들은 아사해 죽거나 힘이 다할 때까지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한별은 눈을 질끔 감았다.

한 남자가 문득 떠올랐다.

튜토리얼에서 무너질 뻔한 마음을 잡아주었던, 기상천외한 힘으로 세력을 통합해 고블린들을 쓸어버리고 판도라로 먼저 떠나간 남자.

허나, 그녀는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왔는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행여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올 이유는 없다.

자신은 그의 그룹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또한 행여나 그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자를 당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크흐흐. 네가 건드린 게 누구인지 이제 좀 알 것 갔나?”

잔뜩 열이 올라간 퓌렌트를 보며 부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저래서는 못 팔겠군.”

이렇게 되면, 대상의 정신이 박살나서 추후 육체를 다시 이어 붙인다 해도 소용이 없어진다. 백치는 인기가 없으니까.

더 나아가 퓌렌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취한 행동을 후회하며 아리에프 숲에서 죽어 가리라.

“크큭 아무렴 어때? 우리한테도 주신다고 했잖아? 즐기면 되지 뭐 즐기면.”

“킥, 사지 다 떨어져나간 여자랑 하고 싶냐? 변태 같은 놈.”

“큭, 얼굴이 되잖아! 얼굴이!”

그들은 음담패설을 즐기듯 낄낄 웃었다.

그때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악!”

여자의 비명치고는 너무도 굵직한 목소리.

또한, 방향도 퓌렌트가 있는 던전 내부가 아니라 아이템 처리반이 있는 바깥쪽이었다.

“뭐야?”

“글쎄요? 시비가 붙은 건가?”

“가서 알아봐!”

“예!”

간부의 말에, 부하 몇 명이 바깥으로 향했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비명 섞인 아우성뿐이었다.

“사, 살려...끄아아악!!”

간부와 수하들은 그제야 단순히 시비가 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뭐? 에이 설마...누가 우리에게...”

대화를 나누던 간부 두 명의 시선이 교차했다. 대놓고 지부를 부수고 다니던 놈들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있긴 있었다.

“설마 그놈들이 다시 행동을?”

“큭큭, 모르지. 하지만 이건 확실하네.”

“뭐?”

“간덩이가 붓다 못해 삐져나왔다는 거.”

“큭.”

호위 간부들의 랭크는 B랭크 초급.

30%에 달하는 퓌렌트에 달할 바는 아니지만, 웬만한 기사들은 도주해야 할 정도로 그들은 알아주는 강자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퓌렌트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간부는 재빨리 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가자 얘들아!”

“예!”

무기를 빼든 간부와 부하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호오...양팔이 다 뜯겨나가는데 비명하나 안지르네? 진짜 독한데? 그럼 이건 어때?”

광기어린 표정 그대로 이한별의 다리를 붙잡은 퓌렌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지. 지금 뜯으면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일단 한번 하고 뜯어줄게.”

이한별을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대량의 출혈 때문에 의식만 점점 흐려질 뿐이었다.

그의 흉물스러운 제 3의 무기가 이한별을 향해 움직였다.

그때였다.

-퉁! 퉁! 치지직.

물수제비 하듯 땅을 튕기며 날아온 무엇이 퓌렌트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퓌렌트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베제프?”

베제프는 그의 호위 간부로서 B랭크를 면전에 두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도저히 커버가 불가능해 보이는 바람구멍이 나있었다.

“크윽...노, 놈은 괴, 괴물...”

-털썩

베제프가 목이 젖혀지자. 바지를 황급히 올린 퓌렌트가 무기를 뽑았다.

“퓌, 퓌렌트님!”

그 주위를 퇴각해온 병사들이 감쌌다.

“큭!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노, 놈은 괴물입니다! 베, 베제프를 단 한번에...”

“뭐라고? 한 번에?”

퓌렌트 눈이 다시 한 번 동그랗게 변하는 반면, 이한별은 멍한 얼굴이 되어 이를 지켜봤다.

누가 이자들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는 건지.

잔뜩 집중해서 바라보던 저편에서 마침내 그 장본인이 걸어 나왔다.

등치가 무척 큰 남자.

‘태, 태광 오빠?’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쯤, 큰 덩치에 가려져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한 남자가 눈에 비쳤다.

은빛의 갑옷, 그와 대비되는 칠흑의 검.

‘저, 저건...설마?’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인물과의 만남. 이한별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입을 악물었다.

도끼눈이 된 퓌렌트가 외쳤다.

“네놈...정체가 뭐냐!”

“나를 계속 찾아다녔다고 들었는데?”

“...큭, 그래 네놈이 그놈인가? 우리 지부는 왜 부수고 다니는 거지?”

퓌렌트는 시간을 끌며 가지고 있는 버프 스킬을 몰래 사용했다.

쫄리는 전력 앞에, 이한별에게 보였던 분노조절장애 같은 성격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한별을 슬쩍 살핀 유세현이 눈빛이 착 가라 앉았다.

있는지 몰랐는데, 아마도 그새 옮겨져 온 모양이었다.

“...그냥.”

“뭐?”

퓌렌트의 반문과 함께 유세현의 신형이 일순간 자취를 감췄다.

그저 눈 한번 깜박 했을 뿐인데 둘 사이의 거리는 어느새 반으로 좁혀져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해온 퓌렌트로서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속도.

“미, 미친!”

-챙!

퓌렌트는 간신히 받아쳤지만 주위에 위치해 있던 길드원들은 아니었다.

수수깡마냥 잘려 떨어지는 목.

‘마, 말도 안돼! 도대체 어떻게!’

전력으로 상대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허나, 오산이었다.

차원이 다르다. 힘, 민첩, 저항력. 그 무엇하나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이용석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전 유혜인에게서 들었던 말 때문에 살짝 두려워하고 있던 그였다.

단 세 명이서 쓸어버리러 간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너무 자신감에 찬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니다. 차고도 남았다. 아니, 되려 실력에 비해 겸손한 편이었다.

그야말로 압도.

“머, 멈춰라! 멈춰!”

“......”

“크아아! 멈추라고! 거, 거래를 하자! 거래를!”

거칠게 몰아치던 유세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퓌렌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허억...허억...그래. 잘 생각했다 거래를...거래를 하자...”

허나, 유세현은 퓌렌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가 멈춘 이유는 다른 것이었기에.

‘출혈이 너무 심한데?’

이한별에게 다가간 그가 떨어져 나간 팔을 주워들었다. 퓌렌트가 중얼거렸다.

“...지금 뭐하는...”

“허억...허억...세, 세현씨...”

“...?!”

퓌렌트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서로 아는 사이란 말인가!

“말하지 마세요. 출혈이 더 심해집니다.”

유세현은 무릎을 굽혔다. 퓌렌트가 아주 깨끗이 뜯어준 덕분에 맞추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찢겨나간 천 쪼가리로 중요 부위를 덮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고 계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유세현이 퓌렌트를 응시했다.

“...지, 지인인 줄 몰랐다.”

“알아도 지금까지는 모른 척 팔았겠지.”

“......”

“왜, 너희길드를 부수고 다니는지 물어봤지? 제대로 답해주마.”

“......”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다.”

무슨 뜻인지 퓌렌트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음을.

‘그럴 바에는...’

놈의 소중한 것을 최대한 길동무로 데려가리라.

-트드득.

핏줄이 솟아오르며, 그의 육신이 부풀어 올랐다. 막대한 힘을 주지만 이성을 잃고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게 만드는 스킬.

[비스트.]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이성을 간신히 붙잡은 퓌렌트가 포효했다.

“크하하하. 네 지인들을 내가 산산조각 찢어 발겨...”

허나, 그는 마지막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흑빛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 처단(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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