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물 탈취(2) >
“......”
정적이 흘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장군들.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들이었지만, 현재 그들의 동공은 거센 지진을 동반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 놈년들이 소란을 일으킨 근원이었기 때문.
아니, 그보다 이렇게 쉽게 뚫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란 말인가!
“폐, 폐하를 호위하라!”
-타다닥!
좌우전방. 대장군들이 투란다스의 주위를 순식간에 감쌌다.
“네놈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대장군의 외침을 투란다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가 직접 입 열어 말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 온 게냐? 방을 잘못 찾았을 리는 없을 테고.”
일행을 바라보는 투란다스의 눈동자는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과연 과거 황금사자라고 불렸을 만한 재목.
당당함과 호쾌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짐을 시해하러 온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이강호가 즉답했다.
“허허, 그 말을 믿으라는 겐가? 그럼 한번 말해 보거라 왜 이곳까지 왔는지.”
“......”
이강호는 그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고 있는 갑옷을 툭툭 칠뿐이다.
그 순간 투란다스를 포함한 대장군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거지꼴 같은 낯짝에 비해 갑옷이 묘하게 번쩍거린다.
“설마? 그건...”
하지만 어떻게?
황실창고의 보안은 최고 레벨이라서 강제적으로 들어가면 경보가 울릴 터였다.
“어떻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던...”
황제의 뇌리 속에 별안간 번개가 치며 한순간 말이 뚝 끊겼다.
지금은 궁금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템과 침실.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바는 무척 간단했으므로.
“네놈들 설마! 페레브 경! 짐의 침대 옆을 사수...”
-타다닥!말을 끝낼 새도 없이 일행이 질주해나갔다. 황제의 안위를 최우선 했던 대장군들은 위치를 고수했지만 일행은 이를 무시하고 통과했다.
순식간에 목표지점에 도착한 이강호가 침대를 툭 던지자 치자, 비밀공간을 모르는 대장군들은 의아해하는 반면, 투란다스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 한명만 짐을 지키고 나머지는 저들을 제압해라! 어서!”
“하지만 폐하, 그랬다가는 폐하의 안위가...”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간수한다! 그러니 빨리 제압해라! 이건 어명이...”
그 순간 벽을 향해 고열의 화염을 쏟아졌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벽.
-치지직!
-삐이이이!
수십 가지의 마법수식이 일격에 박살나고, 발동한 알람 마법이 귀를 찌르는 비명을 토해냈다.
장군들은 그제야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장소.
그리고 고위 보안 마법.
대장군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사이 이강호가 뚫린 틈새를 향해 팔을 쑥 뻗었다.
익숙하면서도 정감 있는 감촉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후웅!
단번에 뽑혀져나 온 적색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솟아오르는 화염.
어찌나 열기가 뜨겁던지 대장군들은 일시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투란다스가 지그시 입술을 곱씹었다.
고위 랭크의 아이템이 보관되어있는 비밀장소.
이곳은 그밖에 모르는 장소였다.
도면에도 넣지 않았으며 마법처리를 할 때도 스크롤화 시켜서 직접 부여했다.
기껏해야 아는 사람이라고는 석공뿐인데,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마물의 습격으로 사망한지 오래다.
더군다나 놈의 행색은 머리카락이나, 얼굴로 보나 판도라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현대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흡사 석공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석공과 조우할 수 있을 확률은 눈에 꼽는 것.
투란다스는 그들에게 뭔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놈들을 생포하라!”
대장군 중에서도 최고 무위를 지니고 있는 페레브가 손을 풀며 제일 앞으로 나섰다.
“내가, 창을 강탈한 자를 상대하겠네.”
강자를 처리하면 나머지는 흩어지는 것이 무리의 특징.
그는 이강호가 우두머리라 느껴 한 말이었지만, 곧 오산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주희가 운디네를 소환하자, 황제의 눈이 커졌다.
“정령술사?”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브로 얼굴을 숨기고 있던 아퀼라가 한 꺼풀 벗어던졌다.
높게 솟아난 뿔과 특유의 꼬리.
아퀼라는 유세현의 명령으로 여성용 경갑을 작용하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뚫려있어 고혹스런 몸매를 전부 감추기란 불가능했다.
“저...저건 마족!”
“이 무슨...”
실전된 정령술사에 마족까지.
말이 안 되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조합이다.
유세현이 한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한 투기가 그들의 육신을 옭아맨다.
“이 무슨 압박...”
그들이 거짓된 평화에 안주하고 있던 사이, 일행은 아르카드 제국인 그 누구보다 강해져 있었다.
대장군 한명을 밀쳐낸 유세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는 폐하와 적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이런 짓을 해놓고도 잘도 그런 말을 내뱉는구나.”
“어차피 사용하지도 않는 아이템이라고 들었습니다만?”
“......”
맞는 말이었다.
아르카드의 기사들은 창을 쓰지 않으니까.
알테리아 대륙에서 창이란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 차이를 커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썩혀 두고 있을 바에는 좋은 사용자가 사용하는 게 났지 않겠습니까 폐하.”
“이놈!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그 입을 놀리느냐!”
잠시 정지되어있던 전투가 재차 반발했다.
유세현은 피식 웃었다.
하기야 이곳에 온 이유가 대화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솨아아.
유세현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순식간에 일대를 장악했다. 달려들던 장군들은 오감이 사라지자, 그저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달려도 달린 것 같지 않고, 손가락을 만져 봐도 느낌이 들지 않을 테니 그들은 현재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유세현은 흑암(黑暗)을 투란다스에게만 적용하지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일행이 천천히 다가가자 검을 치켜세우고 있는 투란다스의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힌다.
그도 꽤나 강자라지만 저 4명을 동시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황제, 투란다스는 죽음을 각오했다.
허나.
“...무슨.”
그냥 지나친다.
보물 탈취와 암살이 목적이 아니었단 말인가?
투란다스의 고개가 어느새 문 근처에 다가선 유세현을 향했다.
문고리를 붙잡은 유세현이 그를 향해 툭 말했다.
“폐하, 이젠 더 이상 안주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만약 이대로 계속 안주한다면 추후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만 될 것 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단 말이냐?”
본래는 관심도 없었지만, 그들의 행동 때문에 반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유세현이 문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징조는 나타났을 텐데요. 창은 제 동료가 좋은 일에 잘 사용하겠습니다.”
“......”
-턱.
어둠은 그들이 나가고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연기가 흩어질 때쯤에는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 * *
“어? 오빠!!”
유세현을 발견한 유혜인이 품에 쪼르르 달려와 포옹했다.
던전에서 약 3달 정도 있었으니, 무려 90일 만의 만남 이었다.
마력량을 살피는 유세현의 입가에 흡족함이 맴돈다.
추정마력 C랭크 40%.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간 던전을 착실히 공략했는지 확실히 성장한 것이다. 정보를 주고 간 보람이 있었다.
연이어서 소식을 레피아와 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진짜 오랜만이네. 어딜 간다고 듣긴 했는데 잘 된 거야?”
“그럭저럭.”
이강호가 간단히 답하자 레피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기야 그런 정보도 줬는데 그러시겠지. 던전이 나타날 거란 건 대체 어떻게 안거야? 특제 약도 그렇고 진짜 어쩔 때 보면 귀신같다니까?”
“그보다 몇 개나 클리어 했지?”
“총 3개.”
“한 달 씩 걸린 건가. 느리군.”
“야! 우리가 너희처럼 괴물인줄 알아? 어휴...그보다 나 저 얘 뒷바라지하느라 좀 힘들었는데...”
유혜인을 슬쩍 흘긴 레피아가 귓속말을 건넸다. 이강호는 피식 웃으며 마석을 던졌다.
“호호, 고마워 고객님~아, 그런데 못 보던 일행이 한명 늘었네?”
“그러게 오빠, 이분은 누구야? 소개 안 시켜줘?”
“아, 얘?”
유세현이 아퀼라를 슬쩍 바라보자, 아퀼라는 그제야 로브를 벗었다.
“아, 그때 그 소환수...”
“마왕님의 은혜를 받아 권속이 된, 아퀼라 라즈베리 입니다. 동생 분을 직접 뵈어 영광입니다.”
아퀼라가 손을 가슴을 얹고 공손히 인사하자, 유혜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설정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그래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복장도 좀...
“아 예, 오빠를 잘 부탁드려요.”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존대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아...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군주님의 동생 분은 저에게 있어서도 상관이십니다.”
이전에도 유세현을 계속 마왕이라 부른바가 있듯, 아퀼라의 서열에 대한 고집은 은근히 셌다.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혜인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놨다.
“아...그, 그렇다면 그러도록 할게요. 아, 아니, 할게.”
그러자 김주희가 아퀼라의 어깨를 잽싸게 낚아챘다.
“야, 아퀼라. 그러고 보니깐 넌 왜 나한테 존댓말 안 쓰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야! 내가 한때는 네 주인이었잖아! 주인!”
김주희가 으르렁거리자, 아퀼라는 콧방귀를 찼다.
“이전에도 말했듯 난 인간 계집을 존대하는 취미는 없다.”
“...그럼, 선배의 동생 분에게는 왜...”
“이 분은 동생이잖나.”
실로 기똥찬 논리.
“으...이 한주먹도 안 되는 게 진짜...”
김주희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자, 극중 드라마 같은 상황이 웃긴지 유혜인이 피식 웃었다.
레피아와 리체도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면모였다.
둘과 함께하기에 완벽한 여자인 줄만 알았는데.
“그보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뭐야? 단순히 얼굴을 보러 온건 아닐 텐데?”
“역시 눈치가 빠르군. 줄게 있어서 왔다.”
이강호의 말에 유세현과 김주희가 장비를 쏟아냈다.
유혜인과 리체, 레피아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이 미친 아이템 등급은 뭐란 말인가.
“레어 A급 흉갑...레어 S급 각반...이, 이걸 정말 우리게 주겠다고? 공짜로?”
“투자지.”
투자!
레피아의 입장에서는 단어만 다를 뿐이었다.
“혹시 내 동생들도 골라도 되는 거야?”
“물론.”
“후후...나중에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레피아는 신이나 곧바로 아이템을 고르기 시작했고. 리체는 먼저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유혜인도 슬슬 아이템을 고르려던 찰나였다.
“혜인아 넌 이거 써.”
유세현이 들고 있던 아이템을 건넸다.
레어 SS급 레더아머, 레어 SS급 사슬갑옷, 레어 SS...
사이즈를 보나, 등급을 보나 아무리 봐도 미리 빼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오...오빠 내 것만 너무 좋은...”
“그냥 써. 다른 것들도 충분히 좋으니까.”
리체는 그것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동생이 유세현의 반만 닮았더라면 어땠을까.
곧바로 착용식이 이어졌다.
새 장비를 착용한 유혜인의 입꼬리는 미묘하지만 올라가 있었다.
티를 내려하진 않지만, 많이 기쁜 게 분명했다.
하기야 새것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 장비들은 현대의 옷으로 치자면 명품이었다.
동생이 기뻐하니, 유세현의 입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 난리 통에도 동생 사이즈가 어떨지 김주희에게 물어 본 것이 신의 한수로 작용한 것!
허나, 아쉽게도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빠! 오빠도 이제는 우리랑 같이 던전 돌아다니는 거야?”
“...아니.”
일행은 다음 장소를 정해뒀다.
북서쪽보다도 훨씬 서쪽. 무림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든 땅.
위치를 말하자 레피아가 눈을 번뜩 빛냈다.
“나 이전부터 줄곧 너희들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뭐지?”
“너희들은 왜 그렇게 힘에 집착 하는 거야? 지금상태로도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텐데?”
유혜인도 고개를 돌려 유세현을 응시했다.
이에 유세현은 조각 하나를 테이블위에 올려놨다.
아이템 명: 떨어져나간 성물의 파편(외부)
등급: 에픽 [SSS Rank]
상세정보: 신이 판도라 대륙에 퍼트린 성물 파편조각. 6조각을 모으면 운명의 전장 속으로 진입할 자격이 갖춰집니다.
눈을 세 번 비비고도 또 비벼야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등급이었다.
에픽 SSS랭크라니?
“오, 오빠 이게 무슨..”
“지금부터 잘 들어. 이건 우리가 여행하면서 알아낸 정보니까.”
대륙의 붕괴. 그리고 생존하기 위한 각 종족의 발버둥.
그들은 아주 간추려서만 얘기했다.
“...말도 안돼.”
레피아가 중얼거렸다. 이강호가 툭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게 던전을 돌라고 말했던 거야?”
“그래, 맞아. 앞으로 살아남으려면 더 열심히 돌아둬야 될 거야.”
“...이 내용을 누구누구 알아? 귀족들 하는 꼬라지들을 보면 아무도...”
“맞아. 대부분은 모르지. 하지만 알게 만드는 방법은 존재...”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심각함을 느끼고 있던 레피아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바쁘다고 해!”
“그, 그게 이전에 길드장님께서 주셨던 명단에 있는 인물인데요...일단 그냥 보냅니까?”
“뭐? 명단?”
그 말에 유세현과 이강호, 김주희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교차했다.
설마.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그, 그게 이태광이라고...”
유세현이 자리를 박찼다.
< 보물 탈취(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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