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3) >
체르모프를 포함한 기사들의 인상이 한순간 확 돌변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과 굳게 아문 입.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강한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이교도들이 기어코 이곳까지 마수를 뻗혔다! 전원 전투 준비!”
-치잉.
기사들은 용맹하게 검을 뽑았다.
유세현은 별로 좋지 못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사단은 확실히 강하다.
인간 측에서는 강한 축에 속하는 카트린과 비슷한 C랭크 80%정도의 마력을 소지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강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막 이곳에 들어 왔을 때 등장한, 마력을 별로 소지하고 있지 않은 몬스터들조차도 기본 스텟이 그렇게 높았는데, 이교도라고 한다면 얼마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을까.
또한 이것은 그가 발견한 문제점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우리를 버리고 짓밟은 자들에게 단죄를 내려라! 마신 루시뷀트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배부른 돼지들에게 단죄를!”
“우아아아아!”
기사단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인원들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광기가 잔뜩 배어있었는데, 같이 등장한 몬스터들은 이교도들의 지시에 따라 기사단원들을 학살해 나갔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인간이라니.
유세현과 등을 맞댄 채 달려드는 몬스터 한 마리를 찔러 죽인 김주희가 재빨리 물었다.
“선배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전투? 후퇴?”
“일단은...”
대기.
그 말에 이강호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오직 이벨린 뿐이었다.
“지금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나몰라라 하고 있겠다는 건가요?”
“어차피 이들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기회 입니다.”
“......”
그렇다. 이것은 기회였다.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이벨린도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고, 일단 그들의 말을 따랐다.
“크헉!”
그 사이에도 많은 인원들이 죽어나갔다. 유세현은 체르모프의 전투를 주시했다.
눈 속에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몸놀림.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검은 정말 날카롭기 그지없다.
허나,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군...’
생존자들이 많은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사용하는 광역스킬.
광역기를 사용하면 진형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닌다.
그런데 기사단들은 그 높은 마력으로 카트린처럼 무기만 강화할 뿐 마땅한 스킬 하나 사용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주위에 코인이 떨어져 있는데 마치 없는 것 마냥 무시했다.
‘판도라가 아닌, 이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건가?’
이건 정말 큰 수확이었다. 이는 적들 또한 쉽사리 강해질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일행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병사들을 포함해 기사단원의 수가 100명 이하로 줄었을 때였다.
-휘익!
칼날같은 물보라가 휘몰아치고
-콰과광!
그 위를 흑빛의 뇌전이 가득 메운다.
이강호와 이벨린이 허공을 향해 동시에 창대와 검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주위로 생겨난 엄청난 양의 얼음 화살이 이교도인들의 육신을 꿰뚫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체르모프의 두 눈동자가 잔잔히 떨렸다.
상황의 엄청난 속도로 뒤집어 지고 있었다.
단 4명에 의해서!
“크윽! 퇴각! 퇴각이다!”
결국, 광역기술을 버티지 못한 이교도인들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피칠갑이 된 체르모프가 곧장 예를 표했다.
“자네들 보통의 여행자가 아니었군. 철기사단을 대표에 감사를 표하는 바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상당수의 인원들이 죽었다.
허나, 기사단에게도 그만큼의 수확은 있었다. 사지가 잘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교도인들을 포획한 것.
주위를 훑어본 유세현이 최대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죽었군요...”
“...그렇군. 더 이상의 진군은 무리겠어.”
“귀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자네들 분명 노르페움으로 간다고 했었지?”
“예.”
“잘됐군. 같이 가도록 하지.”
체르모프의 입에서 마침내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 나왔다.
유세현은 그저 마음속으로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체르모프가 힘차게 외쳤다.
“위치를 들켰으니 바로 이동하도록 하겠다! 전군! 전진!”
* * *
“저기...”
“예, 말씀하세요.”
이강호가 답하자, 말을 꺼낸 이벨린이 살짝 어물쩍 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리 봐도 역사가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요.”
“역사의 재현?”
“예.”
“자세히 들려주시죠.”
이벨린 발디안은 본래 귀족가의 자녀.
그녀는 품격을 위해 싫던 좋던 어쩔 수 없이 역사를 배워야만 했었다.
수많은 왕국의 탄생과 멸망.
대개 그러하듯 흥미 없는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기억에 별로남지 않기 마련이었다.
허나, 그런 그녀조차도 노르페움 왕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추위로 죽어가는 백성과 달리, 사치를 더해가는 왕.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귀족들까지.
여기까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척 일반적인 것이었다.
특별한 것은 그 다음.
어디선가 갑자기 이교도 인들이 등장한 것.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차례차례 꾀어내기 시작했고, 모종의 수를 써 천 년간 등장한적 없는 마족을 소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중간계에 현신한 마족은 자신들을 불러낸 이교도인들을 포함하여 성채, 마을, 그 모든 것을 한줌의 재로 만들었다.
결국 알테리아 대륙 곳곳에 신탁이 내려왔고, 수많은 왕국과 교단들은 이 마족 한 마리를 처리하기 위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세간은 행여나 마왕이 강림할까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흠...언제 발생한 일입니까?”
“알테리아 대륙력 7301년이에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도시로 들어가면 바로 확인을 해보도록 하죠.”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녀의 말이 맞다면 그동안 발견할 수 없었던 던전 공략의 단서를 찾아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선두가 멈춰 섰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하도록 한다!”
“예!”
사람들은 체르모프의 명령에 따라 눈을 걷어내고 천막을 치는 등 부리나케 움직였다.
“배때지에 기름만 찬 더러운 놈들...”
“......”
문득 이교도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유세현은 묵묵히 자기 할일만 했다.
그때였다.
“네놈들! 북부인도 아니라면서 왜 우리 일에 참견 하는 것이냐!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
한 남성의 말에, 유세현의 고개가 쓰윽 돌아갔다. 주위를 한번 훑어본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지?”
“허! 아무것도 모르고 저놈들을 도와준 것이란 말이냐!”
그 말에 유세현의 눈빛이 착 가라 앉았다.
“먼저 덮친 것은 네놈들이다. 설마 여행자임을 알고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건 아니겠지.”
“......”
“그보다 방금 전에 한말의 뜻이 뭐지?”
“큭! 우리는 원래 이 주위에 사는 마을 사람이었다. 작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살만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온이 더 낮아지고 마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리 수준으로는 처리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무능한 왕은 세금만 가져가고 병사의 파견도, 식량 지원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되려 자신의 사치를 위해 세금을 높였다! 먹을 것도 없는데! 알겠나! 우리는 먹을 것도 없었었다고!”
“......”
“우리를 빼내줘. 당신들이라면 할 수 있지 않나. 우리는 당신을 쫒지도 않을 것이고, 흡사 다시 만나는 일이 있더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개, 돼지들의 목뿐이니까!”
유세현이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자, 남성은 입이 마르도록 떠들어댔다.
“제발...우리를 풀어줘라.”
“......”
유세현은 결국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남성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들을 풀어줘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기 때문.
또한 부탁을 들어줄 의리도 없다.
“너희들도 결국엔 자기 배에 기름만 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족속들이었군. 더러운 놈들!”
“그 입 닥쳐라!”
고함을 듣고 뛰어온 기사가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옆에서 내용을 들은 이강호가 한껏 심각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후...시나리오가 단순하진 않을 것 같네.”
“그러게. 정보가 더 필요해.”
유세현은 고개를 돌려 저편을 바라봤다.
아직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드넓게 펼쳐져 있는 흰 벌판밖에 없었다.
* * *
“임시 신분패입니다. 이걸 보여주시면 다른 증명 없이 여관 이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노르페움에 도착한 그들은 곧장 이교도와 현 왕국의 상태에 대해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상가에 가서 묻기도 하고, 신문을 보기도 했다.
상황은 이전 남성에게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아니, 되려 더 심각했다.
바깥뿐만 아니라 왕국 내부에서도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이에 일행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왕국을 돕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이교도를 돕는 게 맞는 것인지.
역사의 흐름으로만 따지자면, 이교도들을 도와 왕국을 파괴한 뒤 일행이 마족을 막는 게 제일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야...만약 마족 자체를 소환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되는 것이라면...”
현재, 노르페움 왕국 내부에서는 신탁의 내용이 파다하게 떠돌고 있었다.
[악마가 강림하면 피의 폭풍이 몰아치리라.]
꽤나 직설적이기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난감하군...”
판도라 내부에서 여러 종류의 던전을 클리어 한 이강호다.
함정이 가득해 한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죽음으로 바로 직결되는 던전.
동료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던전.
상상할 수 없는 강한 괴물이 튀어나오는 던전.
그런 수많은 던전 중, 시나리오 있는 던전은 이강호에게 제일 맞지 않았다.
오랜 경험으로도 커버가 힘들기 때문.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던전은 흐름 및 내용파악을 그만큼 잘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유세현과 이벨린이 있는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분명, 단서가 더 있을 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현재로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전부...”
이벨린의 말에 유세현이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홀로 뚝 떨어져 있는 마을. 키만은 마을이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 했지만, 사실 정 반대 방향인 북서쪽에 있었다.
나침반 자체가 페이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나침반은 왕국에 도착하기 무섭게 부서졌다.
만약, 중간에 기사단을 만나지 못했다면 꼼짝 없이 북동쪽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위치를 틀리게 알려줬으면서 왜 약조를 받아 낸 거지?’
영문을 모를 때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면 보다 더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마을을 숨기려하는 건 분명해...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약속을 왜...’
약속 부분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한 번 더 생각한 유세현의 머릿속에 문득 벼락이 쳤다.
‘설마, 약속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던 건가?’
거절하면 제압한 뒤 바로 내쫓는다.
돌아가는 길을 모를 테니 나침반을 지급해 줄 것이다. 행여나 누가 물었을 때 발설을 하게 되면 되려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마을에 관심이 있다고...’
거기까지 딱 생각한 찰나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여관의 문을 두드렸다.
철기사단의 기사단장 체르모프였다.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아, 형식상 잠시 확인해야 될 것이 있어서 들렸네.”
“예? 형식상 말입니까? 어떤...”
유세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체르모프가 말을 이었다.
“혹시 그 근처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 적 있는가? 아니면 마을이라던가.”
그 순간 엄청난 위화감이 유세현의 몸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돌이켜보자면 기사단의 병력은 무척 많았지만, 이교도에 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재앙을 불러일으킬 이교도의 처리를 명받은 상태다.]
이교도보다도 적은 병력으로 이교도를 처리하러 간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처리하러가는 것은 진짜 무엇이었을까.
‘그렇군. 그래서 키만이 우리에게 일부러 다른 위치를 흘린 거였군!’
유세현이 재빨리 답했다.
“예? 저희는 저번에 말씀드렸듯 조난을 당해서...”
“알고 있네. 그러니 방금 말하지 않았나. 형식상이라고. 아무튼 아무도 못 만난 건 맞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알았네. 다시 쉬도록 하게.”
끼익- 탁.
체르모프는 이내 방 내부에서 자취를 감쳤다. 유세현이 입을 막 떼려하던 찰나였다.
“선배님...저 알아낸 거 같아요. 확실한 단서.”
<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3)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