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2) >
‘키, 키만 올란드라고?’
키만 올란드. 알테리아 대륙인 중에서 황제의 이름을 모르면 몰랐지,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마도의 정점에 다다른 자.
인간을 뛰어넘은 자.
키만 올란드는 그 당시 인간이 절대 깰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7서클 마스터의 벽을 깨고 8서클에 도달한 마법사였다.
‘지, 진짜인가? 아니면 동명이인? 인도자라고 불리는 걸 보면...’
이벨린은 머릿속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이에, 유세현이 볼을 긁적였다.
생각보다 익숙한 이름이었기 때문. 잠시 고뇌하던 그의 두 눈동자가 김주희가 차고 있는 팔찌로 향했다.
‘아, 맞아. 저 팔찌의 제작자의 이름이 분명...흠, 대마법사인가...’
“제 이름은 유세현이라고 합니다.”
“이강호입니다.”
“김주희예요.”
“이, 이벨린 발디안입니다.”
순차적으로 각자 자신을 소개하자, 키만이 흥미롭다는 듯 수염을 쓸었다.
“호오? 세 명은 대륙 본토사람이 아닌 모양이구먼. 바다 건너에서 왔는가?”
“예.”
“허허, 그 험한 바다를...정말 대단하군 그래.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잠시 동안 겉치레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경계심이나,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이런 척박한 북부에 까지 어쩐 일로 왔는가. 촌장에게 듣자하니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던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딱히 원해서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닙니다.”
“흠...길을 잃었다는 겐가?”
“예, 그래서 그런데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곳까지 도달하기까지 여러 상황을 떠올린 유세현이 재빨리 말을 지어냈다. 이벨린은 그의 빠른 임기응변에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흠, 위치라...여기는 노르페움 왕국에서 북동쪽으로 100km정도 떨어진 곳이라네.”
“......”
이벨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노르페움 왕국.
알테리아 대륙 최북단에 존재하는, 아니 했었던 왕국.
노르페움 왕국은 원인불명의 이유로 그녀가 태어나기 100년 전 멸망했다.
‘역시, 이 노인은...’
생존시기와 상황이 눈앞의 노인을 대마법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건가? 아니, 아니지.’
과거라고 치기에는 몬스터들의 수준이 다르다. 이곳은 던전 내부가 분명했다.
그녀는 유세현의 질문하는 것을 귀 기울여 계속 경청했다.
“아까, 마을 주민들께서는 저희를 누구와 착각 하시는 것 같던데...무슨 일이 있습니까?”
“흠...그 건에 대해서는 내 다시 한 번 더 사과함세. 허나, 이유를 말해 줄 수는 없네. 조금 민감한 일이라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포기할 정보는 쿨하게 포기한다. 나머지는 노르페움에서 얻으면 그만이었다.
“자네들은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인가?”
“여행의 여독도 풀 겸 일단은 노르페움으로 갈 생각입니다만.”
“흠, 그렇군...그렇다면 부탁이 한 가지 있네만.”
“뭡니까?”
“이 마을의 위치를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주게.”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다네.”
유세현은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 허나, 그는 이미 추후 내뱉을 말에 대해서 전부 정해놓은 상태였다.
“이유를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까와 같은 이유라서 말이야...미안하네. 약조해 줄 수 있겠는가?”
주위에 있던 마력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유세현은 그 순간 노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거절하면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군.’
살인 마법인지, 아니면 제압 마법인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상황으로 보았을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까지 해서 이곳의 위치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건가. 대체 이곳에 뭐가 있기에...’
처음에는 노르페움이라는 곳에 단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유세현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이곳이 던전 공략의 핵심이다.’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 어쩌면 밑밥은 진즉 깔려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유 정도는 알아야...”
이벨린이 멋대로 입을 뗀 순간이었다. 유세현이 재빨리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마을주민들께서 조난당한 것을 구조해 주셨는데 그 정도야 못 들어드릴 것 없죠.”
“허허, 그래주겠는가?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자칫 살벌해질 뻔 했던 대화는 이윽고 훈훈하게 막을 내렸다.
“언제쯤 떠날 생각인가?”
“음...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으니 하룻밤만 머물고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그러도록 하게. 여관은 없으니 좀 좁긴 하지만 우리 집에서 숙박하게나.”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그럼 나는 잠시 촌장에게 다녀오도록 하겠네.”
-끼익 탁.
키만은 곧 바깥으로 모습을 감췄다. 문을 슬쩍 흘긴 유세현이 이벨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벨린씨 죄송한 말이지만 앞으로는 멋대로 껴들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은 관망자 아닙니까?”
“......”
너무도 지당한 말이라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강호가 툭 물었다.
“뭘 느끼기라도 한 거야?”
“그 노인...우리가 거절하면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어.”
“...그걸 알 수 있다는 건가요? 어떻게?”
이벨린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 열어 말했다. 머리가 너무 좋아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즉 파악 했기에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
“감입니다.”
“......”
진실이면서도 진실이 아닌, 이벨린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차를 홀짝 들이켰다.
-솨아아.
창문 밖으로는 잠시 그쳤던 눈보라가 다시금 몰아치고 있었다.
* * *
쏟아졌다가 그쳤다가, 폭풍은 정말 변덕스러웠다.
일행은 눈이 멈추자 분위기를 살펴볼 겸 바깥을 거닐었다.
“형! 진짜 여행자야? 어디어디 가봤어?”
그런 그들에게 쏟아지는 질문세례.
마을에는 유난히도 아이들이 많았다. 겉으로만 보자면 어른 수를 훨씬 웃도는 듯한 느낌.
“누나~어디어디 가봤어? 응? 남쪽은 따듯하다는데 정말이야?”
덕분에 유세현과 김주희, 이강호는 의도치 않게 무척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달라붙는데, 마땅히 대답할거리가 없는 것!
대충 이야기를 꾸며 말 하려던 그들을 구제한건 다름 아닌 이벨린이었다.
“그럼~남부에는 사막이라고 불리 우는 데가 있어. 거기는 얼마나 더운지 땅은 바짝 메말랐고...”
이벨린이 스타가 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때마침 돌아오던 키만이 이 모습을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허허, 아가씨가 인기가 참 많군.”
“그러게요.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는데...”
“허허, 아이들은 여행자를 동경하는 법이지. 아, 그보다 이걸 받게.”
키만이 내민 손바닥 위에는 나침반이 있었다.
“이게, 보다 더 쉽게 자네들을 노르페움으로 인도할걸세.”
“허...이렇게까지 신경써주실 필요는 없는데...”
“허허, 마을에 온 손님 아닌가.”
유세현은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나침반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다시 바라보며 별생각 없이 말을 툭 내뱉었다.
“아이들이 참 많군요.”
“그래...그렇지.”
그 순간 키만의 표정이 일순간 변화했다.
살짝 내려간 시선과 움찔거리는 입가.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유세현의 두 눈에는 똑똑 비쳐보였다.
곧 원래대로 돌아온 키만이 몸을 돌렸다.
“난, 먼저 돌아가 있겠네. 적당히 둘러보다가 오게나.”
“예, 알겠습니다.”
유세현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좁아터진 마을이라 더 이상 둘러볼 것도 없었다.
추위 때문인지 그 흔한 동물하나도, 풀포기 하나도 없었기 때문.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덩그러니 놓여있는 집과 주민밖에 없었다.
“와...이런 곳에서 사람이 계속 살 수 있을까요. 선배?”
“보통은 불가능하겠지.”
만약 몬스터라는 존재가 식량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전부 아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와~누나! 누나! 그럼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면 가족하고 같이 지낼 수 있는 거네? 거긴 먹을 게 많으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니? 가족들은 여기에 있잖아?”
“아니야, 우리 엄마아빠는 다른 곳에 있어. 할아버지가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고 했어.”
“......”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세현을 포함한 일행의 표정이 일제히 경직되었다.
“혹시 여기서 엄마나 아빠가 먹을 거 구하러 나간사람?”
“나!”
“나두!”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 유세현은 무릎을 굽혀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형! 형도 이야기 해주게?”
“아, 그건 다음에. 그보다 형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응!”
“원래, 이 마을에 살았어?”
“응? 아니, 다른 데서 살았어!”
“혹시 다른데서 온 사람~”
“나!”
“나두 나두!”
“...지금 엄마 아빠가 사냥 나가 있는 사람?”
“나!”
사냥을 나가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른 마을에서 온 아이들의 부모님이었다.
함정, 그리고 키만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고기만큼은 부족할 일은 없을 터인데.
그날 저녁 그들은 키만에게 맛있는 비프스튜를 대접받았다.
* * *
“그 마을...대체 뭐였을까요?”
“글쎄, 뭐가 있다는 건 분명한데...노르페움에 도착하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그들은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나 노르페움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나침반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마력의 흔적을 찾아서 이동하면 되었기 때문.
-슈우욱.
그때였다. 계속 느껴지던 키만의 마력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잠깐, 스톱.”
유세현은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갔다. 또 다시 마력의 흔적이 느껴진다.
‘뭔가 걸려있군.’
마력이 퍼져나가는 것을 차단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듯 했다. 유세현은 그제야 나침반을 꺼내 살폈다. 정확히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등장하는 몬스터를 죽이고 또 죽이면서 계속 나아갔다.
지칠만도 하건데, 세 명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되려, 더 강한 강행군을 펼친다.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그들은 정말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유적을 클리어 한다면, 세간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이 세 명을 막지 못하리라.
이벨린은 스스로 더 강해져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저...”
“뭐죠?”
“가져간 제 무기를 돌려주실 수 있겠어요? 같이 싸울게요.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이강호가 피식 웃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녀가 강해지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간수하고 있던 레이피어를 건네자 이벨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절반쯤 다다랐을 때였다.
저 멀리서 새까만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보라도 그친 데다가 새하얀 벌판이었기에 상당히 거리였음에도 사물의 모습은 망막에 또렷이 들어와 박혔다.
실로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노르페움 왕국의 문양이에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접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법 강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상대는 깃발을 걸고 있는 왕국군.
그들에게도 개념이란 게 존재한다면 무작정 무기를 들이대지는 않을 것이리라.
“멈춰라! 나는 노르페움 왕국, 철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체르모프 폰 퓌레프다! 어디서 온 것이냐! 소속국가와 신분을 밝혀라!”
답은 이벨린에게 맡겼다.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저희는 여행자 입니다. 소속국가는 남부 벤트라산맥 너머에 있는 파이크란 왕국입니다.”
“파이크란?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말이냐?”
“예.”
“믿을 수 없다! 신분패를 보여라!”
체르모프가 언성을 지르자, 발디안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숭고한 철 기사단의 기사장이시여.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 험난한 눈보라에 파묻혀 방금 전 까지 조난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신분패도 그 난리 속에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다?”
“예, 그렇습니다.”
이벨린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자 체르모프가 그제야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충 잘려져 있는 예티의 가죽.
북부인과는 많이 다른 외모.
“확실히...그대들은 북부인이 아니로군.”
“예,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 도중이지?”
“노르페움의 수도로 향하던 도중 이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잘 몰라...”
“그렇군,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더 북상한 건가.”
“예.”
체르모프가 턱을 짚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입을 뗐다.
“흠...본래라면 우리가 인도 해줘야 하나, 아쉽게도 우리는 이 세상에 재앙을 불러일으킬 이교도의 처리를 명받은 상태다. 그러니 가는 길만 알려 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체르모프가 손짓을 하자 기사한명이 뛰어와 이벨린에게 길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유세현이 체르모프를 향해 물었다.
“숭고한 철기사단의 기사장이시여 한 가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이교도들을 처리하러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입니까? 저희가 오랜 시간 조난을 당해서...”
“흠...그렇군. 자네들은 모르겠군. 머지않아 악마가 강림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악마...말씀입니까?”
“그렇다. 일개 여행자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지. 우리는 바빠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예. 정말 감사했습니다.”
체르모프가 몸을 돌렸다. 유세현 또한 뭔가의 찜찜함을 뒤로한 채 한걸음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뿌웅! 뿌우우웅!
난데없이 뿔피리가 울렸다.
-투두두두!
땅도 매섭게 진동했다.
엄청난 수의 무엇인가가 이곳을 향해 빠르게 돌진해오고 있었다.
<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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