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1) >
좌표 지정 공간 마법.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가 이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준이 너무 높아, 5서클의 궁정 마법사 정도는 되야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
스킬 코인으로 인해 뇌를 불사르는 노력 없이 마법을 익힐 수 있게 되었지만, 입수 난이도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아 얻은 자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윽고 빗발치던 뇌전의 줄기가 멈췄다.
-스스스.
불타 없어진 머리카락. 녹아내린 철제 갑옷.
제대로 직격당한 첼룬의 전신은 온통 새까맣기 그지없었지만 그럼에도 두 다리 만큼은 지면을 굳게 딛고 서 있었다.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진다.
버텨냈다고 생각한 것!
이렇게 되면 곧바로 반격이 시작될 터다.
“......”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첼룬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것이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휘이잉.
세찬 바람이 불었다. 손끝을 시작으로 첼룬의 육신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은 당연지사.
“어, 어떻게 첼룬 경이 단 일격에...”
-투득 탁.
병장기와 코인이 땅으로 떨어지자 유세현이 알폰스를 향해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알폰스의 두 눈동자에는 흡사 사신을 본 것 마냥 공포라는 감정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너의 패배다. 알폰스.”
“자, 잠깐 기달려라! 사, 살려줘! 살려준다면 돌아가서 어떤 보상도...”
-서걱.
알폰스가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선혈이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코인을 흡수한 유세현은 차분히 전리품을 살폈다.
레어 C랭크의 롱소드와 레어 B랭크의 바스타드소드.
상세 정보를 보니 던전을 클리어하고 얻은 것이 아닌, 마석을 끌어 모아 제작 한 것이었다.
놈들에게는 과분한 무기.
유세현은 루베르크에게 바스타드소드를 먹였다.
그사이 필립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전멸 때문일까?
상부에서 퇴각명령이 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 문을 열어라! 필립 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
-끼이익.
볼프강 가(家)의 영지, 펠페모아로 향하는 성문의 입구가 열리자 유세현을 포함한 7명은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일행들을 바라보는 경계병들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게 끝이라고?”
“에...에이 설마...”
무려 수천의 인원이 토벌을 나섰다. 그중에서 8명만 생존해 돌아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허나, 병사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팔, 다리 등 사지가 전부 잘린 남자를 보았기 때문.
“미, 미친...그렇다는 건 발렌 공자님도?”
“쉿. 입 다물어. 목 날아가기 싫으면.”
그들은 곧장 볼프강 가(家)의 저택으로 향했다. 입구에 선 필립이 카트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암살자를 든 그대로 저택 내부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곧 다시 나올 겁니다.”
필립의 말대로 카트린은 다시 저택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손에 무엇인가를 쥔 채.
리체와 유혜인의 노예문서였다.
필립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찢어 발겼다. 그러자 둘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쉬이익.
타들어가듯 서서히 사라지는 문양. 리체와 유혜인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잔잔히 떨렸다.
노예가 된 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던 것일까. 둘은 일부러 날짜를 세지 않았다.
세 봐야 어차피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한번 노예는 평생 노예였으니까.
“이것으로 이 둘은 자유입니다. 혜인아 지금까지 내 옆에서 고생 많았다.”
“...그, 그간 감사했습니다.”
유혜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권이 없던 그녀가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필립덕분이었다.
반면, 리체는.
쿨하게 몸을 돌렸다.
필립은 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앞으로는 오빠를 따라서 잘 살길 바란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찾아오고.”
필립이 유혜인을 향해 붉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모퉁이에는 볼프강 가(家)의 문양이 박혀져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세현 일행과 간단히 작별인사를 나눈 뒤 저택 내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분명 토벌 실패와 암살 및 발렌의 죽음 등으로 인해 처리해야 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 것이리라.
낙인이 사라진 게 어색한지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던 유혜인이 쑥스러운 표정이 되어 유세현을 응시했다.
마침내 입 밖으로 빠져나오는 한마디.
“그...고마워 오빠.”
현대에 있을 적에는 티격태격 싸우기만 했기에, 감사를 표하는 유혜인의 목소리는 무척 어색했다.
이에 유세현이 최대한 비꼬듯 말하며 딱밤을 갈겼다.
“야, 잘 알았으면 앞으로는 말이나 좀 잘 들어라. 예전처럼 말썽피우지 좀 말고 짜샤!”
“아야!”
유혜인은 이마를 부여 쥐었다. 유세현은 가만히 상태를 지켜봤다.
예전이었다면 진즉 길길이 날뛰었어야 정상이건만 반응이 없었다.
“알겠어?”
-딱.
그래서 그는 딱밤을 한대 더 날렸다.
“아, 그만해 오빠. 알았으니까.”
“알긴 뭘 알아?”
또 한대 더.
미안해하던 유혜인의 인상이 조금씩 돌변한다.
“아...진짜 그만해라...”
“얍!”
-딱.
“아! 진짜 그만 좀 하라고! 오빠 힘이 얼마나 센 줄은 알고 치는 거야? 그보다 예전에 내가 뭐? 난 예전에도 잘했어!”
단번에 올라가는 언성.
유세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하기는 무슨. 분명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수학여행만 다녀오면 컴퓨터가 망가져 있지 않나. 아빠 지갑 건드리다 걸린 걸 나한테 덮어씌우질 않나.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아! 그건 또 언제 적 얘기야! 초딩 때잖아 초딩 때!”
기어코 유혜인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김주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유세현이 이러한 짓을 하는 이유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아니, 당하고 있는 유혜인 본인만을 제외하고 이미 전부가 알고 있다.
‘오빠와 동생이라...’
티격태격 하면서도 은근히 챙겨 주는 느낌.
자신에게도 오빠가 있었더라면 저랬었을까?
김주희는 지금 이 순간 유혜인이 살짝 부러웠다.
그 후 일행은 여관을 잡았다.
지급하기로 약속했었던 마석꾸러미를 올려놓자, 유혜인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오, 오빠 이 정도로 부자였어? 그럼 혹시 개인 주택도 있는 거야?”
속사포처럼 질문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대다수는 생계에 관한 것이었다.
“와...그럼 당분간은 괜찮겠다. 돈 떨어져서 사냥 나가야 될 때가 되면 열심히 할게.”
유세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본디 살기 위해 전투를 하는 것이지, 전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유혜인은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을 봐오고, 물품을 사고, 사람들 속에 뒤섞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아니, 우리는 곧 다른 지역으로 떠날 거야.”
“어? 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알았어. 나도 열심히 할게.”
유혜인은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유세현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
이때, 유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우리랑 같이 안가.”
“...뭐?”
“수준이 안 맞아.”
유혜인은 말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럼 난 어떻게...”
“신뢰 있는 사람이 있어. 내일 내가 일러주는 장소로 찾아가서 이름을 대. 그럼 어떤 여자가 마중 나올 거야. 그 여자와 팀을 이루면 돼. 아마...힘들겠지만. 넌 드세니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세현이 어깨를 툭툭 치자 유혜인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힘든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으니까.
지금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었다.
기껏 자유를 되찾았는데,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 되다니.
“언제 돌아오는데?”
“몰라. 얼마나 걸릴지.”
“...알았어. 거기 가 있으면 되는 거지?”
“응.”
이것으로 유혜인과의 대화는 막을 내렸다. 그러자 보따리를 집어 든 리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봤으니 가보겠다는 것. 유혜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오빠, 혹시 괜찮으면 리체 언니도...”
그때 이강호가 툭 말을 잘랐다.
“리체 케머런,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
리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남동생이 죽었다. 발렌도 스스로 참수했다.
친했던 유혜인도 갈 곳이 정해진 지금, 그녀의 주위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공허한 마음뿐이었다.
이제 자신은 뭘 해야 되지?
“혹시, 마땅한 생각이 없다면 제안이 하나있는데. 어때? 들어보겠나?”
“...해보세요.”
“혜인이를 따라가 보는 게 어떻겠나? 물론, 아까 말한 대로 힘들 거야.”
“...혜인이의 방금 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괜찮...”
“난, 쓸데없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다.”
“...강해질 수 있는 거죠?”
“그래. 그건 내가 보장하지.”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리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유혜인이 쪼르륵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이들.
그들은 곧바로 정비에 들어갔다.
-끼긱 끼긱.
하나둘씩 갑주를 벗기 시작하자 이제는 걸레쪼가리가 된 장비들이 바닥을 가득 메운다. 유혜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는 필립 가에서 지급을 받아온 턱에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는 직접 장비를 장만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돈을...달라고 해야 되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솨아악.
고철이 된 장비를 양옆으로 밀어버린 유세현과 김주희가 포켓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속에서 튀어나와 나열되기 시작하는 여러 가지의 장비들.
검부터 시작하여 없는 것이 없다.
“오빠...압축 포켓도 가지고 있었어?”
“응. 와서 대충 골라봐. 리체씨도 오세요.”
방어구의 모양은 비슷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발레크그 가(家)나 암살자들을 죽이고 손에 넣은 물건이었으니까.
“혜인아 너 그런데 네가 가지고 있는 검. 등급이 어떻게 되냐?”
“어...어? 매직 A랭크...”
본래는 더 좋았지만 노예로 팔리게 되면서 전부 빼앗긴 것이다.
유세현은 눈대중으로 검의 크기와 모양을 파악했다.
“너, 이거 써봐.”
유세현은 이번에 얻은 롱소드를 내밀었다. 정보를 확인한 유혜인이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등급이 무려 레어 C랭크였기 때문.
“오, 오빠. 이, 이거...”
“왜? 검신이 좀 더 길어져서 살짝 불편하려나? 그냥 적응해. 등급은 높은 게 좋아.”
“아...어...그러니깐 차라리 오빠가 쓰는 게...”
“내건 더 좋아. 그러니 그냥 써.”
루베르크의 등급은 현재 레어 A랭크였다.
앞으로 4단계만 더 올리면 유니크 등급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
“그, 그럼 잘 쓸게 오빠.”
“그려, 리체씨도 맘에 드는 게 있으면 고르세요.”
“고맙게 잘 쓸게요.”
그들은 장비를 전부 갖춘 뒤에야, 휴식을 취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눕는 침대.
딱 5인실이었기에, 침대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배치되어 있었다.
유세현의 옆 침대에 누워있던 유혜인이 눈동자만 굴려 그를 살짝 흘겨봤다.
“왜, 할 말 있냐?”
“...음...”
“뭔데? 뜸들이지 말고 말해. 곧 잘거라 지금밖에 시간 없으니깐.”
“어...그게 있잖아. 오빠...”
“어. 말해봐.”
“그...내가 언제 이곳에 왔는지는 알고 있지?”
“응.”
“그런데, 튜토리얼에서 깨어났을 때 부모님은 없었거든. 난 거의 죽을 뻔 한 상태였고...”
유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유세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상태.
재빨리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유세현이 피식 웃어보였다.
“아, 엄마 아빠? 괜찮으셔.”
“저, 정말?”
“응. 엄마는 애초부터 크게 안 다치셨고, 아빠가 좀 위독했는데...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괜찮아지셨어. 후유증도 별로 없고.”
“아...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제발 이곳에만 안 끌려 오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
유혜인의 입가가 잔잔히 떨렸다. 눈망울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황급히 팔로 눈가를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진짜 안 끌려 오셨으면 좋겠다.”
“......”
그 후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강호가 저 편에서 씁쓸한 표정이 되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 황성(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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