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렌의 최후 >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흐른다.
“오빠...”
“고생했다. 잠시 앉아 있어.”
유세현이 발렌을 향해 지긋이 고개를 돌렸다. 발렌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세현이 누군지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오빠라고? 노예 따위가 무슨 개소리를...”
중얼거리던 발렌의 말꼬리가 순간적으로 길게 늘어졌다. 필립의 눈동자에도 당황이라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공간이 일순간 꽁꽁 얼어붙은 느낌.
그것을 깬 것은 발렌의 광소였다.
“큭! 크큭. 크크크...크하하하!”
“......”
“천민! 네가 저 계집의 오빠라고? 크하하하! 어쩐지 보는 눈이 이상하더라니! 그나저나 어떻게 위에서 나타난 거냐!”
발렌이 상공을 흘겼다.
유세현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큭...쓰레기가! 전부 죽여 버려!”
암살자들이 일제히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방금 전이야 먼지 덕에 우연히 회피가 가능했겠지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진 이상 피할 수 없다. 또한 만약 피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럴시 유혜인이 찔린다.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검이 들어갈 것을 확신했다.
허나.
착 가라 앉은 두 눈과 마주치기 무섭게 움직임이 멈춘다.
암살자들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흉폭한 괴물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게 뭔...”
공포가 감돌았다.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적과 조우했을 때의 느낌.
-슈우욱
-서걱
단 한 번의 일격.
그것만으로 정면에 서 있던 5명의 목이 날라 갔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왜 공격을...”
유세현이 지긋이 시선을 돌리자, 암흑투기를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던 발렌의 입이 굳게 닫혔다.
더 나아가 자동적으로 고개가 푹 숙여지고 숨이 턱 막혀온다.
그사이 암살자들은 별저항도 하지 못한 채 차례차례 죽어나가고 있었다.
발렌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강한 암살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니 너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보다 이 힘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상태파악의 이유로 전장으로 달려온 베크릭의 눈동자 또한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지금쯤 사태가 다 끝났을 줄 알았건만, 대체 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아무쪼록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잽싸게 복면을 착용한 베크릭이 돌격 하려던 순간이었다.
-푹.
등 뒤에서 커다란 세 개의 날이 갑작스레 몸을 뚫고나왔다. 곧이어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당신은 빠져.”
“크...큭...뭔...”
심장을 관통하는 치명상.
베크릭은 어떻게든 날을 빼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힘만 점점 빠져나갈 뿐이었다.
이윽고, 김주희가 창을 있는 힘껏 비틀자 피가 터져나오며 육신이 축 늘어졌다.
지면으로 떨어지는 코인.
계획을 세워 암살을 주도한 암살단의 수령 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새 주변 모든 암살자들을 정리한 유세현이 발렌을 향해 검을 겨눴다.
발렌의 눈동자가 애타게 필립을 향했다.
마치 살려달라는 듯.
“유, 유세현! 그 검을 잠시 멈춰 주거라!”
“......”
-턱.
그 말에 검이 딱 발렌의 목 끝에서 멈춰 선다. 유세현의 눈이 살며시 필립을 향했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저택에서 때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
“이자를 살려주고 싶다는 겁니까? 목숨을 노렸는데?”
“...그래도 나의 가족이네.”
필립이 마지못해 말하자, 발렌의 눈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유혜인의 신분은 노예. 목숨이 노려졌던 유세현은 발렌을 단죄할 수 있으나, 필립의 말을 무시했을 때 유혜인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유세현이 몸을 굽혀 필립과 눈높이를 맞췄다.
“아뇨, 저자는 당신의 가족이 아닙니다. 가족은 가족을 노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혈육임에는 틀림없네. 부탁하네, 처벌은 확실히 할 테니 부디 여기서 끝내 주게.”
필립의 눈은 어느새 확고해져 있었다.
유세현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흠...좋습니다. 필립 공자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손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말해 보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문의 이름을 걸고 들어 주겠네.”
“제 여동생 유혜인과 리체 케머런을 해방시켜주십쇼. 지금 현 시간부로.”
“...리체 케머런? 아니, 그보다 그 정도로 정말 괜찮은 건가?”
“예.”
“아,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협상은 순식간에 성립되었다.
물론, 노예문서를 파기해야 됐으니 아직까지는 구두계약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혜인과 리체는 평민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유세현이 발렌을 응시했다. 발렌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나중을 기대하라는 듯.
유세현은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머지않아...
-키아아악!
암살자를 상대하던 다수의 병사들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괴상한 행동에 펠무드를 상대하고 있던 카트린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의 이목이 순간적으로 집중되었다.
동료병사가 황급히 어깨를 흔들었다.
“야! 체르프 갑자기 왜 그러는 거...크아악!”
허나 돌아오는 것은 시퍼런 칼날.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병사들의 외관이 빠르게 변화해 나갔다. 얼굴 피부가 뭉그러지고, 착용하고 있는 철제 방어구의 안에서 촉수가 삐져나온다.
“이, 이게 대체...”
투두두두-
당황할 틈도 없이 땅이 세차게 울렸다. 무수히 많은 대군이 돌격할 때나 일어나는 발소리.
협곡 내부에서 흙먼지가 밀려왔다.
암살자와 병사들은 그 기이한 현상에 전투를 잠시 중단했다. 아니, 되려 협공을 펼쳐야만 했다.
괴물처럼 변모한 병사는 스텟이 증가했는지 좀 더 강했다.
“미친!”
사방에서 오만 욕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인가.
허나, 벼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점점 커지던 발소리는 어느새 근처까지 다다라있었다.
이윽고 양 옆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무수히 많은 알비론들.
그간 상대했던 블러드울프와는 차원이 다른 흉악스러운 모습에 사람들은 경기를 일으켰다.
“어어어...”
자르고 토막내고, 알비론들은 학살을 자행했다.
허나, 그 숨을 완전히 끊어놓지는 않았다.
사지만은 잘라 움직임을 봉쇄할 뿐이다.
이빨로 몸을 문 몇몇의 알비론들이 재차 협곡 내부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단번에 깨달았다.
대응할 무기를 잃는 순간, 죽음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꺼져라 이 새끼들!”
사람들의 거친 공격이 폭풍같이 몰아친다. 허나, 정말 안타깝게도 스텟의 차가 너무도 컸다.
“카트린!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큭!”
펠무드와 카트린도 달려드는 알비론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유세현은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승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유 용병길드와 대형 길드도 습격을 당하고 있을 터.
“필립공자님. 이곳을 빠져나가야 됩니다. 이건 승산이 없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이...”
“어쩔 수 없습니다. 놈들의 수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
말을 끝낼 새도 없이 알비론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유세현은 잽싸게 검을 휘둘러 목을 날렸다. 그러자 다수의 알비론들이 그들이 있는 장소를 바라봤다.
드디어 찾아냈다는 듯이.
‘쳇! 들켰군.’
알베타스는 그간 집요하게 그들을 쫓았다. 그리고 재수 없게도 근처에서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졌다.
늦게 도착한 것도 그 이유.
물론, 그만큼 고생한 성과는 있었다. 힘과 민첩 스텟이 장난 아니게 올라간 것.
또한 이전에 비해서 다수의 시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유세현이 풀숲 저편을 바라봤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구울들이 괴성을 지르며 전장으로 난입했다.
“컥!”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이 줄지었다. 지금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벅찬데 괴물이 더 추가 되다니!
유세현은 다급한 것처럼 연기했다.
“혜인아 너도 일어서! 바로 움직여야 돼.”
“아, 알았어. 오빠.”
자리에서 일어난 유혜인이 재빨리 검을 회수했다.
“선배님!”
그때, 김주희와 이강호가 알비론들을 뚫으며 나타났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아직 카트린 경이!”
“강호야!”
“알았어!”
이강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비론 틈으로 뛰어들었다. 유세현은 몸을 돌렸다.
“카트린 경은 제 동료가 데려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쪽으로!”
발렌과 필립, 유세현과 유혜인, 리체와 김주희.
총 6명은 풀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전장과 조금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유세현은 남겨 두었던 구울들을 움직였다.
-캬아악!
“크윽!”
구울들은 집요하게 유세현과 발렌, 리체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서히 갈라지는 그룹.
그 순간 유세현과 김주희의 두 눈이 교차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주희가 구울을 베며 필립과 유혜인을 이끌었다.
“필립공자님!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되요! 저쪽도 알아서 뚫을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 같이!”
“너무 벌어졌어요! 지금 못 빠져나가면 당해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
필립은 김주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필립이 저편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다.
-크르르.
맹렬하게 날뛰던 알비론이 움직임을 일제히 멈췄다.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던 발렌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리체도 살짝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유세현은 발렌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딱
이번에는 알비론들이 서서히 물러난다.
발렌의 턱이 살짝 벌어졌다.
“네, 네놈 설마 지금까지 이놈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거냐!”
“그렇다면?”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럴 심산으로 구울을 멈췄다.
유세현이 검을 치켜세웠다. 발렌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우습게도 그의 검이 향한 곳은 발렌이 아닌 한 마리의 구울이었다.
-털썩
목을 잃은 구울이 털썩 쓰러졌다.
영문 모를 행동에 쓰러져 있는 구울을 슬쩍 흘겨본 발렌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현재 그의 뇌리 속에는 벼락이 내려치고 있었다.
‘코인을 뱉지 않는다!’
그는 이런 몬스터를 조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위치에 쳐했을 때 유세현을 만났다.
‘서, 설마!’
근사한 식사요구와 노예로 잡혀있던 여동생.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퍼즐이 맞춰져 나갔다.
“다...알고 일부러 접근한 거냐?”
“눈치채줘서 고맙군.”
“이 새끼가...”
유세현에게 상대방을 가지고 노는 악취미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이전 발렌이 그의 눈앞에서 한 악질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유세현은 그날이 잊혀 지지 않았다.
동생이 언어로 희롱당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날이.
발렌이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외쳤다.
“리체! 당장 저놈을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년의 남동생은...”
“내 동생은 당신이 도망쳐온 전장 속에 있어. 아직 살아있을까?”
“크크크! 저놈이 이 괴물들을 조종하는 거라면 당연히 살아...”
“아니, 내가 들은 바로는 그 괴물은 진짜야. 그렇죠?”
리체가 유세현을 응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그놈들은 진짜야. 그래서 코인도 떨어뜨리지.”
“......”
발렌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틈을 노려 도망친다. 그리고 어떻게든 형 필립에게 이 사실을 알려 놈들을 처리한다.
헌데, 그때였다.
“넌...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언어에도 힘이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발렌은 또다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유세현이 리체를 바라봤다. 그녀가 검을 치켜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것은 이강호가 그녀에게 한 약속이었다.
“크...큭. 리, 리체...너마저도 나를...내, 내가...얼마나 널 신경 써줬...”
“...난,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
“......”
발렌은 확실히 물질적으로 리체에게 잘해줬다. 만약, 그가 인간적으로 리체를 대해줬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는 한 사람으로서 그를 섬길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삐뚤어진 마음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고, 동생을 이용한 협박과 강제적인 잠자리 강요는 그녀의 마음을 좀 먹었다.
-서걱
리체의 검이 발렌의 목을 일격에 갈랐다.
지면을 뒹굴고 있는 발렌은 사뭇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인을 흡수하고 마력을 읽은 유세현의 시선이 저편으로 향했다. 거대한 마력을 지닌 자가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결국 올게 왔군.’
병력이 어찌나 많은지 이강호가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유세현은 시체 앞에 떨어져 있는 목걸이를 재빨리 주웠다.
기억의 펜던트.
에픽 등급의 아이템으로 유적을 열어줄 열쇠.
마침내 손에 넣은 것이다.
“이 앞으로가면 주희가 있을 겁니다. 합류해 있으세요!”
“당신은?”
리체가 되물었으나 유세현은 이미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
< 발렌의 최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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