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배자들의 마을(2) >
그는 현재 아르카드 제국군도 한통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악감정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다.
무수한 역사 속을 들여다봐도 법이란 것은 줄곧 힘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세현이 봤을 때 실버어레스트라는 노예상 길드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더 나아가 이 일대를 주름잡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현대에서 흔히 말하는 대기업이었다. 사람들을 사고팔아도 법적으로 문제없는 대기업.
그런 의미에서 위치를 알려준다 한들 아르카드 제국군이 과연 지부 내부를 무작정 수색할 수 있을까?
물론, 운이 좋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유 신분을 가지고 있는 생존자들은 실버어레스트에게 약간의 제제를 가함과 동시에 사람을 돌려받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우리가 이동할 때 그들이 기습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케빈을 포함한 사람들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래 맞다. 이곳은 힘이 전부인 세계.
“그때도 정중하게 물러나라고 요청할 생각이십니까?”
법이라는 울타리보다도 검이 먼저 목 끝에 닿아있다.
“그리고 아르카드 제국군들 또한 판매지부의 위치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모른 척 묵과하고 있다는 겁니까?”
“예.”
실버 어레스트 지부가 산속에 숨겨져 있다고 하나,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샅샅이 수색을 한다면 못 찾아낼 정도는 결코 아니다. 안전을 위해 주위를 탐색 한바가 분명 있을 테니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몰라도, 정규
군은 분명 이를 알고 있으리라.
만약, 주위 지형지물도 탐사하지 않았다면 아르카드 제국군은 정규군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엄청나게 막장인 것이다.
“하긴...”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논리정연한 말.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세현씨의 계획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 * *
“그동안 직접 나서 수색해 주신 것 생존자들을 대표하여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별 도움이 못 되 죄송합니다.”
케빈의 말에 30대 중년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씁쓸한 어조로 답했다. 칼닌 마을의 촌장 마커 렉스였다.
“그...케빈씨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식량도 얻을 겸 내일 다시 숲으로 들어가 수색해볼 생각입니다. 만약 이번에도 발견하지 못하면...”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자 마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이 몸을 돌렸다.
“그럼...수고하십쇼.”
이윽고 케빈이 저편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여태까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던 마커와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확 돌변했다.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며 조소를 머금는다.
“크크크, 들으셨죠? 내일 숲에 들어간답니다.”
“실버어레스트에게 곧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보다 200명이라니...이번에는 정말 대박이네요. 지금까지는 많아 봤자 20~30명 정도 뿐이라 정말 아쉬웠었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렇게만 계속 와준다면 금방 수도권내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말이죠.”
판매 지부가 근처에 자리 잡은 이후, 그들은 방문하는 여행자들을 실버어레스트에게 팔아 치우고 있었다. 실버어레스트에서 먼저 제안을 해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도권 내부로 어떻게든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
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마을은 비공식적으로 실버어레스트의 산하 길드 형식을 띄게 되었다. 그렇기에 문제가 될 것이 있다면 주둔하고 있는 아르카드 제국군일 터지만.
아쉽게도 지휘자는 진즉 부패하여, 귀족의 판매 대행을 자처하고 있었다.
짝.
“자 그럼 내일 쓸 마비가루나 구하러 가도록 합시다.”
“그러도록 하죠.”
촌장이 박수와 함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칼닌 마을 주위에는 마비 성분을 지닌 꽃이 있다. 그 꽃에서 추출한 마비가루는 호흡기를 통해 작용하게 되는데 마땅한 해독약이 없을시 D랭크 이하의 인원들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털썩.
그러한 연유로 수색을 하던 생존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 땅을 향해 고꾸라진다. 그렇게 모두가 쓰러지자, 줄곧 상황을 지켜보던 실버어레스트 패거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생존자들을 한명씩 들쳐 업기 시작했다.
매일 밥 먹듯 하던 일이라 그런지 의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모습.
마찬가지로 몸을 숨기고 있던 촌장, 마커가 책임자로 보이는 한 남성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남성은 들고 있던 보따리를 마커의 앞에 살며시 내려놨다.
내부를 살펴보는 마커의 눈이 탐욕으로 물든다.
그 안에는 그들이 좀처럼 얻을 수없는 마석이 상당량 들어있었다.
“후후...무게를 보니 틀림없는 것 같군요. 매번 감사합니다.”
보따리를 든 마커는 이내 숲의 그림자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췄다.
책임자가 몸을 획 돌렸다.
“자, 우리도 이동한다.”
실버어레스트 인원들은 산을 오르기 위해 발을 떼었다. 허나, 그런 그들의 행보는 몇 걸음 이어지지 못했다.
트드드득!
쿵!
진흙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골렘이 앞을 막아섰기 때문. 인원들의 입에서 당혹섞인 말이 터져 나왔다.
“헉? 저, 저게 무슨 괴물...”
“고, 골렘! 왜 이놈이 이런 곳에!”
판도라의 골렘은 최약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C랭크 이상이다. 즉 D랭크인 그들이 상대할 방법은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판도라의 골렘의 한에서다.
눈앞에 있는 것은 유세현이 이전 튜토리얼에서 얻은 아이템으로 제조한 골렘.
실제로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120명 가량 되는 그들의 시선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조장님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컥!”
인원 한명의 입에서 갑작스레 비음이 터져 나왔다. 살갗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피.
고개를 내려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인원의 가슴에는 검 하나가 푹 튀어나와 있었다. 들쳐 업고 있었기에 뒤에서 찌르는 것을 미처 방비하지 못한 것.
“이, 이게 무슨...분명 마비가 됐을...”
툭.
한 명이 땅을 뒹구는 것을 시작으로 암습을 당한 인원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져 나간다.
초인적인 체력 때문에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심장을 관통당한 덕에 상당한 치명상을 입은 상황.
생존자들은 그들이 정신을 차릴 여지를 주지 않고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피분수가 터져나오고, 목이 떨어져나가 지면을 구른다.
적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데 성공한 케빈이 다가왔다.
“정말 세현씨 말처럼 딱 맞아떨어졌네요. 마비가루라니...”
케빈은 슬쩍 띄워 주었지만, 유세현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조금만 생각한다면 대부분이 도달 할 수 있는, 별 특별하지 않는 그런 추론이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실종 때 전투가 잃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 게 당했다는 말이 되는데 누가 생각하지 못하랴.
수면가루 혹은 마비약, 환각제.
도출되는 결론은 무척 단순하다.
다만, 생존자들은 대처할 방법이 없었고. 유세현은 있었을 뿐이다.
나쁜 성분의 통과를 막는 쉴드라는 스킬을 이용해서. 물론, 5명 정도는 확인을 위해 진짜로 당했지만.
“바로, 다음 작전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전 일러드렸던 장소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생존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유세현은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취를 완전히 감췄을 때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언데드 레이즈.’
손에서 뻗어나가는 어둠의 마력이 생명이 빠져나간 그들에게 움직일 힘을 부여한다. 120명의 인원들은 사지가 찢겨나간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세현은 잔여마력을 살폈다.
효율이 좋아지고, 대상의 체적이 작아서 그런지 아직도 상당한 양의 마력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숙련도를 올려놓기 위해 억지로 쓴 것이라면, 이제는 어느 정도 활용이 가능해진 것.
유세현은 언제드 레이즈의 숙련도를 살폈다.
이전 몰살시켰던 실버어레스트 인원들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계속 반복해서 단 기간 만에 30%가 올라 무려 95%에 육박해있다.
“좋아 우리도 이동하자.”
유세현의 말에 대군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실버어레스트의 판매 지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여성의 앞에는 남성 한명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잔잔히 떨리는 남성의 어깨를 본 여자가 입을 열었다.
“필스. 루벤 산맥으로 수송하러 간 놈들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그, 그게...지금 수색조를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결과를 보고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우리 애들을 죽인 새내기 놈들은? 잡았어?”
“그, 그것도 지금 수색에 있습니다. 탐색에 능한 인원을 투입했으니 내일 정도면 그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스.”
안 그래도 점점 낮아지던 여성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필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나랑 말장난 하자는 거야 뭐야? 잘해주니까 이제는 내가 만만해보여?”
“아,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럼, 왜 일을 이따구로 밖에 처리하지 못하지? 그렇게 무능력한 남자였나? 수색?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쾅!
주먹에 가격당한 나무테이블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필스는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닙니다! 이틀. 이틀 내에 반드시 잡아오겠습니다.”
“그래...그래야지. 난 무능력한 남자를 제일 싫어해. D랭크에 불과한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 항상 생각하길 바라. 알겠어?”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가봐.”
필스는 이내 방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줄곧 여자의 옆에 서있던 남자가 말했다.
“기강이 흐트러졌군. 나였으면 죽였을 것이다.”
“호호호. 고객님께 못 볼꼴을 보여드렸네요. 저래보여도 일단은 제법 유능한 남자라 죽일 수는 없답니다. 그보다 이번에도 200명 전부 사가시겠다는 거 사실인가요? 각인도 새기지 않고?”
“그렇다.”
엄숙한 어조로 대답하는 남자는 체인갑옷을 입고 있는 여성과는 달리 별다른 방어력이 없는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이에 판매지부의 지부장, 레칼스 필렌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자신의 이름 조차도 알려주지 않은 이 무명의 무사는, 아니 무림인은 간혹 이렇게 대량의 노예를 사가곤 했다.
세간하고 인연이 끊은 그들이 무슨 이유로 노예가 필요한 것인지.
아무쪼록 특 VIP고객의 정보는 묻지 않는 것이 예의.
“후후. 이틀만 기다리시면 잘 포장해서 배송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묵묵히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 * *
한편 칼닌 마을의 촌장, 마커는 거래 이후 이틀간 엄청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마석은 이미 실버어레스트에게 빼앗긴지 오래였으며, 더 나아가 책임을 지고 수색하라는 통보까지 받은 상황.
마음 같아서는 아르카드 제국군에게 수색을 맡기고 싶었으나 말려들기 싫었던 지휘관은 이를 거절했고, 덕분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
“마커씨 분명히 잘 넘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잘 넘겼어요! 넘겼다고요! 쓰러진 것까지도 봤고 분명 인계도 잘 했습니다!”
자연스레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덤. 마을 주민 한명이 혀를 찼다.
“이미 멀리 도망쳤을 텐데 이제 와서 우리보고 수색하라고 해봤자...”
“에효,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런데 이놈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요. 치명상을 입었을 거래나 뭐래나...우리보다도 조금 더 강한 주제에!”
“후우...이제 와서 왈가왈부 해봤자 달라질건 없습니다. 그러니 잠자코 수색이나 합시다. 우리에겐 그나마 추적 스킬을 익힌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도망친 흔적을 발견하면 보고하고 쫑 내도록 하죠.”
추적 스킬을 익힌 사람은 중국인 챠윙이었다. 흔적을 읽어가던 챠윙이 갑작스레 손을 턱 들었다.
“어? 무슨 일 있...”
입술에 검지를 붙인 차윙을 본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 장소는 마을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순간적으로 마수라고 판단한 일부가 병장기를 치켜세웠지만 챠윙은 그것까지도 제제했다.
이 뜻은.
스륵 스르륵.
앞에 위치한 물체가 움직임에 따라 풀숲이 흔들린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위를 살핀 마커의 입꼬리가 다분히 올라갔다.
새내기들이 열매를 한보따리 든 채 어딘가로 옮기고 있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놈들은 이 주위 지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한 것이리라.
“이제부턴 저 혼자 가겠습니다. 대기하고 있으세요.”
챠윙은 혼자 그들의 뒤를 쫓았고, 마침내 은신처를 발견했다. 은신처는 마을 주민들도 알고 있던 동굴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황급히 실버어레스트의 지부로 찾아간 주민들이 이를 보고하자, 엉뚱한 곳을 뒤지며 난항을 겪고 있던 필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희는 정말 할일 다했습니다. 이번에도 딴소리 하시면 안돼요. 그리고 놈들을 잡거든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저희가 틀리지 않았다면 약속대로...”
“알겠습니다. 추후 지급해 드리도록 하죠.”
딜에 성공한 마커는 기쁜 표정이 되어 인원들과 함께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이 꼬였긴 하나 마석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던 상관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분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산의 중턱쯤 이르렀을 때, 엄청난 압박감이 그들의 육신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
“커...컥!”
“뭐, 뭐야 이건...”
무릎을 털썩 꿇은 마커가 손으로 땅을 짚은 채 헛구역질을 토해냈다. 질질 흐르고 있는 침의 너머로는 땅을 굳건히 딛고 있는 부츠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 패배자들의 마을(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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