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상 실버어레스트(3) >
‘이, 이 새끼 뭔 힘이!’
갑작스런 기습 때문에 당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힘이 장난이 아니다. 적어도 D랭크 40%인 자신의 이상.
분명히 새내기들이라고 보고를 받았었는데.
전문 협박범과도 같은 말에 라펠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깜빡였다. 보통이라면 스킬을 사용해 상황을 역전시켜보려 했겠지만 자세도 마땅치 않을 뿐더러 수작을 부리기에는 삼지창이 너무도 목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며 틈을 보는 게 나으리라.
“다시 묻겠다. 여기 있는 장부가 전부냐?”
“그, 그렇다.”
“상품이 팔려간 장소를 왜 기재하지 않았지?”
“그, 그런 건 우리 쪽에서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린 고작 해봐야...”
라펠의 지부는 상품 공급용 지부. 판매 지부는 다른 장소에 따로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유세현은 아쉬움을 뒤로했다.
이 도적에게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기 때문.
이를테면.
“그렇군. 그래서 그 지부는 어디에 있지?”
“뭐? 그, 그건...”
당황으로 인해 라펠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문맥상 표면에 들어나 있는 길드의 위치가 아닌, 음지에서 활동하는 지부의 위치를 묻는 것일 터인데 이는 상당히 높은 기밀에 속해있는 탓이다.
발설했다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된다.
‘제, 젠장 어떻게 해야...“
“3초 내에 대답해라.”
유세현은 헛수작을 부릴 틈을 주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라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렇게 1초에 다다른 순간.
“아, 아! 카, 칼닌마을 근처에 있다!”
“칼닌마을 근처?”
“그, 그렇다!”
“그렇군...지도 가지고 있겠지?”
유세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했다. 라펠은 그가 새내기인지 아닌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새내기라면 칼닌마을을 모를 터인데!
정말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있다. 저기 서랍 안에.”
유세현이 고개를 까딱이자, 김주희가 재빨리 달려가 서랍을 뒤져 지도를 가지고 왔다. 지도에는 아르카드제국이 개척한 장소의 지형지물만 대략적으로 명시되어 있을 뿐 자잘한 마을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유세현은 라펠에게 깃펜을 쥐어주었다.
“위치를 찍어라.”
“카, 칼닌마을 근처라고 분명 내가 얘기 했...”
“내가 그 근처를 다 뒤져야 되나?”
‘큭!’
논리 정변한 말에 라펠은 어쩔 수 없이 지도에 점 하나를 찍었다. 명실상부한 판매 지부의 위치였다.
‘젠장...이제는 어떻게든 죽여야 된다.’
혹은 도망자가 되거나.
“다른 지부의 위치도 찍어라.”
“모, 모른다. 공급 지부는 판매지부의 위치 한개 만 알게 되어 있다.”
유세현이 라펠의 눈동자를 살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잡을만한 꼬투리도 딱히 없었다.
“허튼짓 하지마라.”
유세현은 그 말을 끝으로 장부를 차분히 읽어나갔다. 만약, 목록에서 자신이 찾는 사람이 있다면, 판매지부를 알아내서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건너뛰면 되니 수확은 제법 되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리체 케머런이라...’
에반 비텔스바흐, 남궁 시영, 그리고 이벨린 발디안을 포함하여 이강호의 동료였던 여자.
이강호는 그녀가 신물로 향하는 특수한 키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키를 추후 누군가에게 빼앗긴다고 한다.
그녀를 제일먼저 타겟으로 잡은 이유.
본래라면 이강호가 회귀한 만큼,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터였지만, 리체라는 여자는 평소 자신의 과거를 죽어도 밝히기 싫어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정보의 수집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이강호가 따로 조사해 알아낸 것이라고는 무슨 연유로 인해 노예 신분이 되었다는 것 뿐.
유세현은 빠르게 명단을 읽어내려 갔다.
허나, 안타깝게도 원하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단 그 대신에.
“어?”
여태까지 덤덤한 모습을 보이던 유세현의 눈가가 책장을 넘기기 무섭게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름 하나가 너무도 또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유혜인]
‘설마...설마?“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특징을 읽어나갔다.
신장 약 163cm. 약간 마른 체형.
초반부만 읽었음에도 유세현은 동요를 금치 못했다.
자신의 동생의 특징과 너무도 일치하니까.
왼쪽 눈꼬리 끝에 애교점까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유세현의 인상이 확 돌변했다.
암흑투기가 공간을 짓누르고 살기가 주위를 잠식한다.
“이거 몇 년 전의 장부지?”
“야, 약 2~3년...그, 그런데 왜...”
숨이 턱 막히자 라펠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외쳤다. 유세현은 라펠의 목을 쥐어 잡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펌프질하며 피가 끓어오른다.
“너...내 동생 건드렸냐?”
“도, 동생?”
라펠로서는 영문 모를 말이었다.
동생을 건드렸냐니? 자신은 당한 것밖에 없지 않는가.
“무, 무슨 소린지...”
“3년 전 이곳에 잡혀온 유혜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자.”
유세현이 장부를 라펠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유혜인이라고 적힌 글귀가 또렷하게 보인다.
“얘, 얘가 네 동생이라고? 아니야 안 건드렸어 안 거드렸...”
라펠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물론, 예뻤다면 건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필을 보니 그녀의 스펙은 나이부터 시작해 상당히 괜찮았다. 만약 그때 더 눈에 띄는 여자가 없었다면...
“어디로...어디로 보낸거냐! 내 동생을!”
“아, 아까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우리는 공급만...커...컥!”
콰득.
힘을 더욱 가하자 관절이 비틀리며 라펠의 목이 기괴하게 꺾여 돌아갔다. 반격을 꾀하고 있던 라펠로서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
그제야 아차 한 유세현이 황급히 손을 놓자 그의 몸이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큭...”
아직 물어볼 정보가 제법 있었는데.
끓어오르는 분노를 미처 조절하지 못했다.
“서, 선배님...”
그 모습에 김주희까지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열을 낸 것을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유세현은 차분히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더욱 냉정해져야 된다.
“후...미안하다. 실수했네.”
“아, 아니에요...그보다 방금 전 말씀은...”
“내 동생이 이곳에 잡혀왔던 거 같아.”
“그, 그럼 이제 어떻게...”
“우선은 장부부터 마저 살피자.”
냉정을 되찾은 유세현은 나머지 장부에서 리체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부장은 죽어버렸지만, 아직 제법 강한 마력을 소지하고 있는 인원 2명이 남아있다.
“네, 네놈들은 뭐냐! 왜 지부장님의 방에서 나오는...”
서걱.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졸개들의 목이 떨어져나간다. 유세현은 빠르게 전진했다. 이제 건물이 부서지든 말든 상관이 없었으니 정도를 두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이 건물을 부숴버릴 생각이다.
뭔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도록.
“으아악!”
비명소리가 내부에 자욱이 울려 퍼지는 것을 유세현은 굳이 막지 않았다.
이렇게 한다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분명 알아서 다가와 줄 터다.
그렇게 잠시 뒤.
간수 둘은 유세현에게 기절한 상태로 붙잡혀 있었다. 철장에 잡혀있던 생존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여, 역시 유세현씨! 대단하십니다!”
“......”
유세현은 쓰윽 고개를 돌려 생존자들을 주시했다. 그러자 생존자들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꽉 다물어졌다.
푹 가라앉은 눈동자. 뭔가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다른, 무척 흉흉한 분위기가 유세현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느낌.
“저, 유세현씨. 저희 좀 도와주실 수...”
한 명이 애써 말을 꺼내자, 유세현은 간수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그들을 해방했다.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안 좋은 것이고, 해야 되는 것은 해야 되는 것이었으니까.
유세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말했다.
“한층 올라가시면 창고라고 써져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여러분들이 사용하시던 아이템이 보관되어 있으니 가서 착용하시면 됩니다.”
“아! 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존자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유세현은 곤히 기절한 두 명을 깨워 협박했다.
처음에는 두 명다 배째라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한명의 목이 떨어지자 태도가 급변했다.
지부장이 한 말을 토대로 정보를 더욱 캐낸 유세현이 툭 물었다.
“그래서, 판매 지부의 인원들은 이곳에 언제쯤 당도하지?”
“...예? 그게 무슨...”
“너희는 분명 타겟을 찾기 위해 계속 이곳에만 머물러 있는 다고 했다. 그렇다면 분명 운반하기 위해 누군가가 올 텐데? 아니면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가?”
“......”
간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단 한 마디로 이런 것까지 유추해 내다니, 어찌나 빨리 돌아가는 상황 판단력이란 말인가.
“아, 아닙니다. 좀 놀라서...거, 거리가 꽤 있으니 아무리 빨라도 5일은 지나야 당도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놈들의 스텟 능력치는?”
“그,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만 저희보다는 강할 가능성이...”
필사적으로 답하는 간수의 눈동자에는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다른 마을의 장소, 주민의 능력치 등 정보를 대강 얻은 유세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명 살려주신다고...”
“물론.”
유세현은 간수를 질질 끌고 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생존자 사이로 던졌다. 생존자들이 도끼눈으로 쳐다보자 간수는 당혹감에 잔뜩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분명 살려준다고 했지 않습니까!”
“나는 그랬지.”
“이, 이런 개자식이!”
언어적 유희. 혹은 농간.
분위기를 읽은 생존자들이 유세현을 향해 허락을 맡았다.
“저...죄송하지만 저희가 처리해도 되는 겁니까?”
“예.”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이런 개자식들이...으아아악!”
푹. 서걱. 콰직.
간수는 마땅한 반항도 해보지 못한 채 정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떨어져나간 목을 발로 뻥 차버린 한 남성이 유세현에게 다가왔다.
“세현씨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희는 당신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를 생각입니다.”
남성의 말에 모든 생존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유세현의 머릿속에는 과부하가 일었다.
본래라면 경유해야 되는 칼닌마을 보다도 델람마을로 이동하여 빠르게 아르카드 제국의 수도로 나아가야 된다.
허나, 그는 여동생 유혜인에 대한 추적의 끈을 차마 여기서 길게 늘어뜨릴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것에도 집중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공과 사.
친우와의 약속.
자신은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선배님 칼닌마을로 가시죠.”
이 고민을 해결 해준 것은 정말 신기하게도 김주희였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강호선배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기회가 온 것 같으면 잡으라고. 늦어도 된다고.”
“아니 이건 기회가...”
“아뇨, 이건 선배님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잡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기회.”
평소 김주희는 자신의 의견을 별로 말하지 않는다. 이강호나 유세현의 판단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
허나, 이번만큼은 그녀도 단호했다.
살짝 미소 지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강호 선배님은 분명 알아서 잘 하실 걸요? 원래 혼자 할 생각이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분명 이해하실 거예요.”
“......”
유세현은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래. 맞는 말이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이강호도 분명 이해해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말 소중한 친구니까.
마음을 정한 유세현이 김주희의 머리위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그래...네 말이 맞아. 그렇게 딱 말해 줘서 고맙다.”
“아, 아니에요 선배...”
김주희의 고개가 슬그머니 푹 숙여진다. 현재 그녀의 볼은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윽고 주변을 거닐던 유세현이 제 자리로 돌아와 칼닌 마을을 거쳐 아르카드 제국으로 향할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그렇군요. 칼닌마을이라...델람마을을 통하는게 아르카드제국에서 훨씬 더 가까워 보입니다만...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예.”
유세현은 덜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추측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델람 마을보다도 칼닌 마을에 지부를 세운 것은 분명 이런 이유도 속해 있을 테니까.
“그럼 곧바로 이동하실 겁니까?”
“아뇨, 우리는 아직 끝마쳐야 될 일이 있습니다.”
“예? 일이요?”
“예. 그러니 먼저 출발해주시기 바랍니다. 늦지 않게 뒤따라가겠습니다.”
“...흠.”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생존자들은 같이 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허나, 이곳은 판도라.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해야 되는 이곳에서 의존하는 모습만 보인다면 추후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칼닌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생존자들은 떠나갔다. 유세현은 곧바로 지부를 샅샅이 뒤져 도움이 될 아이템들을 챙겼다.
지부장이 신고 있던 매직 SS랭크의 부츠.
간수가 차고 있던 매직 S랭크의 견갑.
허나, 전리품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지부를 박살낸 둘은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노예들을 수송하러온 200명의 인원들을 덮쳤는데, D랭크 25~30%정도의 그들이 두 사람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 노예상 실버어레스트(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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