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20화 (120/612)

< 노예상 실버어레스트(1) >

도적. 이 단어는 본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을 일컫는다.

허나, 유세현이 지금 언급한 도적은 이것과는 의미가 좀 남달랐다.

인간진형에서 유일한 국가 형태를 띠고 있는 아르카드 제국.

본래 수많은 왕국과 공국을 거느리고 있던 이 나라는 봉건사회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신분제도가 존재했다.

노예, 평민, 귀족, 왕.

이 와중 호위 기사가 없던 노예나 평민은 튜토리얼과 구름섬을 거치면서 무척 강해지게 되었는데, 판도라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르카드 제국 및 휘하 왕국은 노예였던 이들을 평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는 등의 대책을 보였다.

그 결과는 노예 신분의 부재.

물론 처음에는 땅을 꾸리거나, 성벽을 세우는 등 생존하기에도 급급했기에 배부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허나, 아르카드 제국이 판도라로 넘어 온지도 어느 덧 5년.

안정화가 제법 진행된 지금 사리사욕에 눈을 뜨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리라.

그들은 다시 노예를 가지고 싶어 했고, 재와 부를 탐했다.

그리고 재와 부는 어떻게든 축적 할 수 있었다. 화폐의 대체품 마석이 발견되었기 때문.

마석은 일정 마력을 머금고 있는 돌이었다.

대체로 야생의 마물들에게서 발견되며, 장비를 만들거나, 마력포션을 만들 때 이용된다.

그렇기에 귀족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예.

평민들은 죽어도 노예가 되기 싫어했고, 꼬투리 잡힐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이에 귀족들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을 꾸며 몰아가기에는 단합이 너무 좋은데다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꼬투리를 잡았다가 그 건으로 인해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귀족의 자리를 내려놔야 될 것이다.

허나, 그때 무림인과는 또 다른 인류가 나타났다.

계급이 없는 세계에서 온 인간.

이에 아르카드의 제국은 특별한 법을 만들어 생존자들에게 적용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의 유예를 준 뒤, 여행자 신분으로 살아갈지 혹은 아르카드 제국인이 되어 살아갈지를 정하는 것이다.

만약 제국인이 된다면 살아갈 토지를 마련해주고 작물의 씨앗도 무료로 배부해주었다. 물론 강제 징집이라든지 법적 효력도 톡톡히 받게 된다.

반대로 여행자의 신분이 된다면 머무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마석을 바쳐야만했다. 허나 그럴시 노예제도 등의 법적 효력을 일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생존자들의 대부분 아르카드 제국에 속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다른 나라도 없거니와 안정된 보금자리는 구름섬에서도 줄곧 원해왔던 것이었으니까.

허나 겪어보지 않은 그들은 감히 몰랐다. 신분제도가 무엇인지.

귀족은 일부러 시비를 텄고 그 시비를 받아주기에는 현대인들은 제법 성깔이 있었다.

이윽고 벌어진 실랑이.

상위 계급이라고 해서 손을 아예 못 대는 것은 아니지만, 실랑이 정도로 주먹을 휘두르는 게 허용될 만큼 만만한 존재 또한 아니다.

그때 생존자들 중에서는 최초로 노예가 탄생했다.

그리고 5년이 더 흐른 지금.

이제는 아예 전문 노예 상인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목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들.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하다. 우선은 친근히 접근하여 근처지부로 안내한다. 구름섬에서의 전례가 있기에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이를 믿는다.

물론, 거부하는 사례도 가끔 있지만 이때는 힘으로 제압하니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강제 혹은 자의적으로 지부에 도착하게 되면 제국인이 될 계약서를 작성한다.

거기까지 하면 이미 끝난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었다.

귀족들이 하사한 작위를 악용해 마구마구 노예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노예는 상당수 고위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다.

물고 물리는 꼬리.

현 아르카드 제국의 귀족들은 현재에 안주하며 사리사욕을 챙기고 있었다.

이 같은 안주와 부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채.

그들은 도적이었다.

물건이 아닌, 사람을 훔쳐 파는 도적.

“따라와라 이세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려주마. 근처에 내가 속한 팀의 지부가 있다.”

“오~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젠 같은 팀도 아닌데 팀장은 무슨.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내 이름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알렌 팀장님.”

“큭, 그래. 아직까지 기억하니 기분 좋네. 그보다 형이라고 부르랬지?”

“음...정말요?”

“장난이겠냐?”

“그렇다면...예 알겠어요. 알렌 형.”

남성이 어색하게 형이라 부르자 알렌이 크게 웃었다. 허나, 그 큰 웃음소리에는 왠지 모를 경계심이 숨겨져 있었다.

메마른 숲.

상당히 강한 마수가 등장하기에 이 숲은 아무리 생존자가 많아 봤자 50명 정도 빠져나오는 것이 고작이다.

때문에 알렌은 이번에도 2~30명 정도 생존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번에는 자릿수가 남다르다.

더군다나 200명은 자신이 처음 판도라로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의 인원수와 비등비등 하지 않는가.

‘대체 어느 놈이 이렇게 많은 인원을 살려 온 거지?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길래...아니,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알렌은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후배를 제외하고는 생존자들의 이목이 대부분 한 쌍의 남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알렌의 눈이 재빨리 그들의 장비를 훑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갑주. 그에 비해 무기는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레어 급 이상.

‘호오...’

알렌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팀 아돌프의 소속으로 이곳에 넘어 온지도 어느덧 1년.

그는 현재 노예상 길드 실버어레스트의 일원이었다.

언변이 제법 좋은 터라 지부장의 눈에 띠어 현재는 유인책 팀의 팀장을 맡고 있다.

양심을 팔아서라도 피라미드의 위에 서겠다고 다짐한 생존자.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엄청난 양의 마석을 지불해 귀족의 작위를 사는 것이었는데 마석을 구하기 위해서는 좋은 아이템을 처분할 필요성이 있었다.

문제는 이 판도라에서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

구름섬과 달리 던전의 개체 수도 많이 부족하거니와, 행여나 던전이 생성 됐다 해도 마물들이 너무 강해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예가 될 인원들 몇몇을 몰래 죽인 뒤 아이템을 빼돌렸다. 어차피 뒷공작은 튜토리얼이나 구름섬에서도 종종 해왔던 것이라 망설임은 없었다.

“이제 그만 이동하자 여긴 위험해.”

알렌은 그리 말하며 몸을 획 돌렸다. 이렇게 하면 여태까지는 대다수의 인원이 뒤를 따랐다.

허나.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세현씨. 일단은 지리를 모르니 따라가는 게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만.”

유세현을 향해 의중을 물을 뿐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가겠다고 그리 좋아했던 후배조차도 그 모습에 망설이고 있었다.

알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그의 통솔력이 뛰어난다고 할지언정 어찌 선배의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인가.

고블린들과의 격전을 치러보지 않았던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기랄 도대체 저놈이 뭐길래...’

알렌은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본래라면 힘으로 해결했을 테지만 인원수가 너무 밀린다.

그렇기에 그가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유세현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윽고 유세현이 알렌을 향해 말했다.

“지부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약 60km정도만 가면 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 말에 알렌이 으득 이를 갈았다. 60km만 가면 있다는 데 뭔 생각이 필요한지.

“이곳은 위험하니까 빨리 정해라. 5분이 지나도 정하지 않으면 우리끼리 그냥 가겠다.”

때문에 그는 엄포를 놨다.

시간의 제약을 두면 사람은 초조해지기 마련이기 때문.

허나,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일 때의 일이었다.

유세현이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는 사실 마력의 흐름을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남동쪽으로 약 60km.

아쉽지만 아무것도 읽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분명 공간이 나눠져 있어 그런 것이리라.

‘어떻게 할까...’

유세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그들은 합류이후 팔려간 사람 한명을 찾기 위해 어차피 노예상길드를 일일이 털 생각이었다.

그러니 될 수 있다면 처리하면서 가는 편이 좋으리라.

“좋습니다. 일단은 따라가도록 하죠.”

유세현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이 바뀐 이후 마력의 흐름을 읽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이탈하면 된다.

이에 알렌이 씨익 웃었다.

‘훗, 역시 제깟 놈이 해봤자지...’

제법 날고 기는 것 같지만 이 제의를 거절하는 생존자는 역시나 거의 없다.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한다. 가자!”

그들은 곧바로 이동을 개시했다.

* * *

저벅저벅.

생존자들은 3일에 걸쳐 산속에 덩그러니 세워져있는 지부에 다다랐다.

고작 300명밖에 생활하고 있지 않았기에 이곳은 사실상 지부라고 하기에도 좀 뭐했다.

하기야, 이 루벤 산맥은 아르카드 제국의 영역 중에서도 상당히 동떨어진 곳.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또한 그래서인지 배치되어있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약했다.

대부분 구름섬의 최고년차와 동등한 D랭크 초기 스텟.

물론 D랭크 중간급으로 유세현과 비슷한 인원들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3~4명 정도에 불과했다.

‘얼마나 사냥을 안했으면...’

아무쪼록 유세현에게는 좋은 일.

알렌이 능청스럽게 상황설명을 이어갔다.

“우선 판도라의 형세에 대해 대충 알려주마. 이곳의 마물들은 구름섬에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물론 유세현과 김주희로서는 전부 아는 일이었다.

그렇게 따분하던 이야기가 끝나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서양인 한명이 나타났다.

지부장 라펠 그리드.

라펠의 음흉한 눈이 인원을 쓰윽 훑었다. 그의 눈은 남자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보고 있는 것은 오직 여성.

그는 노예를 팔기 전 상품의 간을 보곤 했는데 미리 점찍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굴러가던 눈동자가 멈춘다.

그곳에는 삼지창을 등에 메고 있는 한 여성이 서있었다.

청초한 외모와 그에 비해 무척 잘빠진 몸매.

외관으로만 보기에는 상등품 중에서도 최상등품으로, 백작에게도 납품할 수 있을 만한 상품이었다.

“호오...”

처녀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정설.

정말 아쉽게도 생존자들 중에서 처녀를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는 고위 귀족들도 잘 알고 있었다.

‘크크 땡잡았군.’

먹어도 탈이 없는 최고급 식품.

그는 신이나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다 나는 실버어레스트 루벤 산맥의 지부장. 라펠 그리드라고 한다!”

라펠은 자신이 실버어레스트라는 소속이란 것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노예가 된 뒤에 알아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기에.

간단히 인사를 마친 라펠이 단상에서 내려오며 알렌을 향해 툭 말했다.

“일 다 처리하면 저 여자는 따로 빼놔라. 말뜻 알지?”

“예. 물론입니다.”

알렌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윽고 라펠이 자취를 감추자 알렌이 입술을 살짝 곱씹었다.

방금 전의 선포로 인해 삼지창은 노릴 수 없게 된 것.

‘아쉽군. 진짜 좋아 보이는 무기였는데.’

한숨을 쉰 알렌은 계약서를 가지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계약 절차는 마치 당연하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계약서를 가져다주고 읽어보라고 한 뒤 특수한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 지장을 찍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사용한 당사자의 마력은 지장과 함께 계약서에 깃드는데, 비로소 아르카드 제국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유세현과 김주희는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변명을 대며 이를 거절했다.

그들은 차분히 기다렸다. 알렌이 공작을 칠 때까지.

그리고 그 일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벌어졌다.

지부에서는 생존자들에게 술을 대접했고, 이 술에는 사람의 심정을 격분시키는 특수 가루가 타져 있었다.

이윽고 벌어진 실랑이.

목숨을 걸고 판도라까지 넘어온 그들은 정말 허무하게 싸움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주망태가 된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홀랑 발가벗겨져 간이형 감옥에 투옥된 후였다.

이 수작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단 둘뿐.

당황한 생존자 일동이 간수를 향해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를 내보내주십쇼!”

“너희들은 죄를 저질렀어. 어제 일으킨 폭동을 그새 까먹은 거냐?”

“...무, 무슨! 그건 술이 들어가서...아니, 아무리 술을 마셔도 이렇게 될 리가 없는...”

“이렇게 될 리가 없기 뭐가 없어? 잘 대해줬더니 뒤통수를 친 주제에. 너희 어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사실 잘 기억도 안 나지?”

간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간다. 생존자들은 입을 꾹 닫았다. 그 표정에서 반성의 기미가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 미련한 놈들.

간수는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자신과 비슷했던 이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너희는 이제 완전히 끝났어. 노예야 노예.”

< 노예상 실버어레스트(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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