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07화 (107/612)

< 폭풍전야(3) >

별 감정이 안 드는 것과는 별개로 깊숙이 잠재워 두던 사고의 기억이 불쑥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남성을 향해 몸을 돌린 김다혜가 세 명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잽싸게 소개를 시작했다.

“클락씨. 이분들이 저번에 그 활약을 보여주셨던 분들이에요.”

“아, 그 돌파 명령을 내렸다는...”

“예. 세현아 인사해. 이분은 클락 레이코크씨. 이번에 팀 라이트를 이끌 리더로 뽑히신 분이야.”

클락 레이코크.

그는 주둔지에 얼마 머물지 않았던 유세현이 알고 있을 정도로 무척 유명한 사람이었다.

고층계로 나아갈 선배를 제외하고는 최강자로 일컬어지는 자.

실제로 그의 마력은 일반 1년차 생존자와는 달리 D랭크에 무척이나 가까웠는데, 무기의 질 또한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유세현이 악수를 위해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유세현입니다.”

그러자 클락의 눈이 빠르게 일행의 전신을 훑었다. 눈꼬리가 살짝 휘어진 게 새삼 사적인 감정이 듬뿍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직접 조우한 것은 이번이 분명 처음일 터인데.

이내, 클락이 손을 뻗으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클락 레이코크라고 합니다. 다혜씨에게 평소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억양이 살짝 올라가는 게 말투에도 가시가 살짝 돋쳐 있었다.

이거 설마?

유세현은 클락이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그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살폈다.

언뜻 정중해 보이지만 빠르게 행동을 취하는 것이 이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현아, 좀 다른 사람들하고 뭉쳐 다니라니깐...아무리 강하다지만 그건 너무 위험...”

김다혜가 걱정 어린 어조로 말하자 이강호와 악수를 하고 있던 클락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세현은 그제야 확신했다.

클락이 김다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말투가...’

확실히 김다혜 정도라면 이 세계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다. 얼굴도 꿀리지 않을 뿐더러 평소 똑 부러진 그녀의 성격을 가정했을 때, 일처리에서 실수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

더 나아가 클락보다는 아니지만 그녀의 마력 수준도 제법 높다.

이는 전력에서도 밀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정이 들기 마련인데, 이런 스펙을 지닌 여자를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건 안 좋아.’

팀 라이트도 추후 이용해야 된다. 그런데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있으면 일이 꼬여버릴 가능성이 무척이나 크다.

이강호가 게릭에게 연인이 있었냐고 물은 것도 이 때문.

만약 자신들의 검에 연인이 죽었다면, 과연 그가 복수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것인가.

물론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의 생각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쳐 움직이는 자들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아니, 되려 감정에 치우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편에 속하리라.

어느 때는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맹독도 될 수 있는 감정.

이제는 피하기만 해왔던 김다혜에게 제대로 말을 해야 될 때가 왔다.

“다혜씨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회의시간이 거의 다됐습니다.”

“아, 정말 그러네요.”

“세분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클락이 그대로 내부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작별인사를 건네는 김다혜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 시간 언제 돼?”

“어...어?”

반말은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이기에, 김다혜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시, 시간? 오늘 돼. 오늘. 이 회의 끝나고. 아마 약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그래? 그럼 그때 잠시 볼 수 있을까?”

“어, 어! 어디서 만날까? 거주지로 내가 갈까?”

“아니, 이전 우리가 대화 나눴던데 알지? 상업지구 쪽 의자 많은데.”

“아 거기?”

“응. 거기서 기다릴게.”

“아, 알았어. 꼭 갈게!”

대답하는 김다혜의 표정은 꽤 밝았다. 건물 내부에서 클락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혜씨?”

“아! 지금가요! 지금! 그럼 있다 봐.”

이윽고 김다혜는 내부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은 쓰윽 몸을 돌렸다.

이강호와 김주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김주희의 표정은 살짝 좋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뭘 할지 알겠다는 눈치였다.

“선배님...”

“돌아가자.”

“...예.”

유세현이 앞으로 나아가자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 * *

“세, 세현아! 마, 많이 기다렸어?”

약속시간보다도 30분이 더 지났을 무렵 김다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 미안 회의시간이 길어져서.”

허겁지겁 뛰어왔는지 그녀의 얼굴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웬만한 속도로 달려서는 이제 잘 지치지도 않을 텐데.

유세현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앉아.”

은은하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는 무거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

김다혜의 밝았던 표정이 빠르게 수그러 들어간다.

오래 사귀어온 사이인 만큼, 분위기를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김다혜가 의자에 조심스레 앉자 유세현의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난 아직도 너를 처음 본 날이 잊혀 지지 않아.”

“그...지나가다가 봤었다는 거?”

“응, 완전 예뻤었지.”

둘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은 고등학교 2학년 수학 학원에서였다. 그 당시 학원을 그만두고 자신감 넘치게 독학을 하던 유세현은 모의고사에서 4등급이라는 성적을 받아왔고, 부모님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그를 다시 학원에

보냈다. 이과인 그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위해서는 최소 2~3등급의 수준으로 올릴 필요성이 있던 탓이다.

아무쪼록 그 당시 유세현은 정말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교의 학생들과 장난도 칠 줄 알고, PC 게임도 했었으며, 여자에게도 흥미가 있었다.

그는 이미 중학생 때 몇 번 사귀어본 전례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지만.

학원에서 스쳐지나가는 김다혜를 처음 봤을 때는 어찌나 예뻐 보였던지.

그녀가 자신보다 상위 클래스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유세현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인서울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닌, 그녀와 같은 반이되어 말이라도 걸어보기 위해.

그는 결국 단기간 만에 2등급 수준으로 끓어 올리는데 성공하여 그녀와 같은 반이 되었다.

물론, 그래봤자 카사노바 같이 여성에게 접근하는 스킬은 없었기에 처음부터 김다혜와 친해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그는 정통적인 방법으로 승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옷을 깔끔히 차려입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유도한다. 그리고 바나나우유 등을 선물하며 사소한 환심까지.

그는 친해질 때까지 딱 적당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성이 아닌, 친한 친구로 인식하게 된다면 이미 끝장이라고 봐도 무관했기 때문.

모든 것은 계획대로.

유세현은 고백을 했다. 허나, 김다혜는 생각보다도 훨씬 철벽이었다.

수차례 이어진 고백 시도와 미묘한 거절.

정말 싫었다면, 외면을 했겠지만 김다혜도 그렇게 싫지는 않았는지 결국 승낙했다.

그 후에는 유세현이 정말 잘했다. 평소 꼼꼼한 성격이었기에 흔히 시간이 지날수록 까먹는다는 기념일도 빼먹지 않고 아주 잘 챙겨주었다.

지금도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은 잊을 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사고 이후에도 잊혀 지지 않던 그 기억은 더 이상 추억이 아닌, 마음을 갉아먹는 기생충이 되었다.

이제 유세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와 가까워 질 수 없었다. 그리고 정황을 들은 김다혜도 사실은 이를 잘 알고 있으리라.

“다혜야.”

“...응.”

대답하는 김다혜의 가슴이 욱씬 아파왔다. 분명 그토록 불러주기 원했던 자신의 이름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유세현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예상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우리는 이제 완전히 끝났어.”

“......”

“일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예전의 관계로는 죽어도 못 돌아가.”

그가 말하는 관계 속에는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요새를 나와서 팀 라이트의 중추 멤버까지 되었잖아?”

“......”

“주위를 한번 둘러봐. 분명 지금의 너에게는 나랑은 가치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고개를 푹 숙인 김다혜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세현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고개를 번쩍 든 김다혜의 눈동자에 쓴웃음을 짓고 있는 유세현이 비쳤다.

“그러니깐 죄책감 때문이건 뭐건, 나 같은 건 이제 그냥 잊어 버려. 오늘 이후로 개인적으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그럼, 앞으로 잘 지내라.”

할 말을 끝낸 유세현은 다시는 못 볼 사람인 마냥 뒤돌아섰다. 너무 일방적으로 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끝내야 하는 인연, 너무 난잡하게 얽히고설켜 잘라야하는 매듭이다.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다혜의 손이 유세현의 어깨를 향했다. 허나, 그녀는 끝내 그 어깨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한동안 저 멀리 인파속으로 사라져가는 유세현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 다음날.

일행은 다시 팀 라이트를 찾았다. 신원패를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게릭의 진술에 따라 팀 헤르메스에게서 정식적으로 요청이 들어온 탓이었다.

그들은 감사팀으로 보이는 팀 헤르메스의 인원들을 맞이해 간단한 사정 청취를 한 뒤 모아 놨던 아이템을 돌려주었다.

“요청에 수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마지막 인사까지 간단히 나눈 그들은 팀 라이트의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제처럼 빠져나가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아...”

김다혜와 마주쳤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일까?

옆에는 클락이 서 있었다. 표정을 보니 불만족스러운 것이 분명하다.

허나.

“안녕하세요. 세현씨.”

“예, 안녕하세요.”

사무적으로 바뀐 김다혜의 말투를 본 클락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제가지만 해도 그렇게 친근하게 굴었는데.

이윽고 유세현 일행이 저편으로 사라지자 눈치를 보던 클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다혜씨 방금 그건?”

“아, 왜요?”

“아니, 그...세현씨를 대하시는 태도가 조금 바뀌신 거 같아서요.”

“아, 그거요? 이곳은 이제 현대가 아니잖아요.”

“아...”

말은 얼버무렸지만 클락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챘다. 유세현이라는 자가 이 주둔지 안으로 들어온 이후 그녀는 평소 하루에 한 번씩은 무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를 좋아하는 클락은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생각해보자면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다.

충분이 이상한 상황.

문득 회의가 끝난 뒤 뛰어가던 그녀가 떠올랐다.

뭔 일이 있었다고 하면 분명 그때뿐인데.

‘뭐 상관없나.’

아무쪼록,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것만으로도 클락은 오랜만에 좋은 기분이 되어 건물 내부로 향했다.

* * *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주둔지의 내부.

일행이 위치해 있는 천막 옆으로는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헤르메스 일이 일단락 된 지금 그들은 동이트기 무섭게 5층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스륵 스륵.

풀숲의 저편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굳이 마력의 양을 살필 필요도 없이 경계를 서고 있던 유세현과 김주희가 무기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 귀에 울려 퍼졌다.

“워워. 나야 나.”

“...과대 형?”

“어 웬만해선 낮에 오고 싶었는데 할일이 많아서 말이야.”

대충 말하는 짜임새를 보니 불침번이나 경계 서는 도 중 이곳으로 온 것이 분명했다.

유세현이 무기를 내리며 말했다.

“이곳엔 또 어쩐 일로?”

“에이~어쩌긴 그냥 와본 거지. 꼭 오는데 용건이 있어야 되나? 그리고 주희야 정말 그때는 미안했다니깐 이만 화 좀 풀어라.”

“...화 안 났어요.”

“그, 그래? 그러면 잠시 있어도 괜찮지?”

이용석은 너스레떨며 두 사람의 맞은편 통나무에 걸터앉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몸을 살짝 앞으로 내민 이용석이 손을 뻗었다.

“야, 세현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악수나 한번하자.”

“......”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유세현은 일단 받아주었다.

꾸우욱.

그러자 마주잡은 이용석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악물고 있는 게 온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허...’

단번에 의도를 파악한 유세현은 힘을 적당히 주어 대응했다. 그는 평소 권위적이고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하지만 어떨 때 보면 애들 같은 면모도 있었다.

“아아악! 야 그만! 그만! 졌어!”

힘을 살짝 더 주자 이용석이 땅을 치며 항복을 선언했다. 손목을 휘휘 터는 그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정말 엄청 세졌네.”

“이거하려고 오신건가요?”

“에이 설마...사실은 말이야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떤 걸?”

“그...2층 던전의 경로. 우리에게도 좀 공유해줄 수 있겠냐? 네가 태광 형님 일행에게 알려줬다고 하던데.”

이용석이 은근슬쩍 물었다.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 사람이 그냥 접근할리가 있나.

“알려주시면 과대 형께서는 뭘 해주실 건가요?”

“으윽...지금 당장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아! 그 우리 쪽에 와서 아이템이라도 하나 골라볼래? 별로 좋은 건 없지만...”

기브엔 테이크.

이태광 팀을 무조건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추후 그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용석의 팀은 어떨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

유세현이 차분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용석은 가만히 기다렸다. 이전 제단에서처럼 인정에 호소하며 물고 들어져 봤자 의미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유세현은 경로를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이란 학습해가는 존재.

실수를 인정하고 되풀이 하지 않는 그는 추후 제법 쓸 만할 수도 있다.

“정말 고맙다. 혹시 먼 나중이라도 제법 쓸 만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우리도 공유해주도록 하마.”

“예. 수고하세요.”

이윽고 이용석이 자리에서 떠났다.

유세현은 평소처럼 마력탐지를 하기 위해 의식을 집중시켰다.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며 흐름을 읽어가던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건!’

무수히 많은 마력의 이동,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고블린들이 이 주둔지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 폭풍전야(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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