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2) >
“후...도착했군...”
“일 년 만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에요. 선배.”
정처 없이 나아가던 일행의 눈앞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계병들이 보였다.
유세현은 신원패를 찾기 위해 메고 있던 배낭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왠지 모를 공허함이 손끝을 스친다.
“어?”
이리저리 내부를 뒤지는 손동작이 점점 빨라져 갔다. 허나, 찾아도 신원패로 추정되는 물체가 만져지는 일은 없었다.
이내 배낭 안을 들여다본 유세현이 지긋이 혀를 찼다.
전투의 여파 때문인지 배낭내부의 모서리가 찢겨져 나가있었는데, 그곳으로 신원패가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편의상 세 개의 신원패를 모두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본래에는 튼튼한 포켓에 보관해 놨었으나 아이템을 넣기 위해 옮긴 것이 화근이었다.
“정지!”
이윽고 일정 범위 안에 들어서자 높게 쌓여진 담 위에 서있던 경계병이 신원패의 제시를 요구해왔다. 입맛을 쩝 다신 유세현이 차분히 대답했다.
“저, 죄송하지만 신원패를 분실했습니다.”
“다른 분도 말입니까?”
“예. 제가 전부 소지하고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배낭에 구멍이 뚫려서요.”
“아~”
강행군으로 인해 피로가 제법 많이 쌓여있었기에 막힘없이 하이패스로 통과하고 싶은 게 본심이었지만 이래서는 어쩔 수 없다.
‘한 10분정도 더 걸리려나?’
유세현이 그렇게 생각 하고 있을 때였다. 세 명을 주시하고 있던 경계병이 살며시 손을 까딱였다.
통과라는 뜻의 암호였다.
트드득.
서서히 열리는 문.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는 유세현을 향해 경계병이 친근하게 외쳤다.
“들어가시게 되면 바로 재발급 받으시기 바랍니다. 유세현씨.”
“...아, 예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마주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 애초에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문을 열어주면 안 될 뿐더러, 그들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본디 몇 가지의 검사를 한다.
이것은 신뢰.
눈앞에 있는 경계병은 분명 급습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리라.
문을 통과한 일행은 천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막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먼지가 수두룩이 쌓인 상태였다.
일행은 바로 일거리를 나눴다.
김주희는 천막의 내부청소를, 유세현은 전리품의 나열을, 이강호는 음식을.
생존경력 20년이라 그런지 이강호는 듣도 보도 못한 재료를 가지고도 제법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냈다.
오늘의 메뉴는 스튜.
적은 고기로도 상당한 양의 음식을 만들 수 있기에 식량이 부족한 전장에서 많이 먹는 식단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잘 만들어진 훌륭한 요리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계속 육포만 질리도록 씹으며 던전을 나아갔었으니까.
큼지막한 고기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은 김주희가 탄성을 내뱉었다.
“와~선배님 진짜 맛있어요.”
공복은 최고의 향신료라고 했던가.
김주희는 그 말을 끝으로 폭풍처럼 스튜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튜가 점점 밑바닥을 내비치고 있던 때였다.
“어? 세현 동생 드디어 돌아 온 거야?”
호쾌한 음성이 좌측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피어오른 연기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온 이태광이었다. 유세현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예.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형님도 잘 지내셨나요?”
“하하하. 우리야 뭐 당연한 거지 당연한 거! 아 잠깐만! 한별아! 세현이 왔다~!”
스스럼없이 다가오던 이태광이 양손을 입가로 모으더니 별안간 저 너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주둔지 속으로 광활하게 울려 퍼지는 함성.
쪽팔림이라고는 1도 담고 있지 않는 그 당당한 행동에 유세현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한별이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냈다.
“오, 오빠!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면 어떻게 해요!”
“왜? 있으면 알려달라며? 네가 직접 부탁해놓고 왜 그래?”
“아니, 부탁한건 맞긴 맞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이한별. 그 모습은 언제나 차분한 행동을 보이던 이전과는 남다른 생소한 느낌을 자아냈다.
유세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한별씨.”
“아, 안녕하세요. 세현씨 저,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한별 또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태광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거참! 아 그보다 동생 점심 먹고 있었어?”
“아, 예.”
“윽...스튜인가...”
스스럼없이 다가와 유세현 옆에 자리를 잡은 이태광이 스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미료가 없던 터라 그는 이전 지옥을 맛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과연 요리였는지 독극물이었는지.
조심히 다가온 이한별 또한 대충 자리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저...한별씨? 이쪽에 자리가 비어있는데 앉으시겠어요?”
김주희가 환한 미소를 내보이며 자신의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내리쳤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이한별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니, 되려 저번의 그 귀여운 행동을 떠올리자니 그녀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예, 그럼 감사히...”
이한별이 다소곳이 앉자 김주희는 스튜까지 떠주는 매너를 보였다. 이한별의 눈가 또한 이태광처럼 잔잔히 떨렸다.
그녀 또한 김길태가 만들어준 스튜의 희생양이었던 것.
이한별은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그래도 예의상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국물을 한 수저 들이켰다.
“어?”
자신도 모르게 번쩍 떠지는 두 눈.
방금 입안에 집어넣은 스튜는 이한별이 이 세계에 도착하여 먹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맛이 있었다.
마땅한 조미료도 존재하지 않건만 어찌 이런 맛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스럽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진짜 맛있는데요? 이런 건 이곳에서 와서 처음 먹어봐요. 이거 혹시 주희씨가 만든 건가요?”
“어? 맛있다고?”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김주희가 아니라 이태광이었다. 그는 그 무섭게 생긴 얼굴을 돌려 김주희를 주시했다.
자신도 한 그릇 달라는 의미였지만, 김주희 본인에게는 마치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아무튼 김주희는 황급히 이태광에게 스튜를 내주었다.
“여, 여기요...”
그러자 국물과 고기를 한 스푼 떠먹은 이태광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오!오! 정말 장난 아닌데? 누가 한 거야? 주희씨가?”
“예? 아, 아뇨...이건 강호 선배님이...”
“오~자네인가!”
이태광이 번쩍 일어서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이에 이강호가 자리에서 일어서 악수를 받아주자 이태광은 손을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히야~ 이런 음식을 먹게 될 줄은 진짜 몰랐어! 정말 고맙네! 고마워!”
“별거 아닙니다. 가끔 와서 드셔도 됩니다.”
“오오오! 진짜인가?”
“예.”
이강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이렇게 의도치 않게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다니.
생각해보자면 자신도 예전에는 육포만 먹었다. 그리고 사람이란 모름지기 한 음식만 먹게 되면 당연히 질릴 수밖에 없다.
전투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떠올리지 못했던 방법.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한 이한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강호씨?”
“예.”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떻게 만들었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저희 쪽은 요리를 좀 많이 못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오오오!”
이강호의 대답에 기뻐하는 이태광의 큰 덩치가 연신 위아래로 흔들렸다. 어이가 없어진 유세현이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그 미친놈처럼 몬스터를 쓸어 담았던 이태광의 약점이 고작 음식이었다니.
그들은 쌓인 여독도 풀겸 주된 내용 없이 잠시 담소를 이어나갔다.
김주희는 때때로 이한별을 향해 견제타를 날렸지만, 이한별은 마치 동생을 다루듯 그저 웃어넘겼다.
그렇게 약 30분이 흘렀을 무렵.
유세현이 툭 물었다.
“형님. 지금 스텟이 어떻게 되십니까?”
“응? 스텟?”
“예.”
스텟은 목숨으로 바로 직결 되는 것인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때문에 보통이라면 이런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물론 타인을 신용하지 않는 유세현도 이를 잘 알고 있다. 허나, 그가 그럼에도 이렇게 물은 이유는.
“응. 이제 전체적으로 54% 정도 됐어. 나머지 애들은 한 43%정도? 동생이 알려준 던전을 연이어서 가니까 정말 팍팍 오르던데? 뭐 그 덕에 애들은 좀 힘들었던 것 같았지만.”
과거 팀원을 구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정보를 토대로 의형제를 맺은 자신을 많이 신뢰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유세현은 재빨리 천막내부로 들어가 사용하고 남은 3번 석판을 전부 가지고 나왔다.
“이거 형님이 쓰세요.”
“응? 이걸?”
조심히 내밀자 이한별을 포함한 이태광이 살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 또한 유세현의 성격을 아는 만큼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세현씨 이걸 왜...”
“필요 없어서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요가 없다고요?”
“예.”
“와...”
이한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3번 석판이 필요 없다는 것은 이미 그 경지를 뛰어 넘었다는 것.
3층의 스텟이 대략 50~65%이니 이는 적어도 그들의 스텟이 65%이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 여러 부가적인 것까지 감안 하자면 스텟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을 가능성이 있다.
“동생! 언제 그렇게 강해졌어?”
“이번에요.”
“크~이거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못 따라가겠구만! 내가 정말 엄청난 동생을 뒀군. 하하하하!”
사실 이태광의 성장도 어마무시하게 빠른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약 2개월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6~7개월 차가 누비는 3층의 기초 스텟을 만들어 둔 것이었으니까.
“세현씨 정말 대단하세요. 보통은 3층을 졸업하는 데만 7개월 이상이 걸린다는데...”
재빨리 한마디 거든 이한별이 눈이 살며시 김주희에게 향했다.
그렇다면 이 여자도 그 정도의 스텟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흠흠.”
시선을 의식한 김주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팔짱을 꼬며 자신을 어필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목선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한결같은 행동에 이한별이 실소를 내뱉었다.
그러자 이상한 느낌을 받은 유세현이 재빨리 눈을 흘겼다.
허나, 김주희의 포즈는 이미 원래대로 되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눈치에 한해서는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자.
유세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한별씨 혹시 3층의 던전에 대해 미리 조사해 두신 것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직...”
“그렇다면 제가 알아낸 장소 몇 군데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정말요? 하지만 이건 너무 받는 것만 같은데...”
이한별은 조금 의아했다. 이렇게 정보를 그냥 줄 사람이 결코 아닌데. 그리고 유세현도 평소 자신이 어떻게 해왔는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간단한 말을 덧붙였다.
“다시 말하지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저희가 쓸모가 없어져서 드리는 거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사람끼리 경쟁할 때가 아닙니다.”
“아...”
이한별은 말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확실히 급습 이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인간측은 누가 되었던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럼 감사히 듣겠습니다.”
“예.”
유세현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태광과 이한별은 내용을 전부 새겨들었다.
그가 하나하나 알려주는 것들은 사실상 가이드북과도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요리의 비법까지 전부 들은 이한별과 이태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심 멤버인 만큼 사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감사해요. 세현씨. 이 석판 정말 고맙게 받을게요.”
“아닙니다.”
“강호씨 레시피도 정말 감사드려요!”
왠지 모르게 석판과 정보보다도 레시피 부분이 강조 듯한 느낌은 단순한 착각인 것일까?
일행은 그들이 떠나가기 무섭게 신원패 발급을 위해 팀 라이트를 찾았다. 간단히 용건을 말하자 셋을 단번에 알아본 담당자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분들이시군요. 접수되셨습니다. 하루 뒤에 찾으러 와주시면 됩니다.”
“예. 수고하세요.”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만큼, 유세현은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나, 재촉하면 되려 걸리는 법.
재빨리 열어 재낀 출구에는 때마침 내부로 들어오려던 남녀 한 쌍이 나란히 서 있었다.
커다란 방패가 돋보이는 남성과 은색이 레이피어를 왼쪽 허리 춤에 차고 있는 여성.
김다혜가 화색이 되어 외쳤다.
“어? 세현아!”
“......”
“무사했구나! 그렇게 말했는데 또 3명이서 나가다니...이제 돌아온 거야?”
“예, 이제 막 돌아온 참입니다.”
그녀가 반갑게 반응해주는 것은 사실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지만, 유세현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 폭풍전야(2)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