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9화 (29/612)

중간다리(2)

“어! 세현 선배님! 이기셨어요?”

“물론.”

“와아아! 저도 이겼어요! 강호 선배님은...”

김주희가 두리번거리려는 찰나 이강호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어! 강호 선배님! 선배님은...”

유세현과 잡담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감정을 잘 비치지 않는, 평소와도 같은 무심한 표정.

김주희는 이강호가 이겼음을 확신했다.

“이기셨군요!”

“응.”

“와아아! 이걸로 저희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됐네요!”

사실 김주희는 시련의 내용을 듣고 살짝 불안했었다.

저 많은 인원들이 작당하여, 소규모 팀인 자신들은 덮친다면 이강호와 유세현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이긴다는 상상이 안간 것.

하지만 이런 김주희의 기쁜 마음을 이강호가 한마디 내뱉음으로써 초를 쳤다.

“과연 그럴까?”

듣기만 해도 불안해지는 말.

“예? 선배님 무슨 뜻...”

“조금만 기다려 봐라. 아직 정해진 건 아니니.”

“...옙.”

김주희는 입을 굳게 닫았다.

도대체 뭘 예상하기에 이런단 말인가.

어느새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5명이 선발되었다.

얼굴을 본 생존자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스, 승훈씨가!”

“말도 안돼! 동철이가!”

한명은 25명의 팀원을 이끌고 온 신승훈.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팀의 핵심 멤버로 속해있던 이동철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그들조차도 아우성거리며 걱정하는 인원들이 있었다.

유세현이 지긋이 혀를 찼다.

“글렀군.”

육체가 한계를 뛰어넘은 만큼, 김주희의 생각과 달리 가위바위보는 단순히 운 게임이 아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내는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정신만 똑바로 차려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바꾼다면 자신보다 아래인 하수에게는 절대지지 않는 시스템.

그래서 유세현과 이강호는 손쉽게 상대방을 이기는 게 가능했다.

문제가 있는 건 신승훈과 이동철이라는 남자.

모두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만큼 분명 스텟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높을 터인데, 굳이 진 이유를 꼽자면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위바위보가 운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김주희, 전투 준비해라.”

“예...선배. 예? 전투요?”

“그래.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화들짝 놀라는 김주희를 두고 유세현은 사람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반발이 빗물처럼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잠깐! 아무리 생각해도 운으로 제물을 정한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맞아! 운으로 정하다니 말이 안 된다!”

“무슨 소리야! 다들 목숨을 걸고 했는데!”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고 사람들 사이에 불신이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연 신승훈.

“저도 죽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직접 제시하고 약속한 만큼. 저는 제 운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럴싸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번뜩이고 있는 두 눈은 희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데리고 온 팀원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을.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승훈씨가 없으면 안돼요!”

“맞아! 차라리 실력으로 하자!”

아니나 다를까 신승훈의 팀원들이 우르르 신승훈을 감쌌다.

이동철이 속해있는 팀원들도 이에 호흥하며 이동철을 보호했다.

이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소수 인원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새끼들아! 우리도 목숨 걸고 했다고! 이 씨발 놈들아! 우리가 걸렸으면 얌전히 희생하라고 했을 거 아니냐!”

“맞아! 공평하게 선택받은걸 왜 번복하냐! 이 비겁한 새끼들아!”

“하! 일단 진정하세요! 싸우지 마십시오!”

분위기가 과열되자 신승훈은 직접 나서 말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까지 온 이상 가위바위보에서 진 것은 큰 의미가 없었음으로.

하지만 신승훈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나서는 것은 도화선에 불을 붙이 듯 소수의 생존자들을 더욱 흥분시키는 것이라는 걸.

“이쪽으로 오지 마. 이 가식적이 새끼야! 졌으면 얌전히 제물이나 되라고!”

한 남성이 들고 있던 장창이 무방비하게 서 있던 신승훈의 복부를 꿰뚫었다.

운이 좋게도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자칫 잘못했었다간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상황.

여태껏 쓰고 있던 가식이라는 가면이 와장장 깨지며, 부릅뜬 신승훈의 눈이 남성을 향했다.

“찔러?”

반사적으로 검을 꺼낸 신승훈이 창을 들이밀고 있는 남성의 오른팔을 잘랐다.

서걱.

촤아아!

주위로 흩뿌려지는 피와 살점.

“꺄아아아! 정철씨!”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난장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입만 번지르르 한 새끼가! 희생한다며!”

“너희 같으면 운 따위에 목숨을 버릴 수 있겠냐! 다들! 승훈씨를 도와!”

서걱!

검에 의해 사지가 절단되고.

푹!창에 의해 꼬챙이가 되는 생존자들.

그리고 그 불똥은 가만히 지켜보던 유세현의 일행에게 까지 튀었다.

“이 새끼가! 너도 저 새끼들이랑 한패냐!”

신승훈의 팀원 한명이 그를 노려온 것!

유세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일체의 망설이 없이 롱소드를 휘둘러 목을 베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데스크라토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이래야지!]

챙! 챙!

희생자가 5명을 넘었음에도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김주희는 그제야 유세현이 한 말을 깨달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으셨구나.’

후웅!

눈이 획 돌아간 여자 한명이 장창을 들이밀며 김주희를 노려왔다. 선배들보다는 느리지만 여태까지 상대한 크낙사스보다는 빠른 움직임.

예전이었다면 도망치는데 정신이 없었겠지만, 자신 또한 일주일간 많이 변했다.

마음에 준비를 했었던 김주희는 곧장 뒤로 몸을 빼며 장창을 내리뻗었다.

푹. 촤악!

서로 교차하는 창.

심각한 치명타를 입은 건 이름 모를 여자 쪽이었다. 김주희의 흐릿한 상처를 확인한 여자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어떻게 그 정도밖에 안 다칠 수...”

여자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유세현이 마저 처리한 것.

김주희의 심장이 매섭게 뛰었다.

사람과의 첫 전투.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약에 취해 마도철의 손에 몸이 휘저어질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한 남성의 고함이 주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모두! 멈추세요! 이게 뭐하는 짓 들입니까! 주위를 보세요오오!”

휘두르던 병장기가 서서히 멈추었다.

생존자들의 눈이 그제야 조심히 주위를 훑었다.

다리가 잘려 땅을 기고 있는 남자.

떨어진 팔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자.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이게 무슨...헙!”

“욱!”

신승훈이 얼굴을 바꿔 착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존자들도 또한 대부분은 입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는 반면 반대로 대놓고 기뻐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7명이서 똘똘 뭉쳐 웃고 있는 조폭 집단이 그 예.

“크하하! 이걸로 통과가 가능해졌네! 답답했었는데 다행이야!”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하! 그런 말은 무슨! 난 현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리고 니네들도 이 상황이 오도록 가세한 주제에 어디서 착한척이야? 더러운 일 대신 해주는 거니깐 가만히 쳐보고나 있어. 얘들아!”

조폭의 리더, 김동환이 지시를 내리자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죽은 시체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 여성이 시체를 이동시키려는 부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안 죽었어요! 안 죽었다고요. 우리 그이 안 죽었어요.”

“어허! 이거 안놔? 죽었다고!”

“아니에요 안 죽었어요!”

“안 죽기는 개뿔! 빨리 안 꺼져? 여자라고 봐줄 줄 알아? 꺼지라고!”

연신 발길질을 해댔지만 여자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짜증이 났는지, 검을 빼든 김동환이 그녀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이, 아가씨...”

“......”

검을 들이대자 여자는 단번에 얼어붙었다.

혀를 날름거린 김동환이 말을 이었다.

“당신 연인은 이미 죽었다는 말 안 들려? 아니면 같이 가고 싶은거야?”

“저, 저희 그이 안 죽었어요...안 죽었다고요...”

“안 죽기는 개뿔! 눈깔이 있으면 제대로 봐봐!”

김동환은 그 큰 손으로 직접 시체를 들어 올린 뒤 여자를 향해 내밀었다.

잘려나간 사지와 툭 튀어나온 내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 늘어진 몸.

여자의 고개가 푹 주저앉았다.

“봤지? 가져간다.”

휙!

김동환은 단번에 시체를 데스크라토스 앞으로 던졌다.

그 모습에서 죽은 고인에 대한 예의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 길을 열어줘라! 너가 말한 조건은 다 충족했다!”

[크흐흐흐흐]

“뭐가 웃기지? 빨리 길을 열라니깐!]

김동환이 외침에 데스크라토스의 큰 거목 상체가 좌우로 움직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부의 의사.

“너! 지금 무슨 개수작이냐! 조건은 만족 된 거...”

[크흐흐흐. 누가 죽여서 가져오라고 했지?]

“...뭐?”

김동환과 신승훈을 포함 한 생존자들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죽여서 가져 오면 안 되다니.

“너 이 새끼!!”

[질문을 하지 않은 건 너희들이다. 인간.]

“......”

[하지만, 미리 설명해주지 않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군.]

“그렇다면 얌전히 비...”

[그러니 삼십분. 딱 삼십분만 시간을 늘려주겠다. 그때까지 5명을 데려오지 못하면 시련은 실패다.]

“으...뭐라고!”

참다못한 김동환이 검 날이 단번에 앞으로 향했지만 데스크라토스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아니, 되려 덤비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나를 쓰러트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 한번 해볼 테냐?]

“...크아아악!”

김동환은 분노의 함성만 연신 내지를 뿐 차마 덤비지는 못했다.

“형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크으! 이런 씨팔!”

내용을 들은 생존자들은 팀 단위로 똘똘 뭉쳐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접근한다면 또다시 난전이 일어나리라.

“승훈씨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흠...”

각 팀별로 어떻게 하면 별 피해 없이 제물을 정하는 게 가능할지 의논이 이루어졌다.

신승훈의 눈이 땅에 쓰러져 있는 둘을 향했다.

사지가 잘렸지만 운 좋게 죽지 않은 사람들.

“파수꾼님. 사지가 잘린 건 상관없는 겁니까?”

[그렇다. 상관없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데스크라토스의 답변은 무척이나 빨랐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 간단했다.

“이, 이런! 사, 살려줘! 택환아! 도와줘! 우린 친구잖아!”

“나, 나도! 나도 좀 보호해줘! 여태까지 생사를 함께 했잖아!”

사지가 잘린 둘은 저마다 아우성을 질렀다.

하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사람들은 매정했다.

“미안하다. 꼭 누가 희생해야 된다면...”

“야! 그런 말이 어디있...”

“넌, 그리고 앞으로 싸울 수도 없잖아.”

“너, 너어어!!”

사실 잘려나간 사지를 상처부위에 계속 대고 있으면 천천히 나마 붙긴 붙는다.

하지만 이것을 알고 있는 몇몇의 생존자들 조차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희생량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지금, 굳이 모르는 사람을 도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것으로 남은 필요한 희생자는 셋.

생존자들의 눈이 본능적으로 인원 수가 적은 팀을 향했다.

가장 늦게 이곳에 도착한 세 명.

김주희의 전신을 훑은 김동환이 입맛을 쩝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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