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1)
“형도 그 생각 하신 거군요.”
“그래. 솔직히 좀 어이없지 않냐? 우리가 펜션에가 가까스로 살려온 거 이제 와서 지네가 머리 꼭대기에 서려고하고 말이야.”
“흐음...그건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이용석은 현대사회 취지에는 맞지 않게 권위적이고 이기적인데다가 여자를 무척이나 밝히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척이나 멍청한 건 아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같은 대학교에 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깐.
“...나중에 전투가 발생한다면 보내버리는 게 어떠냐?”
“보내요? 뒤에서 공격하자는 건 아니죠?”
“물론 아니지.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상황이어야만 하지.”
“어쩔 수 없는 상황? 어떻게 그런 상황을 만드시려고요?”
이용석의 머리에서 잔꾀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는 이한철이 자신에게 동조할 거라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다.
“몬스터가 몰아치면 우리가 할일을 하지 않고 뒤로 내빼는 거야.”
“만약 저들이 몬스터보다 강하면요?”
“그땐 상황을 당연히 상황을 지켜보면서...”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해관계가 맞자 둘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둘 중 이용석의 동태를 주시하던 김주희 또한 때를 놓치지 않고 이강호를 향해 움직였다.
“선배님!”
그녀는 최대한 발랄한 표정으로 이강호의 팔에 털썩 달라붙었다.
말랑하면서도 푹신한 기분 좋은 감촉이 이강호가 입고 있는 옷가지 너머로 느껴졌다.
그녀가 작정하고 남자를 꼬실 때 하는 행동.
파격적인 만큼 아직까지 이 행동에 넘어오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물론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외모도 그 몫을 톡톡히 했다.
또한 이강호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구애를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 너, 뭐냐? 떨어져.”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덕분에 김주희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애써 기색을 숨기고 다시 한 번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님 아까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펜션에서 흑기사도 그렇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흑기사?”
이강호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옛 기억을 되짚어 김주희가 하는 말을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술자리 게임에서 진 사람을 대신해 술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
분명 그런 사람을 현대에서는 흑기사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건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필할 때 나 하던 거 아니었나?’
얼굴은 꽤나 자신의 타입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대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마치 유세현의 기억처럼.
‘설마, 여자도...관계가 되어있는 건가.’
자다가 봉변당해 죽어버린 이름 모를 남학생조차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여자는 기억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그 부분만 쏙 빼버린 것처럼.
즉, Ex아이템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나저나 내게 원하는 게 있나보군.’
김주희가 이렇게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 대충 예상이 갔다.
자신의 몸을 주고 안전을 보장받는 여자들은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와중뿐만 아니라 판도라로 올라가기 위해 1~2년차들이 서식하는 구름섬에서도 종종 봐왔었으니깐.
그러니 이것은 힘없는 여자로서는 일종에 무기였다.
‘뭐, 결국 대부분 마지막엔 버려졌지만.’
남에게 의존만 하는 여자들의 마지막은 상당히 비참하다.
몬스터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더미역할로 죽는다던가 아니면 사람으로서의 의지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노리개가 되어버린다.
코인으로 강해지지 못 한자의 최후.
결국, 최후의 살아남는 몇몇은 억지로라도 코인을 조금씩 받아먹는 여자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코인은 확실히 챙긴 것 같군.’
활과 장창을 메고 있는 그녀의 몸을 본 이강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아이템에 관련되어 있는 이상 도와주지는 않을지언정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는 탓이다.
“이름이...”
“주희요 김주희! 선배.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자꾸 용한 선배가 달라붙어서...”
“용한 선배?”
“아. 네...술자리에서 자꾸 저한테 엉겨 붙던 남자 말이에요! 저는 선배한테 가고 싶었는데...”
김주희는 이미 죽어버린 이용한을 들먹이며 조심스레 눈에 띄지 않게 더욱 달라붙었다.
그리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세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달라붙은 게 누구였는데.’
그녀는 잘생긴 이용한에게 영겨 붙어 무리하고 있는 이강호를 외면했었다.
이 사실은 적어도 여기 있는 대부분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눈살만 찌푸린 채 모른 척 걷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강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기 위함일 터다.
여자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용하기위해 접근한다는 것을 직접 알려주는 행위는 아무리 조언이라고 할지언정 자존심이 깎이기 때문.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러나 유세현은 달랐다.
15년 지기 친구가 괜히 15년이 아니다.
둘은 못할 말 쓴 말 다하며 치고 박고 싸워가며 컸다.
지금 와서 직설적으로 조언한다고 해서 아마도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호야 잠깐 나 좀 보자. 주희라고 했나? 좀 비켜줄래?”
“예?”
“둘이서 할 말 있으니깐 잠깐 비켜달라고.”
“...아. 예.”
김주희는 싫은 티를 빡빡 내었지만 이내 쫄래쫄래 이용석이 있던 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유세현은 이강호를 향해 말했다.
“야, 너가 예전부터 쟤 좋아한 건 알겠는데, 쟤는 너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용하려고 접근한건 알고 있지?”
“물론.”
대답은 번갯불 콩 구워 먹듯 빨랐다.
“뭐야?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딱 티 나잖아.”
“...그럼 왜?”
현재는 Ex아이템의 부작용 때문에 대충이나마 상대해주고 있는 것.
하지만 굳이 이걸 전부 유세현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회귀한 것을 알지 못하니깐.
그렇기에 이강호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귀엽잖아.”
“......”
“농담, 농담이다. 그러니깐 정색 좀 그만해라. 그냥 알아낼게 좀 있어서 그랬어. 나중에 정리되면 말해줄게. 그리고 행여나 지금 니가 걱정하고 있는 그런 일은 만에 하나라로 발생하지 않을 거다.”
“...내가 생각하는 게 뭔지 알고?”
“음. 내가 쟤한테 빠져서 헤벌레 하는 거?”
이강호는 핵심을 딱 짚어서 말했다.
유세현이 피식 웃었다.
“알면 됐다.”
“그래.”
둘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잡담도 하지 않았다.바로 앞 통로로 공터의 빛이 어느새 새어나오고 있었다.
* * *
공터로 들어와 자신이 왔던 길 이외에도 3개의 통로를 발견한 이한철과 이용석은 학과 인원들에게 곧장 사냥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가 이어지는 유세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랬다.
“3일만에 3개의 통로에 있는 몬스터들을 전부 죽였다고?”
“예.”
“......”
눈이 토끼 같이 커진 것이 전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그럼 너희들은 여기에 왜 온 거냐? 할일이 있으니깐? 온 거 아니냐?”
이용석이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이에 이강호는 몬스터들의 특수부위를 모아놓은 짐짝 앞에 앉으며 조심스레 제단을 가리켰다.
붉은색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 빛을 내뿜고 있는 8개의 거미의 눈.
노랗게 빛나던 6개의 눈까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저게 뭐?”
“제단입니다. 내일 열어서 들어갈 겁니다.”
“제단?”
“예.”
“무슨 제단인데?”
“저도 모르죠.”
이강호는 세세한 설명을 해주었던 유세현을 대하는 것과 달리 선을 딱 그으며 답했다.
그 모습에서 학과 선배를 대하는 존경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 새끼가...’
유용석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덩치도 자신보다 작은 것이 마음 같아서는 한대 쥐어 패버리고 싶지만 이곳은 몸의 크기가 상관이 없어진 세계.
이강호는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최강이었다.
“후우...”
“참으세요. 형.”
결국 이한철이 이용석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이강호는 그런 둘을 잠시 보다가 가방을 펼쳤다.
“뭐하냐?”
“손질. 내일 필요할 거야.”
“아...그래서...알았어. 그럼 난 스킬 숙련도나 좀 올려보고 있을게. 많이 사용하면 올라가겠지?”
“하하, 그러겠지. 열심히 해봐라. 아, 방패랑 무기는 여기 두고 가고.”
“알았다.”
유세현 또한 장비를 통로로 사라졌다.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잠시 동안의 휴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는 게 어느 누군가는 벌써 흙바닥에 누워 골아 떨어진 모양.
첫날 이후 안전지대에 제대로 자리 잡고 취침한 자신과 달리 숲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그들은 어제 닥칠지 모르는 위협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했던 것.
안전한 장소에 도착해 긴장이 풀리니 피로감이 몰려 올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회귀 전 튜토리얼에서 이강호가 처음 고른 아이템은 그 많고 많던 아이템 중 하필 일본도였다.
영화주인공처럼 멋지게 베어보겠다는 의지가 있던 것.
하지만 그런 안일한 선택은 그에게 얼마안가 절망을 주었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나는군.’
이강호는 생각을 접고 여태까지 모은 재료를 일렬로 나열했다.
홉 고블린의 독 주머니. 칸 암모나이트의 체액. 미노타우르스 워리어의 힘줄. 그리고 마지막으로 켈투자드의 두개골.
전부 중간보스를 처리하고 얻은 전리품으로서 제단 공략에 사용하기 위해 고이고이 모셔놓은 아이템이다.
‘시작해볼까.’
이강호는 먼저 불을 지피기 무섭게 겔투자드의 두개골을 거꾸로 세웠다.
그리고 홉 독 주머니에서 짠 독과 워리어게서 잘라온 힘줄을 물과 함께 섞었다.
부글부글.
화학적 반응에 의해 급하게 끌어 오른 물이 살짝 밖으로 튀었다.
툭!
치이익.
물에 닿은 모래는 갑작스레 힘없이 녹아 내렸다.
단순한 마비독이었던 것이 미노타우르스 워리어의 힘줄과 만나 그 성분이 바뀌어버린 것!
만약 자체 내성이 높은 겔투자드의 두개골이 없었더라면 독은 장작이 되어준 나무조차 녹여 버렸을 것이다.
아무튼 이걸로 독 만들기 공정은 완료.
나머지는 이 휘발성 짙은 독이 사방으로 퍼지기 전에 빠르게 무기에 바르는 것이다.
파바밧!
이강호는 빛과 같은 속도로 가죽을 이용해 능숙하게 체액을 펴 바름과 동시에 독을 입혔다.
휘발성이 강한 독이지만 칸 암모나이트의 체액은 무기가 부식되는 것을 막아줌과 동시에 독을 꽉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즉, 4개를 전부 적절하게 조합해야만 쓸 수 있는 것!
눈 8개 제단의 난이도를 고려하여 돌아오기 전 동료였던 이벨린 발디안이 직접 사냥을 나서면서까지 재료를 구해 연구하고 연구하여 발견하게 된 결과의 산물이었다.
‘이벨린...너의 노고는 결코 잊지 않으마.’
그는 녹색 빛으로 물든 롱소드와 참마 그리고 두개의 방패를 들어올렸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준비는 끝.
이젠 최상의 컨디션을 돌입하는 일만 남은 것.
이강호는 이따금 다시 다가오는 김주희를 무시하며 눈을 붙였다.
* * *
쿠르르르 쾅!
이강호가 8개의 눈에 손가락을 대고 머리를 돌리자 제단 중안에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며 문이 10명은 같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웅!
동시에 바람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연속해서 울리는 것이 마치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음색.
이에 이강호는 잔뜩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정말로 따라 오실 건가요?”
“당연하지!”
이용석이 당당하게 말했다.
“흠, 그렇군요. 그럼 우선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해둘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저희는 이곳에 들어간 이후 둘이서만 콤비를 맞출 것 입니다.”
“...뭐?”
이강호의 말에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그가 현재 하고 있는 말의 의미는 누구 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깐.
바로 따라오는 자신들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 따라서 코인도 분배해주지 않겠다는 것.
“따라오는 것은 마음입니다. 원하신다면 몬스터도 독점하지 않고 일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몬스터는 여러분의 힘만으로 잡으세요.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뭐, 뭐라고? 이 무슨! 같은 학과 생들 끼리 서로 돕고 나아가야 되는 거 아니냐!”
이용석이 쩌렁쩌렁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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