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하.”
러시아 군부 지도자가 어나니머스의 경고문을 보고 한숨을 깊이 쉬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말 그대로 익명의 상대를 대상으로 그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없었다.
“후….”
품에서 굵은 시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별 수 없다는 듯 얼굴만 찡그리며 연기를 수차례 내뿜었다.
그런 그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알았다.”
* * *
러시아는 이내 우크라이나 내 병력을 철수시켰다.
다른 수는 없었다.
전파를 통한 지휘 체계가 무너진 이상, 나아가 미사일을 포함한 모든 디지털 시스템이 어나니머스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상 공격을 지속하는 건 자살행위니까.
그와 함께 군부는 물러났다. 아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군사력에 관한 통제권을 잃은 군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소식이 곧장 유엔 본부에 알려졌다.
“…뭐라고요?”
미국 뉴욕 유엔 본부.
한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으로 유엔 직원에게 되물었다.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왜요?”
사무총장 정우현이었다.
연기 경력 25년의 배우이자 유엔 사무총장 정우현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군 통제권을 잃고 군부가 빠르게 무너졌다고 합니다.”
“오, 이런.”
정우현이 여전히 몹시 놀랍다는 표정으로 즉각 말했다.
“그럼 우리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아졌군요! 얼른 총회를 소집합시다!”
당연히 사람들은 정우현이 어나니머스임을 몰라야 했다.
이제는 사무총장으로서 할 일이 많아졌다.
어나니머스의 정우현이 러시아 군부를 무너트렸다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정우현은 이제 무너진 러시아를 재건하고 민주 정부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총회 후, 미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의 세계 주요 국가들이 약간의 병력과 대표 인사들을 파견해 모스크바에 수년간 머무르기로 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전 총회에서 사무총장 정우현에 의해 발언권을 박탈당했기에 이에 반대 의견을 표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건, 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기능을 당분간 정지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는 현행 유엔 구조상 쉬운 일이 아니다.
유엔 헌장으로 보장된 안보리의 기능은, 마치 한 국가의 헌법처럼 수정되기 전까지 거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국가 원수가 공식 석상에서 암살을 꾀하고, 군대는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침략과 각종 전쟁 범죄를 일삼는 등 워낙 명백하게 전범 국가로서 만행을 저지른 끝에 전 세계 여론에 힘입어 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개월 후.
러시아는 유엔 주재 아래 민주 선거 끝에 새 대통령을 선출하게 됐다.
군인이나 전 정권의 유력자가 아닌, 푸틴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핵심 혁명가 중 한 여성이었다.
즉, 제대로 된 사람이 러시아 대통령이 됐다.
새 대통령은 취임 후 곧장 정우현을 찾았다.
그녀는 첫 해외 순방으로 미국 방문 시, 미국 대통령이 아닌 뉴욕의 유엔 사무총장을 먼저 찾을 정도로 정우현과의 만남을 고대했다.
“반갑습니다!”
새 러시아 대통령이 정우현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이에 정우현이 화답했다.
그러자 새 대통령이 말했다.
“모두 사무총장님 덕분입니다. 전 대통령의 크나큰 과오를 씻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러시아로 태어날 수 있게 각고의 노력을 하신 분이 바로 사무총장님입니다.”
정우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러시아의 자유는, 러시아 민중이 얻어 낸 것입니다. 그들의 피와 눈물이, 오늘날의 자유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하고 정우현은 새 대통령과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과 그 의미에 관해 계속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 정우현이 이제까지의 부드러운 얼굴과 달리 표정을 사뭇 굳게 하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대통령님.”
“예, 사무총장님.”
“하지만 이번 일로 러시아는 국제 사회에서 크나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새 대통령 또한 정우현을 따라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길로 당장 우크라이나로 갈 거예요. 먼저 사무총장님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잠깐 온 거고요. 하여간 우크라이나에 가서 러시아 국민을 대표해 가슴 깊이 사죄하고, 또 전쟁 피해에 관해 배상할 계획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배상은 물론 돈바스 지역 등 이번에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모두 돌려줘야 합니다, 대통령님.”
“예,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하는 여성 대통령의 눈을 정우현이 가만히 보고서는 순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
“크림반도도 돌려주십시오.”
“…크림반도도요?”
“예.”
이에 새 대통령이 난색을 보였다.
“거긴 이번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땅인데요…. 더군다나 투표를 통해 96.77%라는 압도적인 표결로 우크라이나에서의 독립 및 우리 러시아로 귀속이 결정된 건입니다.”
정우현이 다소 날카로운 표정으로 곧장 말했다.
“군사적으로 강제 합병 후, 러시아의 통제하에 이뤄진 투표 결과를 어떻게 믿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러시아는 그런 엉터리 투표로, 히틀러 이후 현대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고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토록 부패하고 추악한 전 정권을 이어 나가고 싶으신 겁니까? 불과 조금 전에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러시아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어요? 또한 크림반도의 합병이야말로, 이번 우크라이나 침략의 전초전인 걸 대통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
새 대통령 또한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러시아 민중의 피와 땀으로 결성된 새 자유 민주 정부의 대통령이다.
그런 새 정부는 모든 면에서 전 정부와 달라야 했다. 그래야 그들 스스로의 정당성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워 타국 침해를 정당화하고 국제 사회의 문제로 남는다면, 전 정권의 연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알겠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새 대통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림반도 또한 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명분도 없는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패했기에 당연한 처사입니다. 또한 해당 지역은 본디 정당하게 우크라이나의 영토이기도 하고요.”
하고서 정우현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진정 그 지역 내 사람들이 압도적인 차이로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꾀하고 심지어 러시아로의 귀속을 원한다 해도, 우선 우크라이나에 돌려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자체적으로, 그들의 미래는 그들이 알아서 결정하게 내버려 둘 일입니다. 군사력을 통한 강제 합병 후 이뤄지는 반 강제적인 투표는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정우현 사무총장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넘어 거의 일방적으로 따르는 러시아의 새 대통령이다.
그만큼 그녀는 정우현을 깊이 존경했다. 나아가 그로 인해 자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러시아는 지난 과오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가게 됐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정우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통령님.”
“예?”
“우리 유엔과 관련해서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하고 그가 재차 논리적으로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말을 잠자코 듣는 러시아의 새 대통령은 때론 놀라기도 하고, 때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등 끝내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 * *
해가 바뀌어 2023년 뉴욕 본부 안전보장이사회의장.
정지되었던 안보리 기능이 재개되어 모처럼 상임 이사국 5개국 대표와 사무총장인 정우현까지 해서 총 6명이 회의장 상석에 앉았다.
5개국 대표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정우현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
5개국 대표가 가만히 정우현을 바라봤다.
“러시아의 상임 이사국 지위 박탈 건과 관련해서입니다.”
“…뭐라고요!”
중국 대표가 즉각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무총장님!”
이에 반해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대표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들은 정우현으로부터 해당 안건을 미리 전해 듣고 적극 찬성하기까지 했다.
“아시다시피 유엔은 우리 인류의 평화를 위해 조직됐습니다.”
정우현이 말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그것도 안보리 상임 이사국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끔찍한 전쟁 범죄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작년 혁명에 의해 사망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공식 석상에서 저를 상대로, 그러니까 유엔이라는 조직의 수장인 사무총장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유엔과 세계 평화의 근간을 흔드는 실로 심각하기 그지없는 적대 행위입니다.”
“….”
“애초 이 안보리 상임 이사국 시스템의 존재 이유는, 2차 대전 후 패전국인 전범 국가를 벌하고 승전국가인 연합군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범 국가로 추락한 러시아의 상임 이사국 지위를 유지해야 합니까?”
정우현의 말에 5개국 대표들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중국 대표가 눈치를 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록 쉽게 상임 이사국 지위를 박탈해선 안 됩니다. 사무총장님, 아시다시피 국제 사회는 힘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고, 힘은 균형을 갖추고 있을 때 안정적이죠.”
하면서 미국 대표를 잠시 노려보던 중국 대표가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지위를 잃는다면, 저 미국의 독주를 대체 어떻게 막습니까? 우리 중국만으로는 힘에 부치지 않을까요?”
이에 미국 대표가 즉각 말했다.
“흠! 일당 독재의 나라가 힘의 균형을 운운하니 굉장히 우습군요. 이봐요, 당신네 나라나 균형을 찾아봐요, 좀.”
“뭡니까! 또 내정 간섭입니까!”
“자, 자, 조용.”
서로를 향해 비난하는 미국과 중국 대표를 향해 정우현이 말했다.
“조용하세요들. 어쨌거나 러시아의 상임 이사국 지위 박탈 건과 관련해 모인 자리입니다. 이와 관련 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모이고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중국 대표가 말했다.
“우리 중국은 무조건 반대입니다, 반대! 사무총장님, 이 안건으로 안보리회의를 연 것 자체가 실수입니다. 유엔 헌장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단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통과될 수 없는 사안을 가지고,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회의를 합니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러시아는 상임 이사국 지위를 유지할 것입니다!”
“중국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잠자코 있던 정우현이 말했다.
“현재 유엔의 시스템으로는 한 국가의 안보리상임이사국 지위를 강제로 박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고서 그가 고개를 돌려 회의 내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던 러시아 대표를 바라봤다.
중국 대표는 사실 자국의 이사국 지위 박탈과 관련해 말이 오고가는 데도 가만히 있는 러시아 대표가 답답하고 의아한 상태였다.
“러시아가 스스로 상임 이사국 지위를 포기하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렇죠, 러시아 대표님?”
정우현의 말에 놀랍게도, 러시아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우리 러시아는, 현 시간부로 안전보장회의 상임 이사국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겠습니다.”
이에 눈알이 튀어나올 듯, 중국 대표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이이이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