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수두 바이러스 박멸.’
세상이 다시 난리가 났다.
왜냐하면 그간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법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증상을 완화시키는, 즉 대증 요법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변이가 워낙 예측 불가능하기에, 그 흔한 감기조차 증상만 완화하며 환자의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치료할 뿐 약물로써 근본적으로 낫게 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실정이다.
한데 그걸 정우현이 해냈다.
WH001로 헤르페스 3형 바이러스가 완벽하게 사라졌으니까.
“어떻게 수두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실 생각을 하셨죠?”
“할리우드에서 영화 촬영 중인 것으로 아는데, 언제 그렇게 또 연구하신 겁니까?”
“수두 말고 다른 바이러스 치료도 연구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 약이 훗날 판매된다면, 가격을 대략 얼마로 책정하실 건가요? 특허로 보호받는 판매 기간에 말입니다!”
뉴저지 우후 제약 회사 본사.
정우현이 회사 빌딩 정문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각국의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그에게 몰려들었다.
이에 엄규환을 필두로 경호팀이 일제히 회장 정우현을 막아서고 길을 텄다.
그런데도 기자들은 어떻게든 팔을 뻗으며, 신약과 관련해 정우현에게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애를 썼다.
“정우현 님, 정우현 님! 약에 관해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정우현이 차량에 탑승하기 전 기자들을 둘러보고 짧게 말했다.
“이와 관련해 아직 뭐라고 하기엔 이릅니다. 1상입니다. 이제 겨우 1상을 테스트했어요. 나중에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서 따로 의견을 말씀드려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고서 차에 탑승했다.
* * *
뉴저지에서 전용기를 타고 할리우드로 향하는 정우현.
엄규환이 옆에서 우후 제약 회사의 신약에 떠들썩한 각종 신문과 잡지를 보고 들떠 있다.
“하하하, 도련님, 또 한 건 해내셨군요.”
그러고서는 손뼉까지 치며 말을 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니에요, 실장님.”
정우현이 얼른 답했다.
“아까 기자들한테 말했듯 더 지켜봐야 합니다. 약이란 건 그리 쉽게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으니까요.”
“음, 그래도.”
하고서 엄규환이 말을 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1상 통과만으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좋은 일에 기뻐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엔 1상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약이 부지기수니까.
“음, 맞는 말이네요.”
하고 정우현이 여유롭게 표정을 다소 풀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정우현은 확신하고 있었다.
WH001이 2상은 물론, 3상 또한 완벽히 통과하리란 것을.
그리고 실제로도 해당 신물질은 완전했다. 수두 바이러스를 말끔히 없애는 것은 물론 부작용도 전혀 없었다.
마치 정우현이 오래전 푸앵카레 추측을 완벽하게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 후 세계 수학 인사들에게 검증을 받기까지 기다렸던 것처럼, 이번에 개발한 신약도 똑같았다.
즉, 신약이 3상을 통과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저는 느낌이 옵니다, 도련님.”
엄규환이 다시 말을 꺼냈다.
“뭐가요?”
“이번 약, 아니, 도련님의 제약 회사 전체가 대박이 날 거라는 느낌이요.”
“……하하, 왜요?”
“벌써 시간이 꽤 흘렀네요. 도련님 한국 영재 학교 졸업할 즈음, 저랑 이렇게 비행기 타고 미국에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음.”
정우현이 당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전기차요. 전기차를 만든답시고 지금 우리 우후 전기차의 사장인 일론의 엔티 모터스에 갔지 않습니까?”
“예, 그랬죠.”
“하하, 그때도 제가 느낌이 왔다는 거 아닙니까. 도련님의 새 사업이 대박이 날 것 같다는.”
“……음, 실장님, 그때는 그렇게 말씀 안 하셨던 것 같은데요?”
정우현은 물론 그날을 기억했다.
그때 엄규환은 오히려 일론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며, 정우현의 새 사업에 우려를 표했었다.
“아아.”
정우현의 말에 엄규환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뒤늦게 입을 열며 능청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그랬나요? 뭐, 어쨌든,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에도 도련님을 향한 저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는 게 중요하겠죠! 하하하하!”
하고 멋쩍게 웃는 엄규환을 정우현은 미소를 짓고 바라봤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엄규환이 걱정을 했든 굳게 믿었든, 지금도 여전히 충실하게 자기 옆에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우현은, 주위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그들을 애착하게 됐고, 더 잘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시간 또한 함께 웃고 행복하고 싶었다.
“맞아요.”
정우현이 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장님과 제가 함께한다는 건 좋은 일이죠!”
“오우!”
하고서 엄규환이 기뻐했다.
“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도련님의 그 신약이 남은 테스트도 잘 통과하고, 그리고 지금 가는 할리우드에서도 남은 촬영을 잘했으면 합니다!”
“네.”
정우현이 답했다.
“그게 저한테는 지금 제일 중요하네요.”
* * *
그리고 다시 할리우드의 <바이 더 베테랑> 촬영장.
감독 정우현이 배우와 스태프 모두 앞에서 크게 말했다.
“자, 이제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정우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 지금까지 정말 잘해 주셨습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겠죠. 지금부터 우리가 얼마나 집중하는지에 따라서 이 영화 <바이 더 베테랑>이 평범한 작품으로 남을지, 아니면 영화사에 길이길이 좋은 작품으로 남을지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모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합시다. 아시겠습니까?”
“네에!”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대답했다.
이에 정우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외쳤다.
“자, 얼른 촬영을 시작합시다!”
브래드의 집 안마당.
“레디, 액션!”
안마당이 많이 달라져 있다. 납작 의자는 없고, 마당 곳곳에 나무는 물론 꽃이 심어져 있다. 이전의 볼품없는 마당이 아니라 보기 좋은 정원 느낌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브래드가 술을 마시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마당 한가운데에는 아담한 2인용 야외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식탁보와 함께 먹음직스러운 애플 파이와 오렌지 주스까지 있다.
즉, 브래드는 이대로 링을 기다리고 있다.
링이 오면 맛있는 음식을 먹인 뒤, 놀아 주다가, 이제는 더 이상 술 같은 건 먹지 않겠다고 말할 셈이었다.
한데 아이가 오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기다려 보지만, 아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내 해가 지고, 테이블 위에 있던 음식은 모두 말라 버렸다.
이에 브래드가 음식을 치운다.
그래도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하루 정도는 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다시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리고 링을 기다리는 브래드. 하지만 링은 또 오지 않고, 해가 지고 홀로 음식을 치운다.
다음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점점 표정이 굳어 가는 브래드.
급기야 어느 날 아침, 브래드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거의 깰 듯이 테이블 위에 놓는다.
그러고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울타리 문을 본다.
하지만 여전히 링은 나타나지 않고,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번개가 친다.
우릉릉, 쾅쾅.
쏟아지는 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모두 젖는다.
브래드가 가만히 그것들을 보다가 발로 테이블을 차 버린다.
그러고서는 안마당 한구석에 있던 낡은 납작한 의자를 도로 가져와 마당 가운데에 놓는다.
동시에 어느새 손에 들린 술병.
의자에 철퍼덕 앉고는 술병을 입에 대려고 하던 한순간.
브래드가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울타리 문밖으로 나가는 브래드.
“컷, 오케이!”
정우현이 크게 외쳤다.
“와우, 브래드. 연기 좋은데요!”
하고 브래드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하하하!”
이에 브래드가 기분이 좋아 껄껄 웃었다.
“집중 좀 했다, 우.”
그 또한 자신의 연기가 만족스러워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않니. 극 중 인물들의 변화와 함께,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되지.”
“맞아요! 쉽진 않지만, 이제부터의 촬영으로 우리 영화가 판가름 날 겁니다.”
“그래, 그래.”
하고서 브래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른 또 촬영하자. 이 느낌 그대로, 얼른.”
이에 다시 시작된 촬영.
브래드가 비를 맞으며 울타리 문밖으로 나와 여기저기를 바라본다.
하지만 링은커녕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다.
비가 많이 오는 데다, 이 동네는 원래 인적이 많지 않은 시골이다.
중동에서 온갖 활약을 펼쳤던 전쟁 영웅의 모습으로 온전히 전역했다면, 근사한 주택도 지원받고 넉넉한 연금으로 괜찮은 동네에서 살아갔겠지만, 브래드는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결국 연금도 모두 삭감된 채, 거의 무일푼에 가깝게 자리 잡은 곳이 이 동네다.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를 가다가, 사람들이 조금 있는 상점 근처로 향했다.
그러고서 다짜고짜 여러 사람에게 링에 관해서 묻는다.
“소녀를 본 적 있습니까?”
“……누구요?”
그제야 브래드는 자신이 소녀에게 이름조차 묻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아시아인 소녀입니다. 키는 내 허벅지만 하고, 웃을 때는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생기는…….”
“아하.”
순간 브래드의 뒤에서 한 중년 여성이 소리를 냈다.
“노란 우산 들고 다니는 아이지?”
그러고서 여성은 소녀의 이름을 말하며 아는 체를 한다.
“맞습니다, 그 아이. 지금 어디, 어디 있습니까?”
“뭐, 집에 있겠지. 이 가게에서 나가서 왼쪽으로 간 다음 끝에 있는 집인데…….”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가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순간 중년의 여성이 브래드에게 말한다.
“근데 그 집.”
“……예?”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왜요?”
“안 좋은 일이 있거든.”
“…….”
“하여간 그렇게 알고 가지 마요.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여자의 말을 뒤로하고 가게 밖으로 나온 브래드.
비는 더 세차게 쏟아진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는 브래드에게 링의 집에 가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하지만 브래드에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 그래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은 직감이 든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에게 놀란다.
이와 같은 직감은 정말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흡사 과거 중동에서, 작전을 수행했을 때 종종 느꼈던 그런 감정이다. 보통 중요한 순간에, 이런 느낌이 들었다. 적과의 교전을 앞두거나 했을 때처럼.
일병 정우현.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일병 정우현이 죽기 직전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었다.
이런 생각이 이르자 브래드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링이 위험하다.
소녀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내 중년 여성이 가르쳐 준 집에 도착한 브래드.
한데 입구부터 수상하다. 비가 오는데도,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데다 한쪽 귀퉁이가 파손까지 되어 있다.
이에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간 브래드.
집 안이 엉망진창이다. 가구고 뭐고 사방으로 흩어진 부서진 잔해로 인해 바닥엔 발 디딜 틈이 없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엌칼을 손에 든 브래드.
그리고 방문 하나를 열어 본다.
링의 방이다. 핑크빛의 아기자기한 침구류가 있는 등 누가 봐도 작은 소녀의 방이다. 한데 링은 없고, 소녀의 방 또한 어지럽혀져 있다.
끼익.
이에 브래드가 더욱더 긴장하고 큰 방의 문을 열어 본다.
“……아저씨!”
괴로운 표정으로 눈물을 잔뜩 흘리고 있는 링이 깜짝 놀라며 브래드를 보고 외친다.
이와 함께 놀라운 광경이 브래드의 시야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