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정우현은 며칠을 집에서만 있으며 쉬었다.
학교는 갈 필요 없었다. 한국 영재 학교의 학생 및 선생이 이번 러시아 모스크바 사건의 당사자였기에, 학교에서 자체 휴교를 했다.
이에 정우현은 모처럼 집에 있으면서 당시의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으음.’
인간이란 때때로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더군다나 위기에 강한 사람이면 더 그렇다.
정우현 또한, 극장 안에서 단순히 긴장하는 것을 넘어온 신경을 위기 극복을 위해 집중했다. 그래서 지나고 돌이켜보니 당시엔 잘 몰랐지만, 그가 해낸 일이 보통이 아님을 뒤늦게 깨달으며 되새기고 있었다.
특히 이번엔 지난 9.11 테러를 막아 낸 것과 모든 면에서 많이 달랐다. 물론 9.11 테러를 저지한 것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한 일이다. 전생과 비교하면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지키고 다치지 않게 됐으니.
하지만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막아 내 결국 아예 일어나지 않게 했다는 것에서 이번 모스크바 테러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미국인들은, 지난해 9월 11일에 테러를 사전에 막아 냈다는 백악관의 발표를 보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넘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머릿속에는 9.11 테러라는 사건 자체가 있지 않았다. 그저 한 테러 시도가 있었고, 정부가 잘 막아냈다는 것뿐이었으며 심지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마저 잊혔다. 혹자는 애초 정부의 발표를 보고서도, 별일 아닌 일을 두고 호들갑을 떤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데 이번에는 실제 테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정우현이 있었다. 어디 안전한 자신의 방에서 오로지 컴퓨터로써 테러를 막아 낸 게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이미 일어난 큰 사건을 어떻게든 막아 내야만 했다.
그래서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 남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정우현이 모스크바 극장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 즉 그로 인해 무사히 극장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민간인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자리에서 울고 있었던 임산부와 엄마 곁을 떠나기 싫어했던 작은 아이 그리고 그의 어머니, 또한 단순히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공포에 떨어야 했던 여러 사람, 마지막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까지.
그 모두의 얼굴을 기억이 나는 대로 낱낱이 떠올리자, 정우현의 가슴이 모처럼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그 모든 사람이 목숨을 건지고,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 숨 쉬며 평안히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아.’
정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에 있는 창문을 통해 지상 여기저기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활기찼다. 활기차면서도 밝았다.
그러고서는 곧장 다시 자신이 살린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 저 지상의 사람들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에 이르자, 불현듯 힘이 샘솟았다. 더 이상 집에서 쉬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들?”
모처럼 옷을 갖춰 입고 거실로 나온 정우현을 보고 어머니 황희진이 조금 놀라서는 말했다.
“나가 보려고?”
“…예!”
그간 며칠 집 안, 그것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정우현이기에 외출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이 조금 낯선 어머니였다.
“…괜찮겠어? 더 쉬지? 엄마가 우현이 좋아하는 음식 해 줄 거니까.”
하는데 정우현이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러고는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나가서 놀고 싶어요!”
“…하하하, 그래.”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면밀히 바라봤다.
다행히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환히 웃는 정우현이었지만, 어딘가 더 어른스러워진 것만 같았다.
즉 정우현은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 * *
“…도련님, 이렇게 다시 함께하니 정말 기쁩니다.”
엄규환이 오랜만에 정우현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밖으로 나와 차를 몰고 정우현을 뒷좌석에 태우고서 말했다.
“…하하, 실장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도련님 덕분에 항상 잘 지낸답니다….”
하고서 엄규환이 어울리지 않게 백미러로 정우현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그날 자리를 비워서….”
“아니요!”
정우현이 모처럼 조금은 단호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
“괜찮다고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그날 자리에 안 계신 실장님이 아니라, 따로 개인 시간을 가지라고 했던 제 탓이잖아요!”
“…음, 하지만 그래도….”
“아니요, 실장님! 저는 정말 괜찮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와 관련해 다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서 입을 다무는 정우현이다.
엄규환이 다시 백미러를 통해 정우현을 살피며 운전을 했다.
정우현의 모습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조금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행히 엄규환이 제대로 본 것이었다.
정우현은 자신의 경호원이 계속 스스로 질책하며 미안하다는 등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엄규환이 계속 운전을 하면서 생각하다가는, 한순간 마음을 먹고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
“다시는 지난 일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하고서 그가 믿음직스럽게 말을 이었다.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엄규환의 말에 가만히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정우현이 즉각 밝게 말했다.
“예!”
그러고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정하고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더 잘하겠습니다! 학교도 다시 열심히 다니고요!”
“…하하하.”
이러나저러나 정우현의 아이다운 말에 엄규환이 모처럼 웃었다.
“도련님은….”
그러고서는 농담까지 했다.
“…지금도 완벽한데, 어떻게 더 잘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 * *
그러고서 그들은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남동 권유라의 집이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일 이후, 역시 두문불출하는 친구를 데리고 모처럼 밖에서 놀기 위해 정우현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정우현은 차에서 내려 권유라네 대저택의 커다란 대문 앞에서 도어 벨을 누르려다가는, 한순간 멈칫하고 몇 발자국 걸어 담장 밖 그녀의 집 옆에 섰다.
그러고는 작정한 듯 큰 목소리로 불렀다.
“유라야!”
인기척이 없자, 그가 더 큰 목소리로 힘껏 외쳤다.
“권유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탁!
이내 정우현이 외친 곳 위로 창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고는 한 소녀가 잠옷 차림에 머리에 핀을 꼽은 채 창밖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권유라였다. 역시 방에만 있던 권유라가 정우현의 외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
그녀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눈을 껌벅껌벅 뜨며 길 위에 있는 정우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순간 활짝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우현이다아아아아아아아!”
정우현이 씨익 웃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
권유라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창문 위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는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집 안에 있던 권유라의 어머니조차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물론 그녀의 어머니는 이내 정우현을 보고 권유라 못지않게 활짝 웃었다.
* * *
그렇게 정우현은 친구를 데리고 두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바로 서초동 구태호네 집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구태호네 집 현관문에 이르러 정우현이 도어 벨을 눌렀다.
“아, 안녕하세요!”
“….”
정우현이 곧장 씩씩하게 말했다.
“정우현입니다. 태호랑 놀러 왔어요. 유라도 함께요!”
“…아아!”
이에 구태호네 어머니가 탄성을 내뱉더니 이내 곧 집 안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호야!”
“….”
“구태호오오오오!”
“…왜?”
“친구 왔다.”
“….”
“우현이!”
“뭐어어어어어?”
순간 집 안에서 구태호의 목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더니 우당탕탕 뛰는 소리가 났다.
찰칵.
그리고 곧장 현관문이 열렸다.
“우현아아아아아아!”
놀랍게도 구태호는 급히 나오느라 아예 팬티 차림이었다.
“아아악!”
그러다가는 뒤늦게 권유라도 있음을 깨닫고 팬티 부분을 애써 가리며 다시 급하게 우당탕탕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하하하!”
그 모습을 보고 정우현과 권유라가 크게 웃었다.
“아싸아아아아!”
소란은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이다아아아아아!”
구태호가 집 안에서 옷을 챙겨 입으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아예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 * *
이렇게 셋은 이전 같은 모습으로 함께하게 됐다.
“근데 우현아.”
권유라가 밝은 표정으로 정우현을 불렀다.
“응?”
“우리 오늘 어디 가는 거야?”
“아.”
하고서 정우현이 답했다.
“놀이공원!”
“와아아아아!”
놀이공원을 간다는 말에 권유라가 기뻐하며 다시 소리쳤다.
실상 그녀는 오늘 정우현을 만난 이래 쉼 없이 웃고 떠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구태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정우현이 그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태호야, 왜? 어디 다른 데 가고 싶어?”
“아니….”
하면서도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놀이공원도 좋지만 나는….”
“응?”
“동물원도 가고 싶어.”
“아, 하하하하!”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냐는 듯 정우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동물원도 가면 되지! 오늘 하루 종일 밖에서 놀자!”
“…헤헤, 그렇지?”
구태호가 정우현의 말에 만족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동물원에 가고 싶은 구태호였지만, 자신이 무척이나 따르는 정우현이 놀이 공원을 먼저 말해 괜스레 그의 눈치를 봤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당연하지! 좀 있으면 다시 학교 가야 하잖아! 그전까지 오늘처럼 우리 이렇게 만나서 매일매일 신나게 노는 거야!”
“오예에에에에!”
권유라가 기뻐하며 외쳤다.
“…그래, 우리 너무 집에만 있었던 것 같아. 맨날 놀기도 아까운 시간에….”
구태호 또한 뒤늦게 반성한다는 듯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하, 자, 가자!”
정우현이 친구들을 이끌며 크게 소리쳤다.
정우현, 그리고 권유라와 구태호.
이미 오래 함께해 무척 끈끈하기 그지없는 이들 사이는, 실상 이번 모스크바에서의 일로 한층 더 탄탄해졌다.
아니, 탄탄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무려 인질극이라는 고난의 경험을 함께 겪었으니까.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끼리는, 그렇지 않은 이들은 느낄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을 나눌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권유라와 구태호는 정우현에 의해 목숨을 지켰다.
정우현이 인질극 초기에 기지를 발휘해, 친구들이 일찌감치 극장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으니.
즉 두 친구에게 이제 정우현은, 단순한 친구 이상의 거대한 존재였다.
권유라와 구태호는 이를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며, 정우현을 거의 절대적으로 따르게 됐다.
* * *
한편 시일이 지나고, 정우현의 핸드폰에 익숙한 발신 번호가 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우현 군.”
작년에 전화했던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어떻게, 좀 푹 쉬었나요?”
“예.”
하고서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아, 다름이 아니고.”
비서실장이 목소리에 사뭇 힘을 주고서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대통령께서.”
“….”
“정우현 군에게 훈장을 수여하실 예정입니다.”
그러면서 좀 더 또렷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사실 훈장으로도 부족하죠. 우현 군으로 인해, 우리 국민은 물론 다른 나라의 사람들까지 수십 명이 새 삶을 살게 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