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누가 앞길을 막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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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누가 앞길을 막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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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누가 앞길을 막아 (4)
2022.09.03.
“……이익! 원한다면 그리 해드리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시오!!”
남궁영이 이를 까득 깨물면서 소리를 질렀다.
“두 눈을 뜨고 있어도 동태눈깔에 불과하니.”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척사영과 슌스케를 쳐다봤다. 그 둘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는데 만우가 전부 다 전음을 통해 미리 말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비무대회는 순전히 동군영의 껍질을 깨 주기 위한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그 무대에서 주인공인 동군영이 퇴장을 하였으니, 이 여흥에 만우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깽판을 놓기로 한 것이다.
상품으로 내건 대환단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척사영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으나 대문파의 세 고수라는 놈들은 상품이 눈이 멀어, 상대가 유명하지 않아,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척사영을 눈 여겨 보지 않았다.
그러니 만우가 비웃을 수밖에 없다.
상대를 겉모습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무림의 격언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대문파의 대세들이라고.
대문파, 대세가라는 허울이 없다면 풍찬 노숙을 하다가 딱 칼 맞아 죽기 좋은 습관을 가진 놈들이다.
“아, 해 보라니까.”
만우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단상 위의 세 고수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제자들을 독촉했다. 그에 비무대회에 출전한 제자들이 쭈뼛거리면서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
그나마 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이것이 창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저들이 자랑하는 대문파와 대세가의 앞날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모습이랄까.
“난 기권하겠소.”
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주고후가 손을 들고서는 기권을 선언했다. 주고후는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비무가 아니오. 그리고…….”
주고후는 그렇게 말하면서 만우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만우 뒤에 실려 나가는 동군영을 쳐다봤다.
“이제 이곳에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한들 저 선비에게 묻혀서는 어디 눈에 차기나 하겠소? 그러니 난 됐소.”
주고후가 기권 선언을 하자 황실 고수들 역시 같이 기권을 선언했다. 주고후가 비무대에서 내려가자 만박자가 고개를 돌려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더 기권하실 분, 계십니까?”
척사영과 슌스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무대에 오른 남궁과 무당, 소림의 무림인들은 마음 같아서는 내려가고 싶다는 얼굴이었으나 단상 위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가문과 문파의 어른들 때문에 차마 그러고 싶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만박자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러면 검주 만 대협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진행하고자 하는데, 두 분, 이의 없으십니까?”
만박자는 예의상 척사영과 슌스케에게 물었다. 척사영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슌스케 역시 그런 척사영의 옆에서 자세를 잡았다.
“제가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을 것이오.”
척사영은 슌스케의 말에 그리 대답하면서 반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슌스케가 피식 웃으면서 기수식 자세를 풀고는 뒤로 물러났다.
“만박자! 어서 대회를 진행하시오!”
남궁영은 그런 척사영을 보면서 이를 뿌득하고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다.
대환단.
오만한 검주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비무대회에서 승리해 대환단을 수중에 넣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진해진인과 무천대사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원래라면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그들이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었으니 말이다.
“전원의 동의하였기에 대회의 방식을 바꾸겠소. 그러면…….”
만박자는 뒤로 물러서면서 손을 크게 휘저었다.
“시작하시오!!!”
파바바박!!!
무당과 소림, 남궁의 무학이 척사영을 향해 동시에 펼쳐졌다.
*****
덜커덩 덜커덩
마차를 끄는 불존의 표정이 어두웠다. 호광 비무대회가 열렸던 개봉시가 발칵 뒤집히면서 또 다시 소림의 명성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물론 불존이 검주에게 패배했다는 것보다는 그 여파가 약하다고는 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명성에 충격이 누적되다 보면 언젠가는 소림의 단단한 명성이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번 비무대회는 무려 오천 명이라는 인원이 구경꾼으로 몰려든 비무대회였기 때문이다.
‘척사영이라.’
불존은 묵묵히 마차를 끌면서 비무대회 우승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척사영.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동이(東夷)에서 왔다는 그녀는 만우를 은공이라 부르며 따랐다. 허나 눈 여겨 보지는 않았는데 특이한 병기를 사용한다는 것 외에는 불존도 그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척사영에 의해 소림의 동량이라 불리던 사제 강무가 처참하게 깨졌다.
아니, 강무만이 아니었다.
강무와 비무대회에 참가한 나한당 소속의 승려까지 처참하게 깨졌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소림만 패배한 것이 아니라 남궁, 무당까지 함께 졌다는 정도.
‘검주도 아닌 검주를 따르는 여인에게.’
하지만 상대는 그 검주도 아니었고 검주를 따르는 무명에 불과한 여인이었다. 검주에게 무림맹이 백기를 들었다는 소식이 파다해 서서히 분열이 일어나고 있을 텐데 이제는 검주의 수하에게까지 정파의 대들보라 불리는 이들이 패배했다.
“아 흔들리잖아!”
“미, 미안하외다.”
그렇게 걱정을 하는 불존도 남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마차가 조금 흔들렸다가 만우가 대번에 큰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불존을 향해 바락 소리를 지른 만우는 세상모르고 기절해 있는 동군영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며칠 째지?”
“사흘째입니다 은공.”
척사영이 만우의 말에 답했다. 비무대회가 끝나고 개봉시에서 빠져나온 지 사흘이 지나 이제 호북성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동군영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정도면 당연한 일입니다. 무림인으로 따지면 선천진기까지 모두 다 끌어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얹혀가는 군입 주제에 조용히 안 해?”
만우가 도끼눈을 뜨자 한 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만박자가 이크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호북성으로 향하는 길에 만박자가 군식구로 함께 가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의술.
이 세상천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만박자라는 이름답게 만박자는 생사마의나 청수신의만큼은 아니지만 의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군영의 상태를 진단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만우는 만박자의 동행 요청을 받아들였다.
물론 말이 많은 데다가 자신을 대놓고 관찰하는 만박자가 거슬려 만우가 틈 날 때마다 으르렁대긴 했지만, 만박자 덕분에 동군영은 빠른 회복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호북성으로 가시면 제갈세가에 들리실 예정이십니까?”
“그건 왜.”
“만 대협이 제갈세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만 대협이 천하제일인이 되신 이후 무림의 모든 눈과 귀가 대협에게로 향해 있으니까요.”
만박자의 말에 만우는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그런데 그때 동군영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으, 으음…….”
비무대회에서 동군영은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힘의 십일 할을 끌어냈고, 그 결과 기력을 탈진하여 무려 삼 일을 앓아누웠다.
그런 동군영이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동 부사. 동 부사. 정신이 드는가?”
설미수가 가장 먼저 동군영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살폈다. 힘겹게 눈을 뜬 동군영은 설미수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젖은 천을 입에 물려 주십시오. 물을 넘기기에는 힘들 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말을 할 정도는 될 겁니다.”
만박자는 천에 물을 적셔서는 만우에게 건넸다. 만우가 그것을 입에 물려주자 동군영은 잠시 그것을 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을 떼도 된다는 뜻이다.
“여기가…… 어딥니까.”
동군영은 바짝 말라서는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만에 깨어나 말을 하려다 보니 입 안이 쩍쩍 마르는 모양이었다.
“호북성으로 가는 길이네. 자네 무려 사흘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 사흘이나.”
“사, 사흘이나 말입니까?”
놀란 동군영이 벌떡 일어나려다가 크윽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드러누웠다. 설미수가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서둘러 말렸다.
“잘못하면 상처가 덧날 수도 있네. 그러니 자중하시고…….”
“탈 안 납니다요.”
만우가 설미수에게 걱정 말라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동군영이 그런 만우를 발견하고서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만우. 자네…….”
“대회는 무사히 끝이 났습니다. 누가 이겼나굽쇼? 당연히 우리가 이겼지요. 누가 이기겠습니까.”
척사영과 슌스케가 고작해야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인 무림인들에게 질 리 없다. 하지만 동군영이 묻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피를 흘려 창백해진 안색으로도 고집스럽게 입을 꽉 다문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군영의 눈길에 만우가 피식 웃었다.
“똥구녕 나으리.”
“동…… 군영일세.”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만우가 동군영의 수혈을 짚기 위해 손을 뻗었다. 지금 동군영에게는 신의의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영양분과 휴식이 필요했다.
애당초 동군영이 입은 상처 중에 사경을 헤맬 정도의 중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군영의 상처는 질 좋은 금창약을 발라 꽁꽁 싸매 두었으니 푹 쉬면 나을 것이다.
푹 쉬면서 자연회복력을 끌어올리는 데 수면보다 좋은 것은 없다.
“뭐, 처음 만나고 난 이후로 가장 쓸 만한 모습이었다고 해 두지.”
“그…….”
꾸욱.
추욱.
양반 동군영과 역졸 만우가 아닌 천하제일인 만우가 동군영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것을 느낀 동군영이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만우는 그런 동군영의 수혈을 짚었다. 그리고는 축 늘어진 동군영의 몸을 공력으로 붙잡아 가부좌 자세를 취하게 한 다음 동군영의 등에 자신의 장심을 붙였다.
“검주 대협.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만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단박에 눈치챈 만박자가 만우를 말리려고 하였다. 만우가 자신의 공력을 동군영의 몸에 불어넣어 원기를 보해 주려고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그리 드물지 않은 광경이나 문제는 만우가 격체공력을 하려고 하는 장소가 흔들리는 마차라는 점이다.
내공이란 것이 지극히 민감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운기조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시끄럽지 않고 주변의 방해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내공을 움직이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사람 하나 폐인 되는 것은 삽시간이기 때문이다.
우웅!
하지만 만박자가 말리려고 한 것이 무색하게도 만우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동군영의 몸속에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어 동군영의 기운을 보(保)했다.
“호들갑 떨긴.”
만우는 간단한 격체전력을 순식간에 끝낸 다음 씩 웃어 보였다.
다른 이의 몸에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비단 자신의 몸만이 아니라 상대의 몸도 훤히 꿰고 있거나 말 그대로 내공을 제어하는 수준이 하늘에 달해야만 가능한 정도다.
만박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람에 말을 미처 하지 못했다.
‘천하제일인!’
너무나도 쉽게 격체전력을 해 내는 것을 본 만박자는 진심으로 놀랐다.
“고작 이 정도로 놀라기엔 만박자란 이름이 아깝군. 명색이 천하제일인데.”
오히려 만우가 그런 만박자를 나무랐다. 만박자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이내 눈빛을 달리하면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대협의 모든 것을 이 만박자가 관찰하고 기록하여 기억하겠소이다.”
“할 수 있다면.”
관찰하고 기억하는 자, 만박자와 천하제일인 만우 사이에 가벼운 신경전이 오고갔다. 그런데 그때 덜컹하더니 마차가 섰다.
“대장님.”
그리고는 마부석의 작은 창이 빼꼼 하고 열리더니 그 사이로 슌스케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제갈세가의 가주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제갈명공?”
안 그래도 제갈세가에 직접 찾아가기 위해, 직접 찾아가 맹주와 황보세가에 그러했듯 죄를 묻기 위해 찾아가려도 했던 만우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가만히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주가 만우를 만나러 왔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머리 하나 쓰는 것만큼은 정파제일이 바로 제갈세가다.
“아주 재밌어. 아주.”
만우가 흘흘 하며 웃어 보이더니 슌스케에게 말했다.
“올라타라고 해.”
그러자 만박자의 눈이 커졌다. 정파를 떠받드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가주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인데, 만우는 그 가주를 아주 작정하고 홀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눈앞에 있는 이 거인(巨人)이 천하제일인이란 것을 깨달은 만박자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림의 질서가 바뀌어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