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누가 앞길을 막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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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누가 앞길을 막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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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누가 앞길을 막아 (3)
2022.08.30.
동군영이 비칠거리며 물러나자 강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타불. 시주. 소승이 손을 과하게 쓸 생각은 없으니 이제 기권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강무는 눈앞의 이 선비를 굳이 때려눕히고 싶지 않았다. 검주 만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선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상대가 공력을 가진 무림인이었으면 고민하지 않고 손을 썼겠지만 저건 누가 봐도 그냥 책만 읽던 서생에 불과했다.
“후욱, 후욱.”
동군영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면서 부러진 철검을 들어올렸다. 강무는 그런 동군영의 손에 들린 철검마저 검병을 후려쳐서는 빼냈다.
“정녕 한낱 비무 따위에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이오? 이만 하면 되었소. 그러니 그만하시오.”
강무는 동군영을 말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동군영은 멀리 떨어진 철검을 줍기 위해 몸을 돌렷다. 강무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한 동군영을 보면서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결국 쓰러뜨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강무는 고개를 돌려 사회를 맡은 만박자를 쳐다봤지만 그는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동군영으로 인해 관중들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악당이 된 듯한 기분이군.’
강무는 왜 자신이 동군영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쓰기가 꺼려졌는지를 깨달았다. 매번 매번이 처절함의 극치인 동군영의 비무는 관중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동군영을 상대하고 있다 보면 마치 자신이 악당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무는 어엿한 소림의 동량으로서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자꾸만 손을 쓰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는 수밖에.
“시주!”
강무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그리고는 동군영을 지나쳐 비무대 위에 떨어진 동군영의 검을 뻥 차서는 비무대 바깥으로 날려 보냈다.
“이제는 검도 없소. 그러니 기권하시오.”
“…….”
동군영은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강무를 쳐다봤다. 지금 동군영을 움직이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었다.
그때 비무대 아래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군영아! 그만 해라! 이만 하면 되었다! 넌 충분히 최선을 다했느니라!!”
바로 설미수였다. 동군영의 혈투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설미수가 소리친 것이다.
그런 설미수의 목소리에 동군영이 고개를 돌려 비무대 아래를 쳐다봤다. 갓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지 오래고 망건 바깥으로 머리가 삐져나와 상거지 꼴이었지만 동군영은 설미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포기 못 합니다.”
동군영은 떨리는 목소리지만 또렷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선 동군영은 어설픈 자세로 강무를 향해 두 주먹을 들어올렸다.
동군영이 만우에게 배운 것은 기초 검술뿐이다. 동군영은 그것 외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주먹을 누군가에게 휘둘러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이냐. 어째서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란 말이냐!”
설미수는 답답하다는 듯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가슴을 쥐어뜯었다. 저러다가 동군영에게 꼭 큰일 날 것처럼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행단의 수장 격으로서도 임금의 명을 다 수행하지 못 한 것이고 죽은 동군영의 아비에게도 볼 면목이 없었다.
“더 이상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지 않으니까.”
동군영은 설미수의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중얼거렸다. 동군영의 풀린 눈앞으로 살풍대에 의해 쓰러져 간 아버지인 동만익과 숙부인 동천익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대체 무엇이 무서워 자신은 그리도 아버지를, 가족들을 피해 다녔던 것일까.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후회가 동군영을 삼킬 것처럼 휘몰아쳤다. 그나마 그 슬픔과 절망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만우, 방매와 함께 조선과 왜, 명까지 유랑하면서 겪은 모험들이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는 자신이 장원을 하고도 춘추관 서기가 된 것에 가족들을 보기가 부끄러워 피해만 다니다가 결국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가문을 잃었다는 슬픔이 인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군영 자신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 숙부인 동백익이 가문의 맥을 유지하겠다고 하였을 때, 동군영은 결심했다.
이제 자신에게는 더 이상 두렵다고 물러나 도망갈 곳이 없다고.
동 씨 가문의 적자이자 유일한 급제자로서 가문을 책임지고 동 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그래서 만우에게 스스로 찾아가 검을 배우겠다 하였고 이 위에 섰다.
그러니 또 다시 무섭다고 도망칠 수는 없다.
아니, 무서워도 도망칠 수는 없다.
“하는 수 없군. 아미타불. 시주. 부디 소승을 원망치 마시오.”
강무는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봐주는 것도 그에게는 수치요 동정일 것이다.
“시주는 내공 한 줌 없지만 검을 든 이유는 그 누구보다도 무인답소. 실수를 사과하외다. 아미타불.”
강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동군영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비록 동군영의 경지는 별 볼일 없을지 모르나 저 정신력 하나만큼은 무림인에 손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각오를 한 상대에게 자신의 최선을 보여 주는 것은 동군영에 대한 존경이자 경외로서 응당 같은 무림의 동도로서 당연한 일이다.
동군영은 그런 강무를 보면서 흐릿하게 웃었다.
“후읍!!”
쿠구궁!!!
강무가 공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전신에 옅은 항마의 기운이 스며들었다가 사라졌다. 허나 그로 인해 순간적으로 비무대 위의 공기가 찌르르 하고 진동했다.
강무는 절정에 달한 고수.
강무는 동군영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무인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담아.
백보신권(百步紳拳).
소림의 최상승 무학이자 소림의 상징적인 무학이 강무의 주먹에 서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강무의 주먹이 벼락처럼 내뻗어졌다.
[동구녕 나리. 굴러.]
바로 그때, 만우의 전음이 동군영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동군영의 다리가 그대로 풀리면서 동군영이 앞으로 쓰러지듯 한 바퀴를 굴렀고 그런 동군영의 머리 위를 강무의 권풍이 스쳐지나갔다.
쫘아아악!!!
권풍의 풍압만으로 동군영의 두루마기가 찢어졌다. 하지만 동군영은 쓰러지는 김에 한 바퀴를 굴러 일어나면서 땅바닥에서 주운 무언가를 들어서는 냅다 강무에게 집어던졌다.
따앙-!!
“크악!”
동군영이 집어던진 무언가가 따앙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무의 이마에 작렬했다. 순간적으로 강무는 백보신권을 동군영이 피했다는 것에 놀라고 있다가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휘리릭!
푹!
그런 강무의 이마에 작렬한 쇳덩이가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푹 하고 비무대에 박혔다. 강무가 반으로 두 동강을 낸 철검의 검신 조각이었다.
주르륵!
그리고 강무는 자신의 이마에서 뜨끈한 액체가 주륵 하고 흐른다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들어 이마를 훔쳤다. 그러자 새빨간 피가 강무의 이마에서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털썩!
그때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강무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린 동군영이 비무대 위에 쓰러졌다. 강무는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동군영을 쳐다봤다.
‘죽을 뻔했다.’
만약 동군영이 던진 검신 조각이 면으로 날아와 이마에 맞은 게 아니라 날로 꽂혔다면?
아마 비무대 위에 쓰러진 사람은 동군영이 아니라 바로 강무 자신이었을 것이다.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삼류의 경지에도 못 오른 동군영에게 절정 고수인 강무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
타닥!!
움찔.
서늘함에 강무가 가슴을 문지르고 있을 때 언제 그의 앞에 내려온 것인지 만우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우아하게 착지했다.
스윽.
그리고는 쓰러진 동군영을 허공섭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뒤 고개를 돌려 강무를 쳐다봤다.
“아쉽군. 이길 수 있었는데.”
뚝, 뚝.
강무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뚝뚝 하고 비무대 위에 떨어졌다. 강무는 만우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정도로 뒤집힐 수 있는 격차 정도밖에 안 되는 실력이면서, 소림이라는 자긍심은 버려라.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림에 출도했다간.”
만우는 소림이란 자긍심, 아니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는 강무를 보면서 충고했다. 승려라고 하기에 소림의 무승들은 지나치게 무공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예전부터 만우와 소림 간에는 꾸준히 마찰이 있어 왔다.
“소림의 기둥이 뿌리째 뽑힐 테니.”
“…….”
강무는 그런 만우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강무의 오만함의 결과가 스스로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흥.”
만우는 그런 강무를 차갑게 비웃고는 만박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정신이 든 만박자가 강무의 승리를 외쳤지만 승리한 자를 위한 환호성은 쏟아지지 않았다.
우와아악!
최고다!!
선비! 최고다!
우와아아아!!!
번왕의 사냥터에 모인 오천 명의 무인들 중 절대다수는 군소방파의 무림인들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동군영은 소림이라는 거대한 문파 앞에서도, 명백한 실력의 차이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영웅이다.
그런 동군영의 투지가 그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승자가 아닌 패자를 향해 환호했다. 만우는 동군영을 허공섭물로 부드럽게 띄운 채 그런 환호를 받으며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스윽.
땀투성이, 먼지투성이가 된 채 상거지꼴이 된 동군영과 그런 동군영을 지고 내려오는 만우의 길을 무림인들이 알아서 터 주었다.
그렇게 설미수와 감령, 필두가 선 곳까지 걸어간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감령에게 동군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탈진해서 쓰러졌으니 금창약 발라 주고 깨어나면 먹고 싶다는 건 다 먹여 줘.”
“예, 대장.”
감령은 만우에게서 동군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서는 등에 업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들 사이에서 감령과 필두를 알아 본 이들로 인해 잠시간의 소란이 일어났지만 만우가 한 번 쳐다보자 다시 조용해졌다.
감령과 필두.
녹림과 장강의 수괴들이 깍듯하게 만우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 오천 무림인들로 인해 증명이 된 순간이었다.
“설 대인께도 나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만우는 설미수에게도 부탁했다. 그러자 설미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않으셔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나리가 일어나시거든.”
만우는 혼절한 동군영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아주 재밌었노라고. 비무대회가 끝난 다음에 부족한 점을 전부 고쳐 줄 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해 주십시오.”
“……계속 가르치실 생각이십니까?”
만우는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얼굴로 설미수를 쳐다봤다.
“보지 못하셨습니까?”
설미수는 만우의 두 눈을 빤히 응시했다. 만우는 그런 설미수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나리는 벌써 절반은 무림인입니다.”
설미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뼛속까지 학자인 설미수의 입장에서는 동군영이나 만우, 그리고 주변 무림인들의 반응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설미수조차도 동군영의 비무를 보면서 그게 가슴 한 구석을 뜨겁게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인정했다.
“그리고 깨어난다면 전해 주십시오. 이 천하제일인도 나리의 꺾이지 않은 투지에 감탄을 보냈다고.”
천하제일인.
만우의 입에서 나온 천하제일인이란 단어가 오천 무림인의 귓속에 인이 박히듯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나리는 모든 무림인들의 귀감이라고.”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다른 무림인들이 만우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마지막 말을 만우는 전음으로 설미수에게만 들리도록 전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린 만우가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크게 소리쳤다.
“무림의 정기(精氣)가 크게 상하였도다. 무림맹은 권세에 무릎 꿇은 칼잡이들이 되었고 사림곡은 파락호들뿐이며 동창은 승냥이 같은 놈들뿐이로다.”
만우는 용접곡에서 무림맹과 사림곡, 동창의 음모를 분쇄하면서 했던 말을 오천 무림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단상 위에 올라 있던 소림과 남궁, 무당의 세 고수들이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검을 쥔 지 채 두 해도 안 된 저 선비보다 기개가 없는 놈들뿐이니 더 봐서 무엇하랴. 척사영! 슌스케!”
만우가 목소리를 돋우자 비무대 위에 척사영과 슌스케가 바람처럼 날아서는 착지했다. 만우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면서 광오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나씩 상대할 가치가 없다! 모두 한꺼번에 덤비거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휙!
그러면서 만우는 품 안에 든 목함을 비무대 위로 던졌다. 비무대 위로 던져진 목함이 데구르르 구르더니 척사영의 발치에 떨어졌다.
스윽.
척사영은 그 목함을 들어서는 품속에 집어넣었다. 만우는 자신을 죽일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소림과 남궁, 무당의 세 고수들을 마주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척사영을 쓰러뜨리고 이기는 자가 저 목함을 가져갈 것이다.”
만우의 입가에 서린 조소가 짙어졌다. 그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무당과 소림, 남궁의 세 고수들이 이를 뿌득 갈았다.
“무림왕 전하라고는 하나 지나치게 무례하십니다!”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시오!”
만우는 자신이 늘 들었던 그런 뻔한 소리들을 똑같이 하는 세 고수들을 보면서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볐다.
“그렇게 말을 놈들 중에 지금 몇이나 내 앞에 서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