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 무림왕 (4)
(360/400)
360. 무림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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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무림왕 (4)
2022.06.11.
권비는 적절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황제의 이름을 팔았다. 금의위나 환관들이나 모두 황제의 한 마디에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되는 이들이다.
금의위와 환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권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만우는 단단히 걸렸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사람 바쁜데.”
호선의 도력이 느껴지기에 그냥 호기심에 나와 본 것인데, 설마하니 그게 권비한테 딱 얽히게 될 줄이야.
만우는 고개를 돌려 호선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호선은 여전히 둔갑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만우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데리고 나온 애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나한테 덤터기를 씌운다고?”
만우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금의위와 환관들의 귓가에 들릴 정도로 흘러나왔다. 금의위와 환관들은 황제와 독대했다는 만우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천자와의 독대.
조정의 대신들이나 국경을 책임지는 대장군들도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성사되지 않는 것이 바로 황제와의 독대다.
휘적 휘적.
만우는 뒷짐을 진 채 팔자로 걸어서는 앞을 가로막은 금의위와 환관들을 스윽 쳐다봤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이밀며 금의위를 툭 하고 밀쳤다.
“나보고 하래잖아. 자가께서. 비켜.”
투둑! 툭!
금의위와 환관들은 무도하기 짝이 없는 만우의 행동에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서게 된다면, 권비의 말을 직접적으로 거역하는 꼴이 된다. 안 그래도 권비가 황명을 참칭했다면서 몰아붙이고 있는 와중이었으니 더더욱.
“에휴.”
만우는 자신을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권비를 쳐다보고, 둔갑진 안에 있는 방매를 다시 한번 더 쳐다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권비와 방매의 눈빛이 비슷했다.
권비는 조금 더 간절하고, 방매는 어서 도와주라며 등 떠미는 것 같은 눈빛이란 것이 조금 다를 뿐.
“자가께서 제게 큰 빚을 지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만우가 작게 속삭인 말에 권비는 고맙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하고 숙여 보였다. 명으로 넘어온 후 한 번도 환관들에게 이리 강하게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속이 다 시원했다. 더군다나 자신의 한 마디에 이 많은 이들이 꼼짝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신선했고 말이다.
“뭐, 정 은혜를 갚고 싶으시다면 말입니다요.”
그때 만우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히죽 웃으면서 권비를 쳐다봤다.
“폐하한테 한 마디만 해 주십쇼.”
“한…… 마디?”
“뭐, 간단한 일입니다요.”
만우가 권비를 보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
금의위와 동창 환관들의 저력은 그 어떠한 무림 방파에서도 감히 경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비록 황실 무학은 긴 세월동안 다양한 실전과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강호무림의 무공보다는 그 깊이와 위력 면에서 부족하기는 했다.
허나 중원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라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황실이란 배경이 바로 그들의 뒤에 버티고 있다는 점과 황실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영약 등이 제공된다는 점, 그리고 최고의 기재들이 황실로 모여든다는 점 때문에 금의위와 동창 환관은 웬만한 무림 문파나 세가의 정식 제자들보다 실력이 뛰어나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우아아악!”
“으억!”
“끄억!”
우당탕탕!!!
그런데 그런 금의위와 동창 환관들이 영빈각의 대문을 넘지 못하고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꽃씨처럼 땅바닥을 뒹굴었다.
몇 번 그렇게 땅바닥을 뒹굴다 보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던 의복이 먼지투성이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억!”
“컥!‘
우당탕탕!!!
그렇게 몇 번을 더 덤벼도 결국 결과는 똑같았다. 영빈각에 조선 사행단을 구류하기 위해 달려갔던 금의위와 동창 환관들은 영빈각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헐헐헐. 이런 허수아비들뿐이더냐?”
척일은 무기를 손에 쥐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일이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센 와류처럼 소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강한 기류가 일어나면서 금의위와 환관들이 절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와류 안으로 빨려 들어간 금의위와 환관은?
어디론가로 빨려들었으면 어딘가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방대한 척일의 공력이 만들어 낸 와류에 휘말렸으니 그 안에서 튕겨져 나온 금의위와 동창 환관의 상태가 멀쩡할 리도 없었다.
혼절.
그렇게 척일에 의해 혼절한 금의위와 동창 환관들의 수가 열 손가락이 접혔다 폈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설미수는 그 모습을 차게 식은 눈으로 응시했다. 동군영은 그런 설미수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드물게도 설미수가 분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 부사.”
“예, 대인.”
설미수는 그런 동군영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동군영에게 말했다.
“내가 이상해 보이는가?”
“예?”
“그리도 뜨겁게 쳐다보니 물어보는 걸세.”
설미수가 쳐다보며 하는 말에 동군영은 볼을 긁적였다.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뭐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설 대인이 분노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낯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원래 사신이 조천을 하러 가서 명에서 이리 분노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 법이니.”
특히나 선비들은,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은 화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을 지극히 꺼린다. 유학자에게 있어 모든 것은 공자의 말씀을 통해 해야 하는 것이지 원시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설미수는 동군영을 쳐다보았다.
“때로는 이런 외교적인 관계에서는 이리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음이네.”
“이런 경우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설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미수가 조선을 대표하여 대국인 명에 사대를 위해 간 것은 맞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명나라가 조선을 정말 수하를 대하듯 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국이어도 나라는 나라다.
“국력으로 따진다면 보잘 것 없을지도 모르나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의 원을 거치기까지 굳건한 국가로서 버텨 온 조선이고, 고려이네.”
그 강대한 원나라가 미친 듯이 주변을 정복하며 제국을 광범위하게 뻗어 나갔을 때도 고려는 고려로서 존재했다.
왕이 강화도로 옮겨 가고, 민초들과 의병들이 일어나 원의 군대와 싸워 가면서도 끊임없이 복속되지 않고 나라의 틀을 유지한 채 버텨 온 것이다.
“그 저력을 명나라도 무시하지 못 함이야. 더불어 주변을 보시게.”
크악!
으아악!
또 다시 달려든 금의위와 환관들 수십이 허공을 붕 하고 날았다. 영빈각에는 척일만이 버티고 선 것이 아니다.
척사영, 간장과 함께 대장간에 틀어박힌 마익후를 제외한 초절정 사인방이 가세하자 금의위와 환관들은 압도적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영빈각의 담벼락을 넘을 수가 없었다.
번뜩!
슈가각!!!
담벼락을 넘을라고 치면 감령의 도가 날아오고, 필두의 대부가 머리통을 쪼갤 것처럼 휘둘러졌으며 문형일의 곡도와 슌스케의 왜도가 바람을 가르고 쇄도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선 척사영은 거머쥔 좌검우도를 휘둘러 도풍과 검풍으로 금의위와 환관들을 연신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이게 꼭 조선 같지 않은가.”
“예?”
“원나라건, 그전의 중원을 차지한 모든 왕조들은 조선을, 고려를 탐내곤 했었네. 허나.”
나라가 작다고 하여 그 안에 사는 사람들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또한 나라가 크다고 하여 그 나라에 사는 이들이 무조건 강한 것만도 아니다.
늘 중원이 넘보던 반도에 자리한 그 땅에서는 땅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재능을 품은 자들이 있어 그 땅을 지켜 왔다.
지금, 수백까지 불어난 금의위와 환관들이 작은 영빈각 하나의 담을 넘지 못하고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하는 몇에게 연신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난 늘 그에 자긍심을 품어 왔네. 백성을 위해 명 앞에 머리는 조아렸으나, 명이라고 해서 조선을, 내 나라를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으니.”
“……그러셨군요.”
동군영은 어찌하여 임금이 조천이라는 중한 행사를 설미수에게 맡기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임금은 설미수의 저런 자긍심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내 비록 대국에 머리는 조아리나 내가 머리를 조아린다고 하여 조선이 작아지지는 않다 믿었으니까 그래 온 것이네.”
“…….”
설미수가 조아리는 머리와 그 자존심의 무게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지는 무게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한데 저들이 조선을 모욕했어.”
“…….”
설미수의 목소리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옹주자가를 모욕했네. 감히 저들이.”
설미수의 눈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 동군영은 설미수에게서 느껴지는 뚜렷한 분노에 침묵했다.
“상께서는 내게 조선의 대표를 맡기셨네. 한데 저치들이 조선을 모욕하였어. 상 같으면 어찌 했을 성 싶은가?”
설미수는 이 일을 자신이 받은 모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해 설미수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아니라 조선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를 놓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제 아무리 명이 대국이라 하더라도.”
설미수의 목소리가 굳건해졌다.
“조선을 업신여길 수는 없는 법이지. 저들이 과거에서 무언가를 배워 왔다면.”
“황제폐하 납시오!!!!”
바로 그때 금의위와 환관들의 움직임이 그 자리에 딱 하고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금의위와 환관들이 양 옆으로 쭉 갈라지더니 수백의 수행원을 거느린 황제가 나타났다.
“어찌하여.”
황제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영빈각 주변에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황제의 감정 없는 목소리에 금의위와 환관들이 바짝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짐의 집 안에서 짐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사례태감을 대령하라 이르라.”
사례태감이라면 동창과 서창보다 훨씬 더 그 윗줄에 있는 환관들 전체를 아우르는 환관들의 우두머리다. 황제의 추상과도 같은 목소리에 금의위 몇이 붉은 잔영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현인비가 종적을 감춘 것에 영빈각의 조선사행단이 연루되어 있다는 증좌를 짐 앞에 가져오라. 그게 아니라면.”
황제의 목소리가 한층 더 스산해졌다.
“짐의 허락 없이, 황제를 참칭한 죄를 물어 십족을 멸할 것이니라.”
황제의 서리 내린 듯한 목소리에 주변의 분위기가 바짝 얼어붙었다.
*****
“나가라.”
“엉??”
만우는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마치 잘못 들었냐는 듯한 표정을 지은 만우에게 황제는 아주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똑같이 말했다.
“나가라.”
“어디서. 여기서?”
“그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황제는 또 다시 만우를 불러다 놓고 독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례적인 황제의 행동에 환관들의 입을 통해 또 다시 소문이 퍼질 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만우를 자미원에서 내보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난리가 났는뎁쇼?”
“너희들이 애초에 자미원을 뒤지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다.”
“음…….”
만우는 그도 그렇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주 큰 전제가 따라야만 했다.
“황제폐하가 본주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럴 일도 없었는뎁쇼.”
만우는 황제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황제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짐의…… 실수였다.”
“에? 뭐라고?”
“짐의 실수라 하였다.”
결국 황제는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만우가 자미원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계속해서 문제가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흠. 이거, 명의 천자께서 사과를 하셨는데 안 받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선에도 어떠한 죄도 묻지 않겠다. 조천의 예를 받아 그 대가도 치를 터이니 걱정 말라. 또한 그대에게도 짐이 한 가지 선물을 내리고자 한다.”
“선물 좋지요. 그 현인비 자가께서 하신 말이 있으실 텐데…….”
만우가 팔짱을 떡 하고 끼면서 뭉근하게 권비를 슬쩍 입에 올렸다. 권비가 황제에게 자신이 부탁한 것을 말을 했을지 안 했을지 기대가 됐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마가 지끈거려 오는 느낌에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만우에게 말했다.
“실권이 없는 명예라고는 하나 그대에게 봉작을 하려 한다.”
“봉작?”
“적어도 귀찮은 일은 피해갈 수 있을 터이니 그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터.”
봉작을 하면서까지 황제는 만우를 얼른 눈앞에서 치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마 권비가 탈출하고 환관과 금의위들이 제멋대로 황명을 참칭하여 소동을 벌였던 것에 정신적으로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만우는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뭡니까요?”
“무림왕(武林王).”
“……에?”
“무림왕(武林王)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검주(劍主) 만우.”
“에에에?”
“이 패를 보인다면 대명천지 어느 곳을 가던 융숭히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황명으로 선포할 것이니.”
만우가 황제가 툭 하고 내던진 패를 허공섭물로 끌어와서는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림왕?”
“비록 토지를 그대에게 내릴 수는 없다. 허나…….”
만우가 어깨를 부들부들하면서 떨었다. 황제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저런 무도한 자도 자신이 내린 은혜에 저토록 감격스러워할 줄 안다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지으려고 했다.
“아, 개촌스러워!!!”
만우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패를 본 만우가 빼액 하고 쳐다보며 소리친 말에 황제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 싫수다 무림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