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천하제일이란 이름 (3)2022.03.12.
척일이 껄껄 웃으며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한참 뒤에 서 있던 독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 발을 내딛었다.
“늙은이. 굳이 관짝 뚜껑을 네놈의 손으로 닫아야 피눈물을 흘릴 모양이로구나.”
“나보다 그리 어려 보이지도 않는 놈이 늙은이라니. 예끼 이놈아! 허허헛!”
설미수에게 은밀하게 향하던 독왕의 독을 날려 보낸 사람이 바로 척일이었다. 그 한 수로 독왕은 척일이 자신에 필적하는 고수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속으로 경악했다.
‘말도 안 된다!’
만우에게서는 느껴지는 것이 거의 없었고, 자신의 독공을 처음 보는 늙은이가 막아 냈다. 그것만 해도 놀라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데 그에 못지않은 고수가 하나 더 있었다.
“사영아.”
“예. 할아버님.”
척사영. 그녀가 각기 양손에 검과 도를 들고는 커다랗게 원을 그린 것이다. 그러자 동군영을 향해 은밀하게 날아들던 비수가 척사영을 스쳐지나갔다. 털썩, 털썩. 놀란 동군영의 좌우로 비수가 스쳐지나가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야행복을 뒤집어 쓴 살객 둘의 몸통이 갈라지며 털썩 하고 쓰러졌다.
“쳐라!!!!”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벌떼처럼 무림맹과 사림곡, 그리고 동창의 고수들이 몸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레 주위로 감령을 필두로 한 초절정 고수 다섯이 섰고 동군영과 설미수는 척사영과 척일이 각기 붙어서는 검을 들어올렸다. 이야아아아-!!! 용접곡 안에서 이미 만우에 의해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검하고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거의 수백에 달하는 듯했다. 무림맹의 청룡단과 백호단. 사림곡의 혈천대와 극락당. 그리고 창위의 동창 고수들까지. 사방에서 검과 도가 난무하며 만우와 사행단을 금세라도 쓸어버릴 거대한 파도처럼 짓쳐들었다.
“부탁드리오!!!”
제갈명공과 돈극이 그와 함께 뒤로 빠졌다. 그리고는 불존과 독왕, 부로가 만우를 향해 쇄도했다. 꽈르릉-!!!! 꽈앙-!!! 잡고 있던 말고삐를 놓고 양손이 자유로워진 만우를 향해 불존의 쌍장이 짓쳐들었다.
“여래신장(如來神掌)이외다!! 아미타불!”
항마의 기운이 가득 담긴 수기(手氣)가 만우의 상체를 노리고는 날아들었다. 그런 불존의 뒤로는 여래의 후광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빛을 발했다.
“받아라. 후으읍!!!”
독왕의 양 손에서는 뭉클거리며 독기(毒氣)가 피어올랐다. 스치기만 해도 한 줌의 핏물로 변할 정도의 극독이 독왕의 양 손에서 태워졌고 독황신공(毒皇神功)이 200년의 간극을 깨고 만우를 향해 쇄도했다. 화르륵!!! 그리고 달려드는 불존과 독왕의 뒤로 검을 치켜든 부로의 양 팔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극양의 기운을 품은 검기가 손에서 피어올랐다. 반양공(反陽功)이라 불리는 150년 전 실전됐다 알려진 태양존(太陽尊)의 무리를 담은 강력한 상승의 무학이 황실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반양공을 쓸 정도로 극양의 기운을 품은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극양의 기운이 담긴 내단이나 영약을 복용하거나 동자공(童子功)을 익혀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성 관계를 평생 할 일이 없는 환관들에게 황실에서 보급한 무공이 바로 이 반양공이다. 반양공에는 기본적으로 동자공을 전제에 깔아두며 무공의 수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풍문에는 150년 전 고금제일인을 다툴 정도로 강대하기 짝이 없던 태양존이 죽었던 이유가 동자공이 깨져서라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확인할 바 없는 낭설이었다. 합공(合攻). 세 명의 화경의 고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만우를 향해 짓쳐들었다. 후웅-!!! 그중 가장 먼저 출수를 했던 불존의 여래신장이 만우를 짓이겨 버릴 것처럼 짓쳐들었다. 소림의 무공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묵묵하게 수행하는 수도승들처럼 직선적이고 거짓이 없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막아내지 못할 정도의 무게가 담겨져 있기에 불존의 여래신장은 막는 것은 모조리 부셔 버리겠다는 듯 만우의 상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마 저 여래신장에 직격 당한다면 상체의 모든 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천년소림의 무게를 담은 것이 바로 저 여래신장이니 말이다.
“여래의 손바닥은 간악한 중생들을 징벌하기에 그 어떠한 중생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나.”
서유기의 손오공도 결국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바로 여래신장이다. 하나 만우는 궁금했다.
“불존, 네놈의 여래가 하늘도 품을 수 있더냐?”
푸화아악-!!! 만우의 이룡검 끝에서 푸른 창천이 불존의 손바닥을 휘어 감쌌다.
“기천.”
총 5초식으로 이뤄진 기천의 4초식, 기천이 여래의 손바닥을 본 따 만들었다는 여래신장을 휘감았다. 여래의 손바닥은 중생을 징벌하는 피할 수 없는 손이다. 한데, 그 손바닥이 과연 하늘도 가둘 수 있을까?
“크으!!!!”
불존은 내뻗었던 손바닥을 허우적거렸다. 만우의 검극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하늘, 기천이 자신의 손바닥을 휘감자마자 방향감각이 모두 일그러지며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제갈의 진법에 갇힌 것도 아닐 지언데, 기천과 맞닥뜨리는 순간 불존은 자신의 손바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었다. 만우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사라졌고, 삽시간에 자신은 아무 것도 없는 푸른 하늘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불존은 느꼈다. 징벌해야 할 이를 가둬야 할 여래의 손바닥이, 너무나도 작다는 것을.
[그래. 나의 하늘을 뒤덮기에는 여래의 손바닥이 너무 작지 않으냐.]
“!!!!!”
퍼억-!!!! 불존이 단말마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는 뒤로 나뒹굴었다. 어느새 다가온 만우의 손바닥이 불존의 가슴팍을 끊어 친 것이다. 하지만 뒤로 튕겨져 나간 불존의 공격은 전부가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찌르르-!!! 만우의 눈이 커졌다. 만우의 주변으로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어마무시한 독기를 품은 독연이 가득 차올랐다. 휘오오오-!!! 200년 전 바로 이 독황신공으로 절대고수 반열에 올랐던 독황은 나신인 채 남만의 독수로 전신을 단련하여 독인(毒人)의 경지에 올랐다 알려진 절대자였다. 이 독황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천 가지의 극독을 직접 복용하여 내성을 길러야 한다.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독황신공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독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한 줌의 혈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독옥(毒獄)이니라!”
전신에 불길하기 짝이 없는 독연을 휘감은 독왕이 검붉은 보랏빛 독연에 가려진 만우를 보면서 양 손바닥을 합장하듯 딱 하고 붙였다. 휘이이익-! 그러자 독왕의 전신에서 불길처럼 보랏빛 독무가 일어나더니 만우가 갇힌 독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치이이익!!! 독왕의 독무는 주변을 죽음뿐인 대지로 물들여 나갔다. 푸르른 초목에 독왕의 독무가 스치기만 해도 새카맣게 타들어갔고 독왕이 딛고 선 흙마저 검게 물들였다. 파샤샤샤샥!! 얼마나 독왕의 독기가 강했던 것인지, 독무가 휩쓸고 지나간 흙바닥 안에서 수천, 수 만 마리의 벌레들이 기어 나와서는 배를 까뒤집었다가 한 줌의 체액이 되어 독무에 휩쓸려 나갔다.
“크읏!”
“지독하다. 저것이 바로 사림곡주란 말인가!”
그런 독왕의 독기는 만우로부터 떨어진 사행단에게까지 와닿았다. 그 여파에 척사영과 척일이 검기가 서린 검을 휘둘러 독무를 막아 냈고 호선의 두 눈이 시퍼렇게 타올랐다. 치이익-!! 독왕의 지독한 독무가 호선이 펼친 방(防)의 술법을 깨지 못하고는, 부딪치며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그에 감령과 필두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사림곡. 정파에 무림맹처럼 사파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 집단으로 녹림 산적과 장강 수적도 엄밀히 말하면 사림곡의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녹림과 장강은 사파에서도 내로라하는 거대 집단이기 때문에 감령과 필두는 사림곡주에 대해 크게 위험인물이라 생각지 못했는데 그것이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살아날 방법이 있을까?’
‘……강이라면 모를까. 없군.’
감령과 필두는 자연스레 그런 사림곡주와 자신들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모골이 송연해지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독공을 쓰는 고수는 자신보다 한 수 약하다고 해도 까다로운 법이었다. 공력과는 다르게 독공이란 것은 수준과는 별개로 얼마나 치명적인 극독을 품고 다니느냐에 따라 상대의 까다로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무림인도 독공을 쓰는 고수는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천독불침, 만독불침의 육체가 아니고서야 독을 상대한다는 것은 적의 투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그 독공을 쓰는 고수가 화경에 다다른 고수다?
‘사림곡주에 대한 풍문이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독왕 중백약이 괜히 사천당가를 밀어내고 무림십좌에서도 이왕의 자리에 앉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호선 언니. 만우는 괜찮겠죠?”
달려들었던 불존이 맥없이 튕겨져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방매는 만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연과 독무가 만우의 몸을 휘감아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든 순간부터 방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방매에게 독은 병(病)과도 같은 것이어서 제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쉬이 피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만우가 익힌 무공이라는 것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이가 사람인 이상 숨을 쉬지 않을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느껴졌다.
“흠…….”
호선은 방매의 물음에 쉬이 답하지 않았다. 호선은 무예의 달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저런 극독에도 무사할지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 마, 동생.”
그것이 호선이 방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나 사행단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독무의 지독함은 호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극독이라니.
‘영물을 여럿 죽이고도 남을 독이다.’
생명력이 응축되고 응축되어 금수에서 영물이 된 존재들조차도 거뜬히 죽일 수 있는 지독한 극독이었다. 호선도 청령단으로 선주의 기틀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 극독 안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의 지독한 극독이 독왕이라 불리는 자에게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것도 사람이란 말이더냐.’
전설 속의 독인이 과연 저러할까. 온몸에 보랏빛의 독무를 휘감은 독왕은 흡사 이 세상의 독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독의 신(神)처럼 보일 정도였다. 괜히 독왕이 일패 혈세천마를 상대로 승부를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제 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 한들!!!”
꾸르릉-!! 독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독을 풀었다. 전심전력으로 만우를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독왕이 품고 있던 독은 거의 한 개 성급을 몰살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극독들뿐이었다. 호흡 한 모금, 단 한 방울만으로도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즉사시킬 수 있는 극독을 독왕은 아낌없이 만우를 향해 퍼부은 것이다. 천하제일인. 진정 검주가 천하제일인이라면 그를 꺾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투자였다.
“감히 이 독왕 중백약의 독황신공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독왕의 공력이 담긴 목소리가 독무를 찌르르 진동케 만들었다. 과연 그의 장담대로 만우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부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도의 극독에서는 제 아무리 화경, 아니 그 화경의 할애비라도 멀쩡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안에 갇힌 만우에게서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검주를 꺾었다?’
일수에 여래신장을 깨뜨리고 불존을 패퇴시킨 검주다. 그런데 그 검주가 독왕의 무시무시한 독무에 당했다는 것에 부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오오오-!!! 그런 부로의 놀람이 그대로 반영된 듯 그의 손에 들린 검의 반양신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하마터면 주화입마가 올 뻔한 부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 없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자가 홀로 황궁의 모든 금의위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부로는 놀람을 가라앉히고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저 독무를 뚫고도 검주가 살아남는다면, 그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을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독왕 시주!
그런데 그때 만우의 일 수에 튕겨져 나갔던 불존이 부로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멀쩡했나?’
부로는 그런 불존의 목소리만 귀로 들으며 온 정신을 손에 들고 있는 한 자루의 검에 집중했다. 반양신공은 딴 생각을 하면서 여유를 피울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무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심하시오! 검주, 그자는……!”
불존이 입가에 핏줄기를 흘리며 보랏빛 독연에 휩싸인 독왕에게 경고를 하려는 순간 독왕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독연이 걷혔다. 푸욱-!
“크…… 크윽…….”
독연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불쑥 치솟은 하얀 검신이 단숨에 독왕의 독황신공의 초식 중 하나인 독옥을 깨고 심장을 노리고 쏘아진 것이다. 하나 찰나의 순간에 독왕의 손에 어린 독기가 막아섰지만 하얀 검신은 독왕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독왕이 일으킨 독기로도 하얀 검신을 완벽하게 막아 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거…… 검강…….”
촤아아악!! 푸화아악!
“끄악!!!”
하얀 검신에 피어오른 푸른 검강이 진동했다. 독왕의 손바닥이 빠져나가기도 전이었다. 그러자 독왕의 오른 손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아쉽군. 심장을 노렸는데.”
휘오오오-!!!
어느새 만우의 전신에서 자욱하게 흘러나온 푸른 하늘이 보랏빛 독연을 말끔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내 당가에도 일렀거늘. 무림맹을 통해 듣지는 못한 모양이로군. 독왕.”
만우는 사라진 오른손의 출혈을 막기 위해 창백해진 얼굴로 혈도를 짚는 독왕을 보면서 삐딱하게 조소했다.
“네놈의 독공이 하늘에 닿았다고는 하나 무한한 창천을 중독시키지는 못할 터. 그러면 그것이야 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더냐?”
푸른 하늘은 끝이 없다. 제 아무리 독을 아무리 푼다고 해도 하늘을 가득 채울 수 없는 법이 이치일지언데, 어찌 독왕 따위의 독이 자신의 기천을 허물겠냐는 만우의 자부심이 섞인 목소리였다. 독왕은 입가에 가는 핏줄기를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크으윽…….”
만우의 검에 오른손이 육편으로 화하면서 독공이 역류해 그것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십 할의 확률로 자신의 독에 중독되어 한 줌의 혈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고자. 네놈밖에 남지 않았구나.”
만우가 일 수에 불존을 패퇴시키고 또 다른 일 수에 독왕을 패퇴시키자 부로를 제외한 동창의 고수들과 무림맹, 사림곡의 고수들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부 공공!”
제갈명공이 허공에 두 손을 짚으며 부로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반양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부로의 신형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만우를 향해 쇄도했다.
“이 검주를 감히 검으로 상대하고자 하는가?”
만우는 자신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쇄도하는 부로를 보면서 비웃었다. 하지만 부로의 반양공은 그렇게 가볍게 볼 정도가 아니었다. 이글이글! 극양의 반양공을 담자 검신이 마치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 검을 들고 있는 부로도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정도였다. 반양공은 다른 무공처럼 심오하거나 절묘한 무학은 숨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최고의 상승절학이라 불리는 마교의 천마신공에 비해 굴하지 않았다. 극강(極强)! 반양공은 무지막지한 공력을 퍼부어 적을 압살하는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동자공을 전제조건으로 필요로 하는 반양공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반양공으로 태양존이라 불렸던 전대의 고수가 반양공을 한 번 사용하면 적의 병장기가 녹아 서로 달라붙을 정도였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치이이익-!!! 주변의 공기가 후끈하고 달아올랐다. 만우는 주변의 공기를 달구며 날아드는 부로의 검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자신의 앞에서 검인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극양의 무공이라니.
“불가사리야.”
[우오오오옹-!]
불가사리가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나 울부짖었다. 안 그래도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여 식욕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먹어치워라.”
[꾸오옹-!!]
이룡검의 검신이 된 불가사리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 부로의 검이 날아와 만우의 이룡검을 때렸다. 꽈아앙-!!!!!
“끄윽-!”
“끅-!”
천혜대사를 비롯한 무림맹의 고수들과 사림곡의 고수들, 그리고 동창 고수들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우와 부로가 부딪치면서 일어난 기파가 그들을 거칠게 휩쓸고 지나가며 내부를 진탕시켰기 때문이다.
“우웨에에엑-!!”
독왕의 입에서 시커먼 죽은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던 와중에 만우와 부로의 충돌로 인한 여파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글부글. 부로의 반양공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무공인지는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바닥의 액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액체는 다름이 아니라 땅이 녹아 액체가 된 것이었다. 불존은 입을 앙 다물고는 앞으로 나서며 마보 자세를 취한 뒤 주먹을 치켜들었다.
“사제!”
꽈르릉-!!! 불존의 양 주먹에서 우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혜대사는 그런 불존을 보면서 경악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불존이 무리해서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끌어올린 공력으로 소림의 일절이라 불리는 백보신권(百步神拳)이 허공에 희끗한 잔상을 남긴 채 검주와 부로가 부딪친 곳으로 날아들었다. 퍼억-!! 백보신권에 피륙이 얻어맞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불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백보신권의 진정한 위력이라면 얻어맞는 소리가 아니라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
쿨럭, 쿨럭 사위를 가득 채웠던 희뿌연 수증기가 싹 날아가더니 그 속에서 부로가 피를 울컥거리면서 토해 내더니 털썩 하고 쓰러졌다. 그런 부로의 가슴팍에는 선명한 주먹 자국이 새겨져 있었는데, 주변이 움푹 함몰된 흔적이 선명한 것이 결코 정상이라 불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부로의 멱살을 쥐고 있다가 놓은 것이 바로 만우였다.
“소림의 의기와 기개는 어디로 져버리고 이딴 삼류 잡배나 할 수작을 부리는 거지?”
부로는 손에 검신이 사라진 검만을 쥐고 있었다. 반면 만우의 손에는 아까보다 더 순백의 빛을 뿜어내는 듯한 이룡검이 쥐어져 있었다. 불가사리. 불과 철을 먹고 사는 그 영물 앞에 부로가 내민 명검과 그 안에 이글거리는 양기(陽氣)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물론 그를 소화하기 위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정작 만우는 머리카락 한 올도 상하지 않았다. 불가사리가 소화를 시키고 남은 기운의 여력을 부로를 향해 쏟아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까지는 어떻게든 방어를 했던 부로지만, 백보신권에서는 무사할 수 없었다. 만우가 거의 넋이 나간 부로를 들어 방패로 써 버렸으니 말이다.
“크악!”
“으아악!”
만우는 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행단을 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사림곡의 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행단의 고수들에 의해 싹 쓸려나가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저벅. 만우는 입가에 피를 흘리는 불존과 독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만우를 제외하고도 그 분지 안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감히 소리를 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만우의 무위에 그대로 압도를 당한 것이다.
“위정자와 손을 잡은 무림인들의 말로(末路)는 늘 같다.”
만우는 엄정한 눈으로 불존과 천혜대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결국 위정자의 잘 드는 칼로 쓰이다가, 더 잘 드는 칼에 의해 쓸려나가는 것뿐. 명 태조가 그대들을 공신이라 칭했다 하여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했던가?”
관과 무림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 중에는 그것도 있었다. 무림이라는 강력한 무력을 쥔 이들이 치안을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칼잡이가 정치에 뛰어들면 어떤 꼴이 나는지 아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만우의 눈에 무림맹은,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그들은 위정자와 손을 잡고 소 잡는 칼이 되어 휘둘러지고 있었다.
“결국 게까지인 것이야. 네놈들의 역할은.”
“그, 그러면 어찌하란 말이오!”
천혜대사, 심지어는 불존조차도 만우의 기세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만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만우는 용기를 내어 소리 낸 자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안면이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팽대수?”
“그, 그렇소.”
호(虎)자가 박힌 백의를 입은 채 한 손에 커다란 도를 들고 있는 남자, 북경제일도 팽대수였다. 무림맹의 백호단은 하북팽가의 고수들로만 이뤄진 조직으로 그곳의 단주가 바로 팽대수였다.
“무림맹에 들어갔나?”
“집안 일이오.”
“그러겠지.”
만우는 피식 웃었다. 조선에서도 만났던 팽대수를 이곳에서도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대수는 그런 만우에게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는 황제입니다. 황제. 제 아무리 조약이니 뭐니 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한 마디면 구족, 아니 십족이 멸할 수도 있는 일일지언데 어째서 그리 쉽게 말을 하는 겁니까!”
“그래?”
만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돌려 사행단을 가리켰다.
“네놈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한 번 보거라. 네 눈에는 이 본주가 황제의 명을 두려워하는 것 같더냐?”
“그대는 잃을 것이 없으나 우리에게는 가문과 가족이 있습니다!”
팽대수는 이를 악물었다. 만우에게는 잃을 것이 없었다. 그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아니었다. 가문, 식솔, 가족. 목숨을 다 바쳐 지키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이 황제의 명 한 번에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싸웠어야지. 어리석은 놈들.”
만우는 씹어 내뱉 듯 말했다. 팽대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우의 말이 요점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