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천하제일이란 이름 (2)2022.03.08.
폭천뢰가 연달아 터지면서 말 그대로 ‘하늘을 뒤흔드는’ 폭발을 일으켰다. 사극창은 강호 일절로 소문이 난 창술 외에도 암기술로 유명했기에 이번 일에 선발이 된 것이다. 허나 암기보다는 창을 선호하는 우음은 자신이 그 유명한 검주와 창을 한 번 겨뤄 보지도 못하고 폭천뢰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독왕이 강조한 일이었기 때문에 우음은 호승심보다는 대의를 따르기로 했다. 꽈과강!!!! 만우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간 폭천뢰만 열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단 한 개만 해도 기와집 하나를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을 자랑하는 폭천뢰다. 그런 폭천뢰가 하나도 아니고 열 개가 연달아 터져 나가자 주변의 지형지물이 완전히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용접곡 안에 가득 차오른 인위적인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제갈세가에서 특별히 신경을 쓴 진법으로 생성된 안개는 제 아무리 고수라 하여도 그 안에서 방향감각과 거리감각을 잃게끔 만든다. 그러니 저들은 폭천뢰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도저히 감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시시하다.’
최근 무림 전체에 가장 무명을 떨치는 검주였기에 그와 꼭 정정당당하게 겨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검주를 죽이다니, 우음은 이 짓이 따분하다고만 느꼈다. 뜨끔
“……어?”
그런데 그 순간, 따분해하던 우음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제갈운과는 달리 우음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갈운보다 우음이 훨씬 더 윗줄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뿐이었다. 죽음이란 본래 공평한 법이어서, 제갈운이나 우음에게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데구르르 우음의 머리가 뚝 하고 몸통에서 떨어졌다. 사림곡에서 차기 혈천대주라 평가받는 절정 고수인 우음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콰과과광!!! 그런 우음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거대한 폭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은밀한 죽음이 용접곡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제는 그 죽음의 대상이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대상이 아니라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당하는 이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우웅-!!!! 그 순간 연달아 대기를 진동시키던 폭천뢰의 폭음이 거대한 공명음에 되레 먹혔다. 그리고 하얀 안개만이 가득하던 용접곡의 한 가운데에서 푸른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용접곡의 안개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아-!!! 폭천뢰의 폭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하얀 안개들이 푸른 하늘에 속절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얀 안개 대신 자리를 차지한 푸른 하늘의 표면이 잘게 떨렸다. 서컥! 서거걱! 푸화아아악-!!! 그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일방적인 죽음만이 적들을 향해 내려앉았다. 푸른 하늘에 한 번 잠식당한 이들은 검 한 번 들어 보지 못한 채 자신이 죽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는 차디 찬 땅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런 용접곡 안에서 변고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삐이이익-!!! 화아아아악-!!!!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자 푸른 하늘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러나 용접곡에 매복하고 있던 이들 중 신호에 맞춰 뛰어나온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철컥! 유려하게 납검한 채 오연히 서 있는 만우에게서만 소리가 흘러나올 뿐, 하얀 안개가 물러간 용접곡의 울창한 수풀 아래로는 검붉은 핏물만이 번져 나올 뿐이었으니까.
“말했지.”
찌르르-!!! 이룡검을 부드럽게 납검한 만우의 목소리가 태평하지만 자욱하게 용접곡 안에 파동을 담고 울려 퍼졌다. 육합전성(六合傳聲). 여섯 방위에서 들려오는 만우의 목소리는 용접곡 내부의 그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겠다고.”
푸화아아아아악-!!!!!
만우의 그 말과 동시에 푸른 하늘이 내려앉았던 범위 내의 모든 것들이 찢겨지면서 사방으로 비산했다. 만우는 자신이 만들어 낸 너른 공터 안에서 비릿하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아직 하얀 안개가 사라지지 않은 곳을 응시했다.
“나를 향해 검을 든 자, 그 검을 내려놓을 각오도 된 것이렸다?”
만우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
[혈천대는 즉시 물러나라!]
독왕이 다급하게 전음을 혈천대주와 극락당주에게 보냈다. 혈천대주인 혈휘극 조찬명과 극락당주 소소살녀 자령이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휘하의 고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물러난다!”
“물러나!”
파바박!! 자색 궁장의를 갖춰 입은 극락당의 고수들과 시뻘건 혈의무복을 입은 혈천대의 고수들이 뒤로 빠졌다. 그렇게 하얀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휘하 고수들의 수를 파악한 조찬명과 자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절반!’
조찬명과 자령은 전부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그들은 사파의 거두들로, 기린대의 대주인 철권 교수와 비교해도 그 명성이 떨어지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들이 그 정도의 고수라는 것 자체가 무색해졌다. 제 발로 제갈세가에서 구축한 천라지망에 들어온 검주가 대체 무슨 짓을 하였는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초절정에 오른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혈천대와 극락당의 고수들이 하얀 안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푸른 하늘. 창천을 담았다는 남궁세가의 초상승 검법인 창천무애검법도 저리 지독하지 않았다. 제갈세가가 설령 신선 할애비가 오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궁극의 진법이라 자부한 것의 자존심이 검주의 푸른 하늘 앞에 무참히도 꺾인 것이다.
‘절반…….’
부르르르 조찬명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떨림은 분노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공포. 조찬명은 말 그대로 지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초절정에 오른 뒤 언제 이리도 까마득해 보이는 벽을 마주했던가. 기껏해야 곡주인 독왕 중백약 정도?
‘아니. 최소한 곡주님보다도 한 수 위다.’
종잇장 한 장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독왕도 무시무시한 고수이기는 헀으나 저 안에서 독왕이 검주 같은 압도적인 무위를 떨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림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혈휘극.”
“…….”
그런 조찬명을 향해 자령이 말했다. 자령의 얼굴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 하여 소소살녀란 별호가 붙은 자령은 자색 궁장의를 입은 여인으로만 구성된 극락당의 당주였다. 그녀 역시 초절정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극락당주까지 된 입지전적의 여인이었다. 극락당은 그 이름에서처럼 남성을 상대하는 데 최적화가 된 여인들의 집단이다. 실질적인 무공 수준은 물론, 시서예화와 방중술과 섭혼술 등에 모두 능통해, 알고서도 결국 극락당의 여인들에게 기꺼이 제 목을 바치도록 만든다 하여 그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분명 자령은 이곳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곡주인 독왕이 과한 걱정을 한다며 비웃었었다. 기린대와 혈천대. 부푼 소문이 자자한 검주쯤이야 그들만으로도 문제없이 정리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 설령 그들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극락당에서 나서면 어림없을 것이라 믿었다. 검주 역시도 남자다. 자령은 명성이 높다는 남자일수록 여인에 대한 정복욕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 그것은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자가 남자를 정복하는 일이다. 여자의 치마폭에 한 번 휘감긴 남자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다른 여자의 치마폭에 휘감기는 한이 있더라도 결국 여자의 품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있었다. 하얀 안개를 밀어낸 푸른 하늘을 보기 전까지는.
“곡주님과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
조찬명은 고개를 돌려 자령을 쳐다봤다. 그것은 곡주가 내린 명령이 아니었다. 자령이 하는 말은 지금 명을 어기자는 뜻이었다.
“곡주께서 내리신 명과 다르다.”
“이미 곡주께서 물러나라고 한 순간, 계략은 어그러졌다.”
자령은 순식간에 극락당의 고수들이 절반이나 저 하얀 안개 속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몸에 독특한 향이 나는 향료를 발라놨기에 알 수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하얀 안개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극락당 고수들의 향이 짙게 풍겨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고수다.”
“천하제일…….”
조찬명의 입에서 기어코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자령은 그런 조찬명을 비웃지 않았다. 그녀도 말로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인외(人外)의 무공이다. 곡주께서 직접 나셔도 승리를 확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존과 동창제독이 곡주님과 함께 하고 계시다.”
“……정녕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구나. 어리석게도.”
자령은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밑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공을 익히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자령은 단 한 번도 죽음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이 취한 누군가의 그 생명처럼, 자신 역시 누군가에 의해 죽을 수도 있음을 늘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감히 항거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부딪쳐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도 최소한 바위를 향해 휘둘러지는 조약돌이라도 되고 싶었지, 계란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극락당은 물러난다!”
자령은 혈천대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자 자색 궁장의를 입은 여인들이 뒤로 부산스러워졌다. 당주인 자령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그런데 그때, 조찬명과 자령의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용접곡에 매복을 하고 있었던 모든 혈천대와 극락당의 고수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던 그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주의 허락 없이 감히 움직일 수 있다 하였지?”
“혈천대는 지멸진(地滅陣)을 펼친다!”
“극락당은 혼색광진(魂色狂陣)을 펼친다!!!”
조찬명과 자령이 이를 악물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순간을 놓치고야 말았다. 푸른 하늘이 다시금 자욱하게 그들의 시야 한 켠에서 명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늘이시여!!!!”
조찬명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혈휘극이라는 그의 별호답게 검붉은 혈목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극(戟)을 휘두르며 푸른 하늘을 향해 뛰어들었다. ***** 조용. 용접곡 안에 매복한 이들만 족히 천 명이 훌쩍 넘었다. 사림곡의 기린대, 혈천대, 극락당의 고수들을 합쳐 삼백. 무림맹의 청룡단과 백호단, 제갈세가를 합쳐 삼백. 황궁의 동창에서 오백. 그리고 만우가 일반인이 포함되어 있는 사행단을 끌고 천라지망 속으로 들어갔다. 하나 그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용접곡은 고요하기만 했다. 오싹.
“아미타불.”
불존(佛存) 진한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불안감에 불호를 읊었다. 지금껏 태어나 항마(抗魔)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온몸에서 일고 있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용접곡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꽈득! 독왕 중백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닭살이 오돌토돌하게 돋은 팔뚝을 독왕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독왕은 용접곡을 향해 하독하려는 본능을 눌러 담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정녕, 내 독이…….’
독왕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독왕은 입 안의 살을 까득 하고 깨물었다. 주륵 비릿한 피 냄새가 입 안에 가득 차오르자 제정신이 드는 듯했다. 하나 그 푸른 하늘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육(肉)과 영(靈)을 뒤흔들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내 독이 통하지 못하는 상대는 없다.’
독왕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
부로 역시 불존이나 독왕과 비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로는 다른 이들보다 안색이 훨씬 더 좋지 않았다. 만우에 의해 한 번 당했던 기억은 부로로 하여금 화경에 오른 지금까지도 악몽을 꾸게 할 정도로 강하게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부르르. 부로는 상대하려는 자가 기억 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란 것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부로는 이를 악물고는 되뇌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작 검주를 만나게 되면 그 앞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야만 한다.’
부릅! 여기서 해내지 못하면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 이미 한 번 버림을 받았어야만 했던 패배한 금의위도 모자라 다시금 패배한 동창제독이 될 수는 없었다. 검주에게 패배한다면 죽음뿐이지만, 천자에게 다시금 버려진다면 그것은 가문의 몰락이다. 자신이 살고자 가문을 몰락케 할 수는 없다. 부르르. 푸른 하늘이 여전히 아른거리고 있는 쪽을 바라보는 세 화경 고수들의 주먹이 동시에 바르르 하고는 떨었다. ***** 서컥! 서거거걱!!
“…….”
“…….”
설미수와 동군영은 입을 꾹 다물고는 흔들리는 말 등을 따라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차라리 가시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설미수와 동군영은 사방에서 들리는 서컥거리는 피륙음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런 피륙음을 사방으로 피워 내는 만우의 손끝에 쥐여진 이룡검이 검극을 흔들 때마다 혈화(血花)가 눈부시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혈화는 푸른 하늘 안에 소복하게 안긴 사행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후각까지 가 버린 것은 아니기에 설미수는 끄응 하는 신음을 흘렸다.
“대체…….”
“각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르신. 허니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동군영이 설미수를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둘 중 그나마 지금 상황에 더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은 설미수가 아니라 동군영이었던 탓이다. 만우와 그간 함께 다니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단련된 것이 동군영으로 하여금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게끔 해 주었다. 그런 동군영을 보고 설미수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고맙네.”
“아닙니다, 어르신.”
동군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쓰게 웃었다. 설미수의 말고삐를 잡아 가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만우였다. 다른 점이라면 아까와는 달리 만우의 손에 이룡검이 쥐여 있다는 정도?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을 때는 동군영조차도 순간적으로 정신줄을 놓았을 정도로 놀랐었다. 그것이 그저 거대한 폭음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는 정신을 차렸으나 사방의 지형이 아예 뒤바꿨을 정도의 폭발이란 것은 뒤늦게 눈치챘다. 서컥!! 주변의 지형지물이 푸른 하늘에 의해 금세 가려졌다고는 하나 마치 거대한 맹수가 달려들어 할퀸 것 같은 그 흔적들에 동군영은 훅 하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 정도의 흔적을 주변 지형에 남긴 적의 공격을 만우가 가볍게 막아 내었음을 알게 되자 동군영의 긴장이 착 하고 가라앉았다.
“만우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허니 심지를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동군영은 설미수에게 그리 말했다. 설미수는 동군영의 말을 들으면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사행단이 믿어야 할 동아줄은 만우,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넘어 연경에 가야 하는구나. 산 넘어 산이로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 설미수로 하여금 더욱 정신을 다잡게 만들었다. 설미수가 기꺼이 죽으러 가는 것일지도 모르는 사행단을 맡은 것은 은공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다. 자신이 그리 애정해 마지않는 조 씨 부인을 사기꾼으로부터 구해 준 것도 모자라 절맥으로부터 목숨까지 구해 준 은혜를 말이다. 은혜도 갚지 않는 것은 금수다, 라고 생각해오며 살았던 설미수이기에 그는 자신의 뺨을 짝 하고 후려쳤다.
“어르신?”
“후우. 됐네. 아무 것도 아니야.”
설미수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자신이 용접곡이라는 골짜기를 걷는 것인지, 아니면 하늘을 걷는 것인지 모를 길을 계속해서 걷던 설미수와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어느 곳에 도달하자 주변에 자욱하게 깔려 있던 하얀 안개가 훅 하고 사라지더니 깎아지를 듯한 골짜기의 안에 놓인 작은 분지 같은 곳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만우의 목소리가 나지막하지만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발악은. 끝이고?”
화악-!!! 일렁이던 하얀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자 설미수와 동군영의 눈에 분지 안에 태산처럼 버티고 선 일련의 무인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제각기 다른 의복을 입은 이들로 한 눈에 딱 봐도 소속이 전부 달라 보였다. 그중 설미수는 동창 환관들의 의복을 눈치채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동창!!!!”
*****
“아미타불.”
“…….”
제갈명공의 두 눈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갈명공이 노리던 작전은 아예 시작부터 수포로 돌아갔다. 설마하니 검주가 이리 보란 듯 깔려 있는 함정 속으로 자신이 보호해야 할 이들까지 모조리 데리고 들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잃을 것이 생긴 자는 반드시 약해진다. 자신만 알고 살던 자가 다른 것을 지켜야 하니 드러나지 않던 빈틈이 생겨나기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이다. 때문에 제갈명공은 그런 자들을 노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누가 보더라도 함정 같아 보이는 용접곡으로 만우를 유인하였다. 한데, 만우는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아도, 지킬 것이 생겼다 하여 약해지지 않을 정도로 검주의 무(武)는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던 셈이다. 그럴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에 제갈명공은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직 아니다.’
제갈명공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늦게 아는 바람에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일 할. 그것도 후하게 잡은 생존자의 숫자다. 용접곡을 무인지경 거닐 듯 유유자적 관통한 검주는 용접곡에 매복시켜 놓았던 고수들의 구 할을 베었다. 그중에는 초절정 고수로 각 맹과 곡, 황궁에서 차기 각자의 문파와 조직을 책임질 이들로 촉망 받던 인재들도 다수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도 검주의 검 앞에서는 잡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직 기회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제갈명공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검주에 의해 죽어 나간 용접곡 안 구 할의 고수들 중에는 제갈세가의 고수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복수는 반드시 해 주마.’
제갈명공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런 제갈명공이 보는 곳으로 만우와 사행단이 천천히 들어와서는 섰다. 끝까지 유유자적한 만우의 신형이 보통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런 검주 앞에 감히 나서는 자는 없었다.
‘천하제일인!’
분지에 대기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그들 앞에 오연하게 선 검주는 그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본주를 기다렸나?”
만우는 이룡검을 늘어뜨린 채 여전히 한 손에는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고수들을 베어 내며 혈로를 걸어왔음에도 만우의 호흡은 고요하기만 했다. 현격한 실력의 차이였다.
“아미타불.”
천혜대사는 불호를 읊었다. 아무래도 길보다는 흉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불존이 잿빛 가사를 휘적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검주를 보오.”
“땡중. 네놈이 불존이렸다.”
만우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섬찟한 투기를 뿜어대는 불존을 보면서 히죽 웃어 보였다. 한참 어린 만우의 그런 오만한 언행에 발끈도 하련만, 불존은 발끈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대신 합장을 하며 불존은 만우의 말에 대답했다. 과연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의 기둥인 불존의 기세는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여래(如來)가 중생을 내려다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서장관?”
그때 만우의 손에 쥐어 있던 설미수의 말고삐를 누군가 받아들었다. 설미수가 그를 쳐다보니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척일이었다. 휘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척일의 수염이 푸르르 떨리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모습에 설미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아는 것은 거의 없으나, 방금 전에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은 심상치 않은 바람으로 인해 짐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 기파가 사특하기 그지없다 하더니 치졸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