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주작단이라고 (1)2022.01.15.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고?”
“예. 대협.”
마일은 주창 대신 나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일이 보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어서인지 투귀대의 고수들이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일. 파천서생 마일, 마교의 차기 두뇌가 검주 만우 앞에 오체투지를 하고 살려 달라 빌었다? 더군다나 마일은 만우를 거리낌 없이 천하제일검이라 불렀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말이란 것은 본래 무서운 법이어서 한 번 내뱉어지면 절대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마일은 제 입으로, 만우를 천하제일검이라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만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다는 것은 파천서생의 안목에 의심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파천서생이 바로 마교의 지낭이니, 이걸 더 복잡하게 만든다면 더 나아가서는 마교의 안목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일.’
주창은 그런 마일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일의 기기묘묘한 책략은 지금껏 주창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 주었고, 투귀대를 마교에서도 정상급으로 올려놓았다. 그랬기에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 달라는 마일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오도리 부족에게 잡힌 것도 마일의 결정이었고, 검주가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찾아가야 주장한 사람도 바로 마일이었다. 그런 마일이 만우 앞에서 바짝 엎드리고 간과 쓸개를 다 내놓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 주창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했군. 선천진기가.”
만우는 옥령의 상태를 한 번 파악하고서는 마일을 쳐다봤다. 옥령을 제외한 투귀대 고수들이 전투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강행돌파로 오도리 부족을 뚫고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정도 되는 고수들이 오도리 부족의 옥사에 붙잡혀 있었다는 것은 한 가지 경우 밖에는 없었다.
“무리하게 움직였군.”
“…….”
그곳에 없었지만 마치 모든 것을 지켜본 듯한 만우의 말에 투귀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원래도 족히 석 달은 정양해야 하는 상처일터. 그런데 이리 움직였다는 것은 마교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인가?”
만우는 주창을 쳐다봤다. 주창의 아비인 혈세천마를 격살한 자가 바로 만우다. 무림인의 숙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죽인 것은 죽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비 같지 않은 아비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주창의 눈에 만우를 향한 원망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살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살려내라.”
마치 원래부터 투귀대에 있었던 것처럼 그쪽에 자연스럽게 서있던 여포가 다짜고짜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무슨 화타야? 무슨 수로 살려.”
“너라면 할 수 있다. 넌, 넌…….”
여포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자신이 한 눈에 반한 여인이다. 비록 살아온 세상이 너무나도 달라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봤다고 이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만우의 말대로 여포는 옥령을 오랫동안 본 것도 아니다. 심지어 옥령은 여포가 아니라 다른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포는 만우를 향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나보다 강한 사내다! 그러니 살릴 수 있다. 그러니 살려내라!!”
여포가 하는 행동은 생떼였다. 하지만 그런 여포의 행동에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방매는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옥령의 얼굴을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호선 언니가 저러고 있어서 다행이네.”
“누구길래.”
간장은 옥령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장은 무림인도 아니고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매가 간략하게 해 준 설명에 간장의 눈이 커졌다.
“도성에 그 난리를 치고 탈옥한 죄수란 말인가?”
“난리를 친 건 맞지만…… 하아. 나도 모르겠다고.”
방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리 복잡한지, 인연의 실이 마치 꼬인 실타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옥령은 그냥 참하고 조용한, 방매와 호선이 함께 좋아하는 언니였다. 향이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기도 했고. 파리한 안색의 옥령을 보니 자꾸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죽였잖아.”
하지만 그날 옥령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방매도 죽이려고 했다. 이지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저 손이, 저 몸이 한 짓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에효. 불쌍하다 옥령 언니도.”
방매는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호선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어 다행이었다.
“이 언니는 언제 일어나려나.”
무공을 하지 못하는 방매와 간장을 위해 만들어진 수레에는 호선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호선은 만우로부터 비싸 보이는 청옥을 받아들더니 저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감령과 필두가 티격태격대도 죽은 것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방매가 직접 확인했으니 죽은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그저 잠이 들어 있는 것뿐이다.
“다들 평범하게 산 사람이 없네. 없어.”
그런 호선이 어떤 일을 겪은 것인지 만우를 통해 짧게 전해 들었기에 방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자가 사나운 사람들만 방매의 주변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향이도 그렇고, 호선도 그렇고 그리고 만우도 그렇고. 팔자가 사나운 사람들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방매 역시도 팔자 사나운 걸로 하면 둘째가라 할 정도로 서러웠다.
“조 씨 할아범은 괜찮으려나.”
향이와 안국방의 조 씨 할아범을 은월루에 맡겼지만 그래도 근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뭘 해 보려고 해도 여기서는 불가능해. 자세히 보려면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 필요할 테니 심양에 들어간 후에 보자고.”
그 자존심 높은 마교의 고수들이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안 봐 줄 수도 없었다. 만우의 허락에 마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대협.”
“하. 네 뒤쪽에 더러운 인상들이나 보고 말하시지.”
만우는 위문과 백영, 웅풍을 가리키면서 마일에게 말했다. 그 셋이 어깨를 움찔했다. 만우의 말마따나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절대의 고수라고는 하나 그들은 자랑스러운 천마신교의 미래를 책임질 후기지수들이다. 가진 바 무공은 후기지수라 불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투귀대의 일원이란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온 세월이다. 자존심만 놓고 보자면 정파의 고지식한 것들과 비등비등할 정도인 투귀대였다.
“본래 신교는 강자존의 진리를 따르는 곳입니다. 허니 어찌하여 천하제일검이신 검주 대협께 무례하게 굴겠습니까.”
마일은 입 속의 혀처럼 만우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하면서 뒤를 힐끗 쳐다봤다. 마일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스윽 그런 마일의 눈빛에 세 고수의 시선이 땅바닥으로 향했다. 그들이 주창 다음으로 어려워하는 자가 바로 주창의 책사인 마일이다. 가진 바 무공은 그들에 비해 한참이나 낮았지만, 주창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목숨을 한 번씩 구한 그 계책이 전부 마일의 머릿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뭐, 본주가 언제 마교 애들한테 이런 대접 받아 보겠어. 그러니까 적당히 즐길 테니까, 군식구로 따라붙은 거면 인상들 펴라?”
언제까지 마교 고수들의 옆에 있을 수는 없었다. 만우의 첫 번째 역할은 사행단의 역졸이었기 때문이다. 만우가 휘적거리며 동군영이 탄 말 옆에 가 걷기 시작한 것을 본 마일은 주창을 비롯한 투귀대의 고수들에게 말했다.
“살아야 한다 했던 제 말, 벌써 잊으셨습니까.”
“허나 마 군사.”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인이란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 어리석은 이들이다. 어리석다고는 하나 그것이 바로 무(武)의 특성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더 큰 무(武)를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그렇기에 마정 백영은 처음으로 마일의 말에 반발했다.
“차라리 싸우다 죽자, 그러다 죽어도 명예로울 것이다 그런 개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마일의 혓바닥이 날카로워졌다. 마일의 말투가 사나워지자 무어라 더 말하려 했던 백영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마일은 볼이 움푹 들어가 야위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주님을 신교로 무사히 모시는 것.”
“…….”
“그것만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검주에게 무릎을 꿇는 것? 저는 백 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투귀대 고수들의 어깨 너머로 요녕성의 주도(主都)인 심양의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비치고 있었다.
***** 심양까지 반나절 거리. 웬만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심양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마교의 존재 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있었던 주작단은 아침에 일어나자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밤새 분명 바로 앞에 있었던 마교의 흔적이 씻은 듯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쿵!!! 당중약이 분노한 얼굴로 땅을 발로 내리치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당미령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당중약에게 말했다.
“잘 된 거예요, 숙부.”
“잘 됐다고?”
당중약은 고개를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휙 하고 돌렸다. 그곳에는 멀건한 얼굴의 당미령이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주작단을 하나 보내 당미령의 부탁을 들어주려 했지만 대차게 거절당한 앙금이 남아 있던 당중약이다. 그랬기에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조카를 보자 당중약은 속에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마교 놈들은 의뭉 띈 상종 못 할 놈들이라 늘 경계를 해야 한다고. 한데 놈들이 어디로 간 것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어찌 해야 한단 말이냐.”
그냥 마교의 무인들도 아니고 무려 천마대의 고수들이다. 그 정도 되는 고수들이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와서는 어디로 사라진지 주작단이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은 마치 뒷간을 갔다가 닦고 나오지 않은 것만큼이나 찝찝함을 안겨 주는 일이었다.
“혹여 놈들이 우리를 기습이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그리 태평한 소리를 한단 말이냐.”
영민한 자신의 조카지만 세상 경험이 부족하다 당중약은 생각했다. 어려서 마교의 무서움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여유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미령은 당중약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도, 경험이 일천하지도 않았다.
“모용이 있는 요녕에서 천마대가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숙부?”
“뭐?”
“조금만 더 가면 모용세가에 저희가 도착했다는 기별이 들어가겠죠. 그렇다면 모용세가에서 사람들이 나올 터. 그 전에 천마대가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요.”
“그건 그렇다만…….”
아무리 천마대, 그들이 마교의 최정예라 하더라도 이쪽도 무림맹의 최정예다. 거기에 상대하기가 지극히 까다롭다는 사천당가의 무인들로만 이뤄진 주작단이 아니던가. 거기에 모용세가의 무인들까지 합세한다면 절대고수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아무리 천마대라 한들 승기를 쉽게 잡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아서는 저들에게도 나름의 목적이 있는 듯하네요.”
“목적? 무슨 목적 말이냐.”
천마대는 주작단에게 들키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모습을 감췄다는 소리다.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운신에 제약이 따른다는 소리였다.
“저들의 목적은 소란이나 혼란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다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면…….”
당미령이 저 멀리 보이는 심양을 쳐다봤다.
“마교의 소교주라던지.”
“소교주? 투귀대!”
당중약은 당미령이 어제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투귀대, 그곳의 대주가 마교의 소교주이며 그들이 조선에 있었다는 정의대의 보고까지.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당중약의 눈이 번뜩였다.
“검주도 모자라 마교의 소교주라.”
당중약의 눈에 탐욕이 스치는 것을 본 당미령은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허나 한 번 숨어든 천마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거예요, 숙부.”
“흠…… 흠…….”
검주와 소교주를 잡는다면 전 무림에 당중약과 당가의 이름이 진동할 것이다. 그런 공명심에 들뜬 당중약에게 당미령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명임을 기억하세요, 숙부님.”
“황명.”
당중약의 눈빛이 돌아왔다. 황명이란 소리를 듣자 정신이 퍼뜩 든 것이다. 당중약은 당미령의 말에 미몽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황명이 우선이지. 황명이.”
“예. 그것만 생각하셔요. 검주를 제압할 독은요?”
“약제각에서 만든 산공독이다. 화경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민간인으로 만들 수 있는 독이지. 제 아무리 검주라 하더라도.”
당중약이 자신감을 내보이며 품에 든 자기병을 툭툭 건드렸다.
“당가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숙부님만 믿겠어요.”
당화, 당미령의 얼굴에서 피어오른 웃음이 빛을 발하는 듯 주변 당가 무인들의 시선을 절로 끌었다. *****
“모용세가로 말씀이십니까?”
“예, 태수.”
심양태수 조명관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모용재의 낯선 부탁에 당혹감을 금치 못 했다.
“모용세가라면 요녕성의 자랑이 아닙니까. 한데 어찌하여…….”
태수(太守)는 그 지역의 왕이다. 왕이라 불리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 그 지방에 부임한 태수는 그 지역의 군사, 재정, 사법의 권한을 위임 받는다. 거기에 지방의 실력자를 속관으로 등용하여 지역을 다스린다. 하지만 그런 태수라고 할지라도 지방의 실력자들, 유지들의 도움이 없으면 그곳을 다스리는 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심양태수와 모용세가는 절친하고 긴밀한 관계였다.
“정치에 칼잡이가 끼어들게 되면 그 말로는 비참하니, 부탁드립니다 태수.”
단야검(斷夜劍) 모용재는 십검단의 일검단주이자 절정의 검객이다. 그가 처리한 마적떼만 해도 그 수급이 커다란 저택 한 채를 꽉 채울 수 있을 정도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모용세가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인 모용재는 검을 쥐고 있지 않아도 그 자체로 한 자루의 검인 듯 보였다.
“흐음…….”
“부탁드립니다, 태수님.”
모용재가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숙였다. 심양태수는 모용세가가 그런 자리에 빠지겠다는 것에 당혹감을 드러냈지만 무리하게 부탁하지는 않았다. 굳이 참석하기 싫다는 모용세가를 억지로 그 자리에 불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심양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재는 일어나 감사함을 표한 뒤 몸을 돌아나갔다. 심양태수는 모용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들어 올려 부관을 불렀다.
“예, 태수님.”
“영빈각에 머물고 있다는 사행단 말이다.”
“예?”
부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빈각에서 머물고 있는 이들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온 사행단이었다.
“그들과 모용세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보거라.”
“예, 태수님.”
부관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왕에게 이유를 묻는 신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양태수는 본능적인 께름칙함을 느끼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모용세가가 꼬리를 만 상대라. 대체 왜?”
심양태수의 고민이 깊어만 갔다. ***** 조선에서 명나라의 수도인 연경까지는 육로로 28일이 걸린다. 평양, 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단둥의 구련성과 봉황성을 지나쳐 심양까지 왔다. 앞으로는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연경으로 향하면 되니 그렇게만 놓고 보면 거의 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산해관을 넘어 연경까지 가는 길 자체가 워낙 험했고 거리 자체가 멀었다. 심양에서 나와 산해관을 넘어 연경까지 가는 데에는 쉬어갈 곳조차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쉬어야 한다.
“그런데 왜! 쉬지도 못하고 내가 이러는 건지.”
만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만우의 앞에는 옥령이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었고 그 모습을 여포와 투귀대의 고수들이 초조해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쳐다보지 좀 마.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니까?”
만우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고동락을 같이 한 사이이고, 여포는 연정을 품은 사이이니 그 대상인 옥령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단지 만우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내가 무슨 의원도 아니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만우는 죽은 듯 누운 옥령의 상체를 일으켰다. 세심한 허공섭물이었다. 투귀대 고수들이나 여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고절한 공력의 운용에 다들 어깨를 한 번씩 움찔거리며 떨었다. 그들이 그러건 말건 일으켜 세운 옥령의 등에 장심을 가져다 댄 만우가 그녀의 몸 안에 조심스럽게 공력을 불어넣었다.
“으음…….”
외부에서 들어온 낯선 기운에 반발력이 느껴졌지만 만우는 가볍게 그 반발력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반발력을 가라앉히고 옥령의 내부를 살피던 만우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엉망이네. 엉망이야.”
본래 다른 사람의 몸 안에 공력을 불어넣는 것은 양자에게 모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러면서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보였지만, 옥령의 내부에는 여유가 없었다.
“혈이 곳곳에 뭉쳐 있어서 내공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거기에 가장 중요한 백회혈 부근의 혈맥이 꽉 막혀 있어.”
“그, 그러면…….”
“광증을 막기 위해 옥령이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가는 혈맥을 차단한 모양이야.”
만우는 옥령의 몸에서 공력을 회수하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 만우가 기공술사도 아니고, 이 지경인 옥령의 몸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 혈맥을 억지로 풀어냈다가 다시 혈성인가 뭔가 하는 놈이 도질지도 몰라. 머리에 그렇게 큰 놈이 있을 줄이야.”
경지에 오른 만우에게는 그 혈성이란 놈이 느껴졌다. 그게 운명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옥령의 머리에 묵직한 혈성이란 놈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두통을 많이 호소했을 것 같은데.”
“그렇소.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혈성 때문이었다니.”
혈성이란 것이 운명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창은 만우의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혈성이 옥령의 머리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질병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섣불리 건들 생각은 하지도 마. 어차피 느끼지도 못하겠지만.”
의술에 특별히 유별나게 정통하거나 만우 정도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아니라면 그 혈성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우의 말을 듣고 그것을 없애겠다고 함부로 옥령의 뇌를 뒤지다가는 뇌가 곤죽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여포가 만우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여포를 빤히 쳐다봤다.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아. 난 무인이지 의원이 아니야.”
“…….”
“교주님. 신교에 돌아가 좌호법께 옥령을 보여드린다면…….”
마일이 주창에게 말했다. 좌호법이란 말에 주창의 눈이 반짝였다. 천마신교의 좌호법은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바로 생사마의(生死魔醫) 조근이었기 때문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의 배를 열고 머리를 여는 과격한 의술을 펼친다 하여 마(魔)가 붙었지만 중원에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의원 중에 하나가 바로 조근이었다. 그와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의원이라면 무림맹의 성신의(聖神醫) 유엽이 있었지만 그에게 옥령을 데려가 보여줄 수는 없었다. 유엽이 정, 사, 마를 가리지 않고 환자는 모두 돌본다 하여 성신의란 별호를 얻었다고는 하나 그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것 자체가 투귀대로서는 무리였다.
“십만대산까지 가야 하는데, 버틸 수 있겠소?”
주창이 만우에게 물었다. 지금 당장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만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이 고작 여진족 부족의 옥사에 갇혀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게 아니었다면 옥령의 상태가 이토록 악화되어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 방법은 있지.”
만우가 옥령을 쳐다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만우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는 것에 투귀대 고수들은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듯한 심정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쟤. 쟤가 제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면 가능할 수도.”
“쟤라면…….”
만우가 턱짓을 하는 곳을 바라본 주창의 얼굴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그곳은 굳게 닫힌 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 누가 들어갔는지를 떠올린 주창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영물?”
“영물이 아니라 호선.”
그 안에는 오는 내내 잠들어 있었던 호선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창이나 투귀대에게 호선은 이름보다는 백호의 이미지가 더 컸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우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호선이 우연한 기회에 오도리 부족 대추장이 소유하고 있었던 청옥을 얻기 이전이었다. 청옥을 얻은 후 깊은 잠에 빠진 호선이 어느 정도까지 강해질지는 만우도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한 것은 500년이란 세월동안 짐승이 영성을 얻어 영물이 되고, 등선을 하기까지 결코 적은 것을 쌓아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셈인데, 청옥이 호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는 만우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선기(仙氣)라면 혈성의 광증을 억누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호선이 그러고 싶어 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혈성이 도진 옥령을 막았던 사람이 저 낭자라고 했었나?”
주창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봐야지. 그런다고 해서 수하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해 보는 데까지 해 봐. 곧 있으면…….”
덜컹! 만우가 말을 함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여포와 주창의 얼굴색이 변했다. 화경에 오른 그 둘 정도는 되어야 느낄 수 있는 기운이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천진기, 혹은 선기. 수백 년의 시간을 수양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가장 정순한 그 기운이 문 너머에서 거친 바다 위의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어날 것 같으니까.”
만우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경직된 주창과 여포의 얼굴을 즐거운 듯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