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모용세가(2)2022.01.11.
“잘하면 황실 고수들의 위엄을 보여 무림에게 경고도 던질 수 있을 터이니 말이야.”
“황상께서 무림인들을 견제하려 하시려는 것입니까?”
무림인은 관의 입장에서는 참 애매하게 계륵이었다. 중원의 거대한 땅 곳곳에 황상의 위엄이 미치지 못하기에 무림인들은 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치안유지군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개 무림의 문파와 세가라는 것이 해당 지역의 토박이로서 강성한 가세로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호족의 개념이었다. 그런 순기능이 있다고 하나 황실의 입장에서는 병장기를 패용한 대국의 백성들이 길거리를 버젓이 활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경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락제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무제께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명을 세우면서 도움을 받았던 무림의 세력을 홀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황실에는 무림이 늘 골칫덩어리 일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황실의 수치도 씻어 내고, 건재한 황실 고수들의 위력을 검주를 통해 은근히 내보이면서 다시 한번 무림의 충성을 받아 낼 속셈도 있어 보였다.
“어찌하였건.”
석소군은 장포의 옷에 명경을 보고 정갈하게 고정하면서 온소에게 말했다.
“사행이건 압송이건 검주가 연경으로 오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허나 뜬소문이 돌고 있으니…….”
석소군이 준비한 모든 것은 ‘화경’의 고수이자 ‘무림십좌’의 일인인 검주를 상정한 안배였다. 허나 그것이 ‘천하제일인’으로 바뀐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뜬소문마저 변수가 되지 않도록 완벽하게 준비를 하면 되겠지. 황실과 무림맹, 마교, 사림곡에 사람을 보내겠다. 제깟 놈이 천하제일인, 아니 달마와 천마가 살아 돌아온다 하여도 절대로 살아나갈 수 없는 자리를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석소군의 눈이 이글거리는 빛을 담고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되었지?”
석소군은 나가려던 온소에게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것이라 하시면…….”
석소군은 온소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건주. 그곳에서 잃어버린 내 물건.”
언젠가 석가장의 부족함을 채워 줄 재능을 가진 후손이 생긴다면 그 후손을 위해 준비해 놨던 것 중에 하나를 건주에서 잃어버린 석소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금신공을 대성하는 데 있어 필요한 시간을 절반 이상 앞당겨 줄 어마어마한 기운을 품은 천고의 보물이었다.
“건주의 여진족의 손에 들어간 것 같사온데…… 송구하오나 그곳에 부족들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난립하고 있어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사옵니다.”
온소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석소군은 눈을 한 번 파르르 떨었지만 온소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온소의 잘못과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부족하다면 건주를 잘 아는 여진족의 부족을 통째로 사도 좋다. 그러니 그것만 찾아봐.”
“예, 주군.”
온소가 석소군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
“명나라의 황제가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에게 밀지를 보냈다?”
“그렇습니다, 은공. 대추장 먼터무가 분명 그리 말하였습니다.”
만우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설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녕성의 주도(主都)인 심양(瀋陽)까지 하루가 남자 설미수가 털어놓은 말에 만우는 동군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헥, 헥, 헥.”
동군영은 사행단의 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든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무림이 있는 중원으로 가는데 검을 더 배우고 싶다고 동군영이 먼저 알아서 청해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 자신의 입을 동군영은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좌 베기, 우 베기 500번 추가.”
“대체 왜에에에!!!”
만우는 조용히 동군영의 훈련 강도를 늘렸다. 동군영이 반발하려 했지만 설미수가 만우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숨긴 게 있더군요, 나리.”
“아니, 그건 내 결정이 아니네. 그건…….”
“어? 멈췄어? 100회씩 추가.”
“으아아아아!!!”
동군영의 저주받은 몸뚱어리와 재능은 이렇게 무식하게 때려 박지 않으면 검에 친숙해질 수가 없었다. 설미수는 그런 동군영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의외로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이유를 묻자 설미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라고는 하나 동 부사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아무리 선비라고 하여도 활쏘기 정도는 하면서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데요.”
설미수는 의외로 강골이었다. 그러니 명에 다녀오는 그 머나먼 길에도 그리 정정했던 것이다. 설미수는 활 하나로 토끼나 사슴 같은 것을 척척 맞추는 실력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틈이 나면 사냥을 하러 나가는 줄은 만우도, 동군영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놈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그 부족을 몰살시킬까 걱정하시어 이제 말씀하신 겁니까, 나리?”
“그렇습니다, 은공.”
설미수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우는 그런 설미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잘 하셨습니다. 아무리 이놈이라도 그렇게 하면 꿈이 뒤숭숭합니다요.”
“…….”
설미수의 안색이 슬쩍 변했다. 자신이 예상한 대로 거기서 진실을 말했더라면 오도리 부족을 몰살시켰을 것이라는 만우의 말 때문이었다.
‘무서운 분.’
만우의 삶은 설미수의 삶과는 달랐다. 붓과 먹으로 옛 성현의 말을 배우고 설전을 벌이며 머리를 죽도록 굴리는 설미수와는 달리 만우는 판단을 내리면 몸으로 움직인다. 다리를 놀리고 팔을 움직인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인다.
‘살아오는 방식이 다른 것뿐.’
설미수는 그것에 대해 만우를 탓하거나 무식한 무인이라고 만우를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살아온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짧은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우는 동군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명나라 황제라.”
“은공.”
만우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설미수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에 설미수가 다급하게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요.”
“그리 무섭게 말씀하시니 걱정되어 그럽니다.”
설미수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이미 조선에서부터 이놈을 압송해 오라고 한 것이 황제라 하시지 않았습니까요?”
만우의 말투는 경박스러웠지만 그에 실린 무게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미수는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은공.”
“한데 중간에 여진족의 야인들에게 칙서를 보내고. 조선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까요?”
“…….”
만우의 말이 날카롭게 요점을 찔렀다. 공자와 맹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바보가 아니다. 만우는 정확하게 가장 중요한 점을 짚었다.
“황제가 무림맹의 늙다리들에게 칙서를 보내 이놈을 압송하는 데 손을 보태라고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겠습니다요.”
만우는 황제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훤히 내려다보는 듯했다. 허나 그런 복잡한 관과 무림의 관계까지는 알지 못하는 설미수만 고개를 가로저어 보일 뿐이었다.
“한데 어찌하여 천자께서 은공을 찾으려 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우는 설미수를 빤히 쳐다봤다. 황제의 자존심이라면 만우가 황실에서 벌인 그 일을 발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당하게 상국인 명나라에서 자국의 백성을 추포하여 보내라고 한 것이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주상전하께서도 연유를 모르신다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어떤 악연이 있었는지를 제가 알아서 은공을 도울 수…….”
“어려운 일도 아니니 알려드리겠습니다요.”
만우가 피식 웃었다. 명나라 황실에서는 만우를 죽여 없애서라도 없애고 싶은 일이겠지만 사실 만우에게는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른 옹졸한 놈들처럼 황실에서도 그저 똑같이 나왔을 뿐이다. 그게 황실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만우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설미수의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그러더니 종래에는 입이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까지 커졌다.
“커, 컥…….”
단순히 그냥 입만 크게 벌린 것이 아니라 숨이 턱 하니 막힐 정도로 놀란 듯했다. 설미수는 숨까지 컥컥거리더니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는 만우를 쳐다봤다. 씨익, 씨익 가다듬는다고 가다듬었지만 충격이 적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설미수가 보이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대체 그 누가 있어 명나라 황실을 뒤집어놓고 동창과 금의위를 단신으로 쓸어버렸다는 만우의 신위를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대체 무공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신선으로 만든다는 것이 정말이란 말인가!!’
그런 만우만 한 강자가 무림이라 불리는 곳에는 최소한 아홉이 있었다는 소리다. 뭐 실질적으로는 그 실력에 손색이 있다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수준의 무인들이 있다는 것이 설미수에게는 새삼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때의 일을 새로이 황제에 등극한 이가 잊지 않은 모양입니다요.”
그때의 충격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광활한 명 권력의 중심이라는 황실이 일개 무림인에 의해 패배를 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황제는 그때의 황실과 지금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때의 수치를 만회하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에 황실이 있다면 말입니다.”
만우는 연경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황궁의 기둥뿌리를 뽑아 버릴 겁니다요. 그때 아무래도 황제고 황실이라고 아랫놈들만 조졌더니 이런 짓을 벌이는 것 같은데…….”
공포가 부족했다. 그것이 만우의 결론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때 그렇게 깨져 놓고 지금 이런 식으로 야료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때 만우답지 않게 너무나도 적당히 살 만할 정도로만, 그래서 그게 악의가 될 정도로만 조처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검주의 검(劍)자만 듣게 해도 벌벌 떨게 만들어 줘야겠습니다요. 흐흐흐.”
“으…… 은공…….”
설미수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설미수의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만우를 대체 무슨 말로 말려야만 하는 것인지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던 만우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뒤편을 향해 내공을 담은 목소리로 멀리까지 퍼지게 만들었다.
“그만 나오지? 삼척동자도 알 수 있게끔 티내면서 따라오지 말고? 모른 척을 언제까지 하란 소리야?”
야, 야, 야, 야……. 만우의 목소리가 너른 벌판 위로 메아리를 만들어 내며 퍼져 나갔다. 설미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만우를 쳐다봤다.
“은공. 지금…….”
“낭자!!!”
쾅!! 그런데 설미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얌전히 따라오던 여포의 몸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어디론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 순간 아무 것도 없던 벌판 위에 그림자가 지더니 풍경의 한 부분이 일그러지면서 그 안에서 웬 도를 든 사내가 뛰쳐나왔다. 콰앙-!
“크악!”
뛰쳐나온 사내와 여포가 그대로 충돌했다. 하지만 기세 좋게 뛰쳐나온 것과는 달리 도를 든 사내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위문!!!”
“낭자!!!”
처저저적!! 위문, 폭혈도 위문이 튀어나오던 속도보다 더 빨리 뒤로 튕겨져 나가자 백영이 뛰쳐나왔다. 순간적으로 쇄도하는 여포가 영락없이 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전에 나선 사람이 있었다.
“물러서라!”
주창. 그간 얼마나 고초가 심한 것인지 마교의 고수답던 풍모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몰골을 한 주창이 여포의 앞을 막아섰다. 주창의 기세에 멈춰 섰지만 여포의 눈은 주창의 뒤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옥령에게만 고정됐다.
“뭐야. 마교 애들 아니야?”
“마교!!!”
문형일과 감령, 필두, 마익후와 슌스케가 갑자기 튀어나온 투귀대의 고수들을 경악하면서 보고는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호오…….”
“주창.”
꽈악! 척일은 주창을 보면서 눈을 빛냈고 척사영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그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 역시 한순간이었다.
“왜 따라와.”
만우. 만우가 앞으로 나서자 주창이 이를 악물고 웅풍이 옆에서 몸을 부풀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옥령의 곁에 서 있던 마일이 주창과 웅풍 곁을 지나쳐 맨 앞으로 나왔다.
“마일!”
“괜찮습니다, 교주.”
마일은 주창을 교주라 불렀다. 허나 그런 마일도 그리 좋은 꼴은 아니었다. 그간의 고초를 설명해 주듯 거지가 형님이라 부를 정도의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주창과 웅풍을 진정시키고 가장 앞으로 걸어 나온 마일이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재미있다는 듯 그런 마일을 쳐다봤다.
“진법을 유지한 채 움직일 생각을 하다니. 기발했어. 너네들이 움직일 때마다 풀벌레들이 울다가 멈추는 것만 빼면.”
“…….”
털썩! 그 순간, 마일이 만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악한 주창과 웅풍이 뒤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도와주십시오. 검주 대협. 아니…….”
마일이 머리를 숙여 만우 앞에 완벽하게 납작 엎드렸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시여.”
*****
“천하제일인? 현경?”
“크핫핫핫. 둘째야. 어디 이상한 것이라도 먹고 왔느냐?”
모용청과 모용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시도 쉬지 않고 온 힘을 달려온 터라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마음이 더 무거웠다. 가주인 모용수와 그 자리에 동석한 장자이자 십검단의 삼검단을 맡고 있는 모용중의 반응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불신(不信). 하지만 그렇다 하여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검주는 이 요녕성을 지나쳐 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믿기 힘드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용청은 아버지와 형님의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설령 자신이 저 자리에 있더라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본 것이기 때문에 모용청은 기를 쓰고 둘을 설득하려 애썼다.
“검주를 황상께서 압송해 오라 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 검주가 허공답보를 쓰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옥면산군과 필수교어? 괴검과 괴권까지?”
모용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검주가 조선으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놀랄 것이 없었다. 허나 그런 검주가 허공답보를 쓰는 것을 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냐? 운룡대팔식이나 제운종 같은 경신법을 쓴 것이 아니냔 말이다.”
운룡대팔식은 곤륜의 절기이고 제운종은 무당 절정의 보법이다. 그 두 개의 무공이 허공답보를 본 따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림인은 없었다. 하지만 모용청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소자가 언제 거짓을 고한 적이 있사옵니까?”
“그러니 내 답답한 것이다.”
모용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첫째인 모용중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안 그래도 무림맹의 주작단이 이리 온다하여 아버님의 신경이 날카롭거늘. 어찌 너까지 이러느냐!”
주작단이란 소리에 모용청의 눈이 커졌다.
“황상께서 압송해 오라 한 검주, 그 죄인을 호송해가기 위해 온다 하였느니라.”
황명을 내세웠기에 주작단은 명분까지 갖추고 있었다. 중원무림과 그리 연이 좋지 않은 모용세가라 할지라도 황명을 내세운 이상 주작단의 편의를 봐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모용청의 말은 그런 황명과 전면에서 위배되는 내용이었다.
“아니 아버님. 저리 허무맹랑한 청이의 말을 어찌 귀담아 들으려 하십니까!”
모용중은 아버지인 모용수가 둘째인 모용청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는 눈치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는 지금껏 청이가 거짓으로 무언가를 고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허나 너무 허무맹랑하지 않습니까. 검주라니. 동이족 주제에 현경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모용중은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실력이 그를 뒷받침 해 주었다. 나이가 갓 이립을 넘겼지만 초절정에 달했을 정도로 무공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무공의 경지만 놓고 보자면 가주인 모용수보다 모용중이 더 낫다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모용세가에서는 모용중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모용세가의 미래를 밝혀 줄 화경이 탄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팔검단주와 팔검단의 식솔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주작단이 오기로 했다면 검주와 무림맹의 충돌은 기정사실화된 셈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말려야 한다. 괜히 그 사이에서 모용세가가 다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높은 모용중은 모용청을 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모용세가의 핏줄이란 놈이 꼬리를 만 개처럼 돌아온 것이냐!!! 그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 놓고서도 요녕성의 패자라 말할 수 있겠느냐!!!”
모용세가를 초빙한 오도리 부족을 끝까지 도와주지 않고 그냥 온 점을 탓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용청은 물러서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적자이자 형님인 모용중에게 져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검주 만우. 무공이 하늘에 닿은 그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자신과 팔검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녕성의 패자는 형님이나 하십시오. 전 모용세가를 살려야겠습니다.”
“너, 너!!!!!!”
모용청은 지금껏 모용중에게 단 한 번도 이리 무례하게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모용중이나 모용수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용청이 강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나오거라! 오늘 내 아우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베풀 것이니!”
벌떡! 화가 난 모용중이 일어섰다. 하지만 모용청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주이자 아버지인 모용수를 빤히 쳐다봤다. 믿어 달라는 뜻이었다. 모용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모용청을 그곳에 보낸 이유는 그가 영민하고 진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용청이 하는 말이다.
“앉아라.”
“아버님!!!”
모용중이 모용수를 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모용수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벌써부터 중이, 네가 가주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냐?”
가주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특히 집성촌으로 되어 있는 세가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가주의 권위가 부정당하는 순간 가족끼리, 형제끼리 반목을 하게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아버님. 소자가 어찌하여.”
모용중이 무릎을 꿇었다. 모용수는 고개를 돌려 모용청을 쳐다봤다.
“주작단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당장 무림맹이 아니라 황실의 눈 밖에 나 가문이 멸문당할 수도 있음이니.”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모용청의 말이 맞다면 모용세가는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빠진 셈이다. 모용수는 고민을 하다가 모용중과 모용청에게 말했다.
“삼검단주는 가주회의를 소집하라. 모용청과 팔검단은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회의에서 고해야 할 것이다.”
“예!!!”
모용청이 힘차게 대답했다. 세가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좋은 수를 강구하면 이번 일도 돌파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허나 모용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중아.”
“예, 가주.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혈기왕성한 모용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가를 이끄는 가주가 되려면 아무리 이해가 안 간다 하여도 자신이 그 사람을 보낸 이유를 믿고 그 말을 믿어야 한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포용력이 부족한 첫째. 다른 모든 것은 가주의 자질이나 무공이 뒤쳐지는 둘째. 모용수는 두 아들을 보면서 든 상념을 애써 떨쳐 내며 말했다.
“어서 움직이거라.”
***** 무림맹과 마교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다. 의(義)와 협(俠)을 추구하며 정도(正道)를 표방하는 무림맹. 힘(力)과 마(魔)를 추구하며 강자존(强者存)을 표방하는 마교. 무(武)를 숭상하고 그를 위한 공부부터 시작한 무공(武功)을 익힌다는 것은 같았으나 바라보는 곳 자체가 아예 달랐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수백 년에 걸쳐 쌓여 온 앙금과 편견, 그리고 오해들까지. 그런 것을 고려해 보면 무림맹의 주작단과 마교의 천마대가 당장에라도 서로를 향해 무기를 뽑아들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스윽. 부릅. 스윽. 파라락!! 이십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주작단과 천마대가 나란히 야영지를 펼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상대의 동향에 눈을 떼지 않고 극도로 서로가 서로를 경계했다. 조금만 움직이거나 수상한 모습을 보여도 예민하게 굴며 눈을 부릅뜨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다. 그럴 거면 그냥 한 쪽이 멀리 앞서 가거나, 뒤쳐지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였다. 자존심. 마교의 정점이라는 천마대와 정파의 정점이라는 무림맹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인들만이 모였다는 사신단 중 하나인 주작단의 무인들의 자존심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먼저 앞서가거나 알아서 뒤쳐지는 것이 곧 패배로 이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로가 서로에게 예민하게 굴면서도 굳이 지근거리에 야영지를 펼친 것이다.
“숙부. 진정하시고 앉아 계세요.”
“저 마교 놈들을 눈앞에 두니 진정이 되질 않는구나.”
독절 당중약은 무안한 얼굴로 조카인 당화 당미령이 내미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당미령은 그런 당중약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상 주작단의 모든 무인들이 그러했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이렇게 신경전을 하다가 먼저 지치는 쪽이 지는 거예요, 숙부.”
“나도 안다만.”
당중약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는 나이와 배분 때문에 주작단의 단주를 맡았지만 사실상의 단주 역할은 당미령이 하고 있었다. 당중약의 성미가 너무나도 급했기 때문이다. 독과 암기를 다루는 사천당가의 당중약이 저리 성미가 급하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독을 다루는 것과 성미가 급한 것은 별개였다. 성미와는 별개로 당중약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성이 차분하고 영리한 당미령이 사실상 주작단의 살림을 다 도맡아 하고 있었다.
“안 보이세요? 아무리 마교의 최고 정예인 천마대라 해도 사천당가를 등 뒤에 두고는 침착할 수가 없죠.”
당미령은 손가락을 들어 천마대가 펼친 진지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눈에 잔뜩 경계심을 돋운 천마대의 고수들이 주작단의 진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천당가. 사천성의 토박이이자 거대 호족인 사천당가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다루는 독(毒)에는 한계가 없었다. 또한 그들의 손에 들리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흔한 돌멩이나 낙엽이라고 해도 훌륭한 암기가 된다. 사천당가에서 다루는 독의 가짓수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암. 그렇고 말고. 네 말이 맞다 미령아. 하하핫!!!”
무림오화 중 당화를 맡고 있는 당미령은 긴 속눈썹으로 눈을 깜박여 보였다. 당중약이 호탕하게 웃는 것을 보자 절로 속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천마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사실 이곳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미령이었다.
‘본래의 천마대가 아님에도 저 정도라니.’
천마대 고수들의 마기는 이십 장이나 떨어진 주작단의 야영지까지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저들은 심지어 원래의 천마대도 아니었다. 진짜 천마대는 일패 혈세천마와 함께 일본국에서 유명을 달리했으니까.
‘검주에 의해.’
당미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작단의 임무는 그런 검주를 압송하여 연경까지 보내는 일이다. 한데 진짜도 아닌 급히 조성된 천마대를 보니 진짜 천마대를 몰살시킨 검주를 압송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생각까지 미친 것이다.
‘복수를 위해 가는 건가?’
거기에 한 가지 더. 아직 천마대가 어찌하여 주작단과 같은 경로로 움직이는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연경부터 천마대와 주작단은 정확하게 같은 경로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목적지가 같다는 소리다.
‘검주?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
이 시기에 천마대가 마교를 나와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천마대는 마교의 최정예이자 교주를 상징하는 전투집단이었으니까.
‘소교주. 투귀대의 대주.’
문득 당미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혈세천마가 죽었으니 마교에서는 새로운 교주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무림맹에서는 혈세천마에게 주창이라는 아들이 있고, 그가 투귀대의 대주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소교주의 생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허나 조선에 갔던 정의대의 보고에 따르면…….”
정의대는 분명 투귀대의 대주를 조선에서 봤다 했다. 그렇다면 천마대가 조선 방향으로 향하는 이유는 자명했다.
‘소교주가 조선에 있다는 뜻이다.’
당미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론 무림맹과 마교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불구지천의 대원수다. 하지만 주작단, 정확히 무림맹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황명.
‘마교가 황명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어쨌거나 황명을 받고 나온 주작단이다. 황명이라는 것은 무림맹에게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동시에 위기이기도 했다. 황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는 것에 천자가 어떤 딴지를 걸고 넘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때문에 독과 암기의 명수인 당가의 무인들로 구성된 주작단을 무림맹에서 급파한 것이다.
“미령아?”
“숙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
“저희는 황명을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어요. 한데 천마대로 인해 단원들이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있어요.”
“으음…….”
“당가의 독이라면 검주도 꺾을 수 있어요. 하지만 유비무환이라고 하였으니 단원들에게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게 하고 싶어요.”
“해서?”
“천마대주. 그자를 만나 봐야겠어요. 도와주세요.”
“뭐…… 뭣??”
당중약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