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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조천사(朝天使)(4) (280/400)

280. 조천사(朝天使)(4)2021.09.04.

사내가 아닌 계집이라는 것. 모든 것이 사내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었다. 심지어 세가 내에서 최고수 반열에 든 척사영이라고 해도 그건 예외가 아니었다. 사내가 아닌 여인의 몸으로는 조선에서 태어나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척사영이 강함에 계속해서 집착하는 이유였다. 강해진다면, 그래서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사내건 계집이건 상관이 없을 테니까.

16553259267043.jpg“사내가 아니라 계집이다? 그래서?”

그런데 그때 척사영이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16553259267043.jpg“중원보다 땅도 작고, 사람도 적은 나라에서 사내와 계집을 구별한다고? 허참.”

만우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임금은 이마를 찌푸렸다.

16553259267054.jpg“국법이지. 나라의 법.”

16553259267043.jpg“그래서 척사영 정도 되는 무인을 계집이라는 이유로 큰일을 맡기지 못하겠다?”

16553259267054.jpg“큰일을 시킬 사내도 차고 넘…….”

16553259267043.jpg“척사영보다 뛰어난가?”

16553259267054.jpg“…….”

임금의 입이 다물어졌다. 물론 더 원론적으로 파고들면 할 이야기들이야 많았다. 유교에 나오는 율법들, 그리고 사내와 계집의 신체 조건 등등. 하지만 만우는 그 모든 것들을 일축했다.

16553259267043.jpg“화경에 오른 고수에게 사내인지 계집인지를 따진다라. 기가 막힌 일이야. 하하핫.”

만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중원이라고 해서 사내와 계집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림은 사내와 계집이란 것보다는 무공과 경지로 사람을 구분했다. 여자의 몸이라도, 화경에 다다랐다면 무림인들은 우러러 보기 마련이다. 우러러 보는 그 무림인들도 평생을 전부 무공에 매진한 이들이기 때문에 화경에 다다르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십좌 중 일주(一主)인 사림곡의 도주(刀主)는 여인이다. 무림십좌는 모든 무림인들이 선망하는 열 명의 고수들을 뽑아 놓은 것이다. 그들 모두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그런 그들과 동등한 경지에 다다른 척사영을 보면서 임금이 하는 말이 고작 그런 소리라니.

16553259267043.jpg“할아비라고 하는 작자는 혼인에만 눈이 멀었고.”

만우는 척일의 행동 또한 꼬집었다. 척일 정도 되는 고수가 손녀의 경지와 가능성에 대해서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입에 올리고 다닌다는 것은, 손녀에게 무인보다는 곡산척가의 일원으로서의 희생을 바라는 것이다. 그게 조선이었다.

16553259267086.jpg“은공…….”

척사영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 준 이는 만우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가문 사람들은 척사영에게 여인으로서의 몸가짐을 요구했다. 화경이라는 고절한 경지에 다다른 고수에게 말이다. 그녀를 숨은 비수라면서 가문에서 내보내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척사영이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밖을 돌아다니다가 구설수에라도 올라서 혼삿길이 막힐까, 가문의 원로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6553259267043.jpg“척사영은 무인이다! 여인이기 이전에.”

만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16553259267043.jpg“그녀가 여인이란 것을 보기 전에, 그녀가 자신의 살과 뼈를 깎아 내며 화경이란 고절한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금이건, 노인네건!”

만우는 고개를 돌려 척사영에게도 말했다.

16553259267043.jpg“그리고 너도.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네가 손에 쥐어야 하는 것이다. 가문이라고, 널 낳아 준 부모라고, 피가 이어졌다고 네 운명과 인생을 맡기지 마라. 네 인생의 주인은 네가 아니냐.”

16553259267086.jpg“…….”

척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만우의 말이 백 번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과 가문에 대해서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척사영이기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16553259267054.jpg“……흠. 이거 한참 어린 후배 앞에서 얼굴이 뜨겁군.”

척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의 일갈에 자신 역시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자각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척일은 괴짜라 불리는 만큼, 창피함에 대한 반응도 괴짜다웠다. 그냥 인정해 버렸으니까.

16553259267054.jpg“땡중이나 호랑말코 도사 놈도 아닌 것이 말에 현기(玄機)가 담겨져 있구나. 특이한 놈이로다. 탈태(脫胎)를 한 늙은이는 아닌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척일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척사영을 바라봤다.

16553259267054.jpg“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16553259267086.jpg“하, 할아버님.”

16553259267054.jpg“저놈의 말이 맞다. 넌 화경이지. 가문의 조상들도 닿지 못했던 경지에 도달한 고수가 바로 너다. 여인이기 전에 무인이구나. 그래, 그런 것이었어. 흐허허헛.”

척일은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척일의 눈에 현기가 깃들었다. 만우의 일갈이 작은 깨달음을 가져다 준 것이다. 경지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척일 정도의 고수면 작은 깨달음을 모으고 모아 벽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16553259267054.jpg“고맙다 이놈아.”

척일이 만우에게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놈 저놈 하는 척일이었지만 만우는 피식 웃었다.

16553259267043.jpg“그래도 귓구멍이 뚫려 있는 노인네였군.”

16553259267054.jpg“아직 백 년은 더 팔팔하다!”

척일이 팔에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임금의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진 채였다. 만우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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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다 한 번에 말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는 없다. 살아온 방식이 제각기 다르고, 오랫동안 품어 온 생각의 크기가 다르니 말이다.

16553259267043.jpg“어쨌거나.”

만우는 그런 국왕을 이해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에 만우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16553259267043.jpg“저기, 동군영 나리는 무고하다.”

만우는 국왕 앞에서 동군영에 대해 말했다. 동군영이 지금 처한 상황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16553259267054.jpg“과인도 알고 있네만.”

임금은 만우가 화제를 돌리자 더 이상 척사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척사영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안건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16553259267043.jpg“여의손, 그 자가 먼저 개성삼(蔘)을 밀수하려 하였고, 그것을 이용한 것뿐이지.”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계에 그런 것까지 전부 써 놓은 후 한양으로 올린 동군영이다.

16553259267054.jpg“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네.”

임금은 얼굴 가득 곤란한 기색이었다. 철혈왕인 임금도 조선의 모든 정사를 홀로 돌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16553259267054.jpg“여의손, 좌정승 조준의 제자이네.”

16553259324992.jpg“조준 대감의…….”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좌정승 조준이라면 개국공신이자 상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원로 중의 원로 대신이었다. 거기에 현 임금이 정안군인 시절, 정안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가장 드높였던 인물이기도 했다. 중간에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난 적도 있지만,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임금이다. 그 같은 원로의 도움을 받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함이었다. 정안군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던 정도전과는 달리, 현 임금을 강력하게 세자로서 추대했던 대신이었기 때문에 임금의 신뢰 또한 두터웠다.

16553259267043.jpg“조준?”

하지만 만우에게는 그저 처음 듣는 이름일 뿐이었다. 동군영이 놀라는 것을 보니 대단한 이란 것이 분명했지만 만우는 임금에게 말했다.

16553259267043.jpg“좌정승이고 우정승이고. 잘못을 한 놈에게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은 진리요 이치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16553259267054.jpg“과인이 나서 여의손을 불러 국문했다가 좌정승이 나선다면, 정쟁(政爭)이 될 터.”

조준은 인망이 두터운 대신이다. 그는 권문세족임에도 불구하고 여말 시기에 세족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정도전과 뜻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독학으로 성리학을 익혔고, 다양한 개혁들로 고려를 타파하고 조선의 기강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기에 많은 대신들과 관료들이 그를 귀감으로 삼았다. 그런 조준이 나선다면 대신들 중 상당수가 그의 말에 동조할 것이 분명했다. 여의손이 올린 장계는 전부 감찰방 장령의 그릇된 행동에 읍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조준이 여의손을 편들고 나선다면 아무리 철혈왕이라 불리는 임금이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16553259267043.jpg“까다로운 늙은이가 또 있었군.”

16553259267054.jpg“예끼! 나에 비하면 그놈은 아기다, 아기!”

척일의 나이는 여든이라고 했다. 반면 조준은 아직 예순도 되지 않았다. 그런 조준을 늙은이라고 하자 척일이 발끈하며 만우를 다그쳤다.

16553259267043.jpg“늙어서 좋으시겠소?”

16553259267054.jpg“저놈이…….”

척일은 ‘말을 말아야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우는 임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16553259267043.jpg“그래서. 그 정쟁(政爭)이 일어날까 두려워 죄 없는 장령 나리를 벌하시겠다?”

16553259267054.jpg“방법을 생각해 내야지. 그리고 그것이 정치(政治)이고.”

만우의 기세에 임금의 기세가 부딪쳤다. 홀로 악착같이 살아남은 만우의 기세와 조선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왕의 기세였다. 만우의 시각은 억울함을 느낄 만한 개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었고 임금은 다수를 다스려야 하는 군주, 혹은 중재자의 시각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부딪칠 수밖에.

16553259267043.jpg“그러면 간단하네.”

만우는 임금이 물러서지 않자 돌변하여 기세를 풀었다. 임금이 그런 만우를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16553259267043.jpg“데려와서 물어보면 되잖아.”

16553259267054.jpg“데려오다니. 누굴?”

16553259267043.jpg“그 조준이라는 조정대신.”

16553259267054.jpg“뭐라?”

임금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창백해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누굴 잡아 온다고 한 것인지, 그리고 만우가 입을 열었으면 그게 거짓이 아닐 것이라는 강한 예감 때문이었다.

16553259267043.jpg“결국은 여의손이 올린 상소가 진실되느냐, 아니면 장령 나리가 올린 장계가 진실되느냐의 문제 아닌가?”

16553259267054.jpg“…….”

16553259267043.jpg“국왕은 조준이란 그 대신이 반대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까. 직접 불러서 물어보면 될 터.”

16553259267054.jpg“불허(不許)한다.”

16553259267043.jpg“국왕에게 윤허를 묻지 않았다!”

만우는 눈을 부라렸다. 임금은 골치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16553259267054.jpg“겸사복!!!!”

16553259410862.jpg“예, 전하!”

임금의 뒤에 서 있던 겸사복 두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권희달의 부상이 심해 임금의 호위를 대신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16553259267054.jpg“좌익찬 설운! 그리고 대종사께서도 검주를 막아 주시오.”

만우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동군영이 그런 만우에게 다급히 말했다.

16553259324992.jpg“겨,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만우!!!”

16553259267043.jpg“장령 나리. 잘못하면 나리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니까?”

보빙사인 여의손이 없었던 사실을 날조했다. 그리고 임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여의손과 이어진 조정 대신들과 내부적으로 반목을 일으키는 것이 걱정되어 어찌할 줄은 모르고 있었다.

16553259267043.jpg“국왕! 간단한 이치다. 잘못을 한 자는 벌을 받는다. 그러니 잘못을 누가 한 것인지 시시비비를 가려 보면 되는 일이다. 만약 국왕이 못 하겠다면.”

만우는 기운을 일으켰다. 척일은 혀를 끌끌거리며 찼다.

16553259267054.jpg“득보다 실이 많겠구나.”

척일의 전신에서도 노도와 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갑작스런 변화에 설운과 척사영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겸사복 둘도 만우가 빠져나갈 수 있는 문을 가로막았다.

16553259410896.jpg“하아. 죄송합니다, 대협.”

설운 역시 한숨을 내쉬고는 기운을 일으켰다. 척사영은 임금과 만우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16553259267043.jpg“여의손이란 놈의 뒤에 조준이 있다면, 장령 나리의 뒤에는 본주가 있다. 국왕.”

16553259267054.jpg“만우!!!!!!!”

여의손이란 놈이 조준이나 다른 대신들을 이용하여 동군영을 겁박한다면, 그런 동군영의 뒤에는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임금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저 만우란 작자는 도저히 제어가 안 되는 자였다. 감찰방 장령 하나 구하겠다고 좌정승이 오밤중에 납치되어 올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만우의 존재가, 그리고 만우와 자신의 관계가 알려지게 되는 셈이다. 자신의 위신이 떨어지 만한 이런 관계를 아는 사람은 소수일수록 좋은 법이다.

16553259267054.jpg“일단 조금 더 생각을…….”

촹!!!!!! 그때, 누군가가 검을 빼들었다. 대전이었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검을 뽑아들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검을 뽑아든 이가 바로 동군영이었다.

16553259324992.jpg“그만하시게 만우!!!!!”

16553259267043.jpg“장령 나리. 너…….”

만우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동군영이 검을 뽑아들고 만우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런 동군영의 다리가 달달달 떨리는 것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하지만 동군영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동군영의 얼굴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신이 만우에게 감히 검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16553259267043.jpg“이게 무슨 뜻이지 나리?”

동군영의 검 끝이 파르르하고 떨렸다. 만우에게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군영은 식지 않은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절대로 만우를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치는 눈이었다.

16553259324992.jpg“가면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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