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혈성(2)2021.07.31.
“뭐 그렇다면.”
“한데 들은 수준과는 영 딴판인 것 같네만.”
척일은 손을 들어 보였다. 척일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만우는 모든 것을 흡수하는 솜처럼 척일이 아무리 내공을 발산해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만우가 척일보다 명백히 우위의 실력을 가진 고수라는 뜻이다.
“그래서. 붙자고?”
“그러고 싶네만, 아쉽게도. 사영이를 데리러 왔네.”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같은데.”
“알지. 그래도 만우, 자네를 만나 보고 싶었고. 그런데 말일세. 혹시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아는가?”
“모르지.”
어릴 때부터 중원을 떠돌아다닌 만우다. 거기에 머슴이었던 만우가 유교에 대해서 알 리 없다. 애초에 사대부나 맹자 왈 공자 왈을 떠들지만 말이다.
“전국을 유랑했지, 내 손녀랑?”
“그렇지. 전국만 아니라 왜까지 다녀왔지.”
“그럼 그동안 같이 먹고, 자고 했을 것 아닌가.”
“음…… 당연하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척일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만우를 쳐다봤다.
“그러면 내 손녀를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채, 책임?”
만우가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
“이쪽으로.”
“음…….”
동군영은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권희달이 안내하는 길을 그냥 따라가기만 하자 어느새 궁 안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이런 길이 있을 줄은…….”
“그대가 어디서 발설할 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안내한 것이오. 그러니 알아서 처신하길 바라겠소이다.”
권희달은 냉한 목소리로 동군영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쯧. 어명만 아니었더라도 그냥 기절시켜서 끌고 갔을 것을.”
권희달이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동군영이 파르르 떨었다.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는 운검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은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단 둘이 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군영은 바짝 긴장했다.
“음?”
그렇게 권희달의 뒤를 따라 궁의 뒷길로 움직이던 동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권희달이 제 자리에 멈춰 서서는 고개를 갸웃거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말하라.”
동군영이 물었지만 권희달은 동군영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권희달이 허공에 대고 말하자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권희달의 앞에 내금위의 무관이 나타났다.
“헉!”
놀란 동군영의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권희달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소심함은 여전한 것인가.’
그래도 검주와 함께 다녀 소심증이 조금은 나아졌으리라 생각한 권희달이다. 하지만 동군영의 소심증은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그랬으니 괜히 검주 만우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기사관에 불과한 그를 어사로 삼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운검. 곡산척가의 척 대종사께서 한양에 드셨다 합니다.”
“척 대종사께서?”
대종사란 하나의 분야에서 그 어떠한 사람도 따를 수 없는 일가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권희달이 아는 한 대종사란 이름을 쓸 수 있는 이는 조선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척일 대종사께서?”
“예.”
“어떤 연유로 드셨다는 것이냐?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거늘.”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는 권희달이었지만, 권희달도 척일의 가르침을 받았었다. 곡산척가가 조정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권희달이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는 것이지 진짜 조선의 강자들은 척가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곡산척가 출신이 아님에도 화경에 도달한 권희달의 재능이 그만큼 어마무시하다는 뜻이었다.
“보고를 받은 바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용무로 한양에 오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리 소란스러웠던 것이냐?”
“예, 운검.”
동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궁이 소란스럽다니. 동군영은 궁이 너무나도 조용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희달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고개를 돌려 동군영을 쳐다봤다. 주상전하께서 어명으로 동군영을 몰래 들이라 명하셨지만 척일 대종사가 한양에 들었다면 응당 그를 맞이하러 가는 것이 운검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건 주상전하의 어명 이전에 상왕의 명으로 선포된 국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겠다. 동 장령을 내금위로 안내하라. 내금위장에게 일러 전하를 알현케 하라.”
“……누구시라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까?”
내금위의 무관은 직접 전하를 알현할 정도의 인사라는 것에 동군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권희달에게 물었다. 권희달은 그런 내금위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알 필요 없다. 어명이니.”
“충!!!!”
어명이란 소리에 내금위 무관의 고개가 두 말 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권희달은 고개를 돌려 동군영에게 말했다.
“내 직접 그대를 안내하려 하였으나 중한 일이 생겼소이다. 내금위의 안내를 따르면 될 것이오.”
“내금위…….”
동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양반이 내금위를 만나는 일은 딱 한 가지 경우에 밖에 없었다. 역모. 그게 아니면 사실상 동군영 같은 기사관 따위는 평생 조정 일을 해도 만날 일이 없는 것이 바로 내금위인 것이다. 그런 내금위를 따라가라니. 주상전하께서 어명으로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군영은 내금위의 무관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권희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동군영을 간단하게 무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휙!
“가시지요.”
그렇게 권희달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난 뒤 내금위 무관이 동군영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동군영은 울상을 지어 보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옥사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불안에 떠는 동군영의 목소리가 조용하기만 한 궁 안에 울려 퍼졌다. *****
“향아. 저기 잘 봐. 저놈들이야.”
“언니, 저희 둘이서 진짜로 하자고요?”
“할아범이 납치되었다잖아! 할아범을 구해야지.”
“…….”
김향은 잠시 망설였다. 딱 봐도 자신들보다 나이도 많고, 험상궂어 보이는 남정네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매의 말대로 조 씨 할아버지를 납치한 나쁜 놈들이 모인 곳이다.
“알겠어요, 언니!”
피도 눈물도 없는 왈패들에게 잡혀간 조 씨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니 할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걱정 마! 왈패 놈들은 향이 너와 나 정도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니까!”
방매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듬직한 얼굴로 김향에게 말했다. 김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매가 벌떡 일어나 담벼락 위로 올라가며 소리쳤다.
“야! 야 이 도둑놈들아!!!!!!!”
방매가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자 소매에 은병과 낫이 교차된 문양을 수 놓은 하오문도들이 고개를 돌려 방매를 쳐다봤다.
“뭐야 저 계집애는.”
“저거 걔 아니야? 매분구 중에 독한 계집 하나 있다는 거.”
“아. 한양제일매분구인가 뭔가 하는 걔?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하오문도들은 전혀 긴장감이 없는 얼굴로 방매를 보면서 킬킬거렸다. 그래도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도들이라고 한 눈에 방매를 알아본 것이 용했다.
“도둑놈들아! 내 사향을 내놔! 그리고 조 씨 할아범도 내놓고!!!!!”
“……사향?”
“저 계집이?”
하지만 방매가 소리를 지르자 하오문도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거, 내가 힘들게 구해 온 거다! 그냥 가져가도 유분수지, 이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고 사향을 훔쳐 가는 놈들이 어디 있어? 어? 내놓으란 말이다아아아아!!!!!”
방매가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방매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주변에 알리려는 것이다.
“안 내놓으면!!!”
방매가 담벼락을 밟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하오문도들이 날아오는 방매를 멀뚱거리며 쳐다봤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냥 어린 계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혼난다!!!!”
뻐억!!!!! 하오문도 중 한 명의 눈이 돌아갔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방매의 발등이 하오문도의 국부에 정확하게 틀어박힌 뒤였다.
“꺼…… 꺼어어억…….”
“말똥이!!!”
“이 미친 계집이!!!!!”
하오문도들이 게거품을 물면서 뒤로 고꾸라진 동료의 이름을 부르면서 방매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매가 뒤를 쳐다보면서 크게 소리쳤다.
“향아!!!!!”
“가요 언니!!!!!!”
하오문도들은 눈앞의 방매에게 모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아니,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린 김향을 보면서 신경을 기울이는 하오문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오문도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뻐억!!!! 기력(氣力)을 끌어올린 후 내지른 김향의 주먹에 단말마의 비명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하오문도가 허공에 붕 떠서는 멀리 나가떨어졌다.
“저, 저 계집은 또 뭐야!!!!!”
길 한복판에서 개싸움판이 벌어졌다. *****
“크하하핫! 딸꾹!”
“뭐야. 딸꾹? 벌써 취했으무?”
감령과 위문이 서로서로를 노려보면서 비틀거렸다. 그들 주변으로는 술이 수십 독은 쌓여 있었다.
“그럴 리가! 공짜 술에 산사나이는 취하지 않는다! 딸꾹!”
“으헤헤헤헤. 딸꾹거리는데무?”
“너는 근데 왜 자꾸 무무거려! 딸꾹!”
“무무? 그런 적 없으무!”
감령 옆으로는 필두와 문형일이 이미 뻗어 있었다. 그리고 위문 옆으로는 웅풍과 백영이 서로 등을 기댄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저, 저것이 사람인양?”
“내 두 눈으로 똑똑하게 봤다구. 저 자리에 앉은 지 반시진도 안 됐다니까!”
“주선들이 한양에 내려와 내기를 하는 겐가?”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도저히 사람이 마실 수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해 본 정도의 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마셨다면 아마 술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직 두 명이 살아남아 취하기는 했어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한 독 더!!!”
감령이 호기롭게 소리치자 위문도 질 수 없다는 듯, 한 독을 더 시켰다. 그런데 그때 주막 주변에 서서 안쪽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비켜! 비키란 말이다!”
“형님! 저쪽입니다!”
“어떤 놈이 건방지게 감히…….”
소매 끝에 은병과 낫이 교차된 문양을 박아 넣은 건장한 하오문도들이 구경꾼들을 밀치면서 우르르 달려갔다.
“아이쿠!!!!!!”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다른 곳에서 술을 구해 오던 주모가 하오문도들에게 떠밀렸다. 주모가 건장한 하오문도들이 미는 힘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주모가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뒤로 넘어갔고, 주모가 손에 들고 있던 술독이 날아올랐다. 쨍그랑!!!!!! 땅에 떨어진 술독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철로 만들어진 술독도 아니고,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버티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에이씨! 어디서 막아! 확!!”
주모와 부딪쳐 넘어질 뻔한 하오문도가 손을 확 하고 치켜들었다. 벌러덩 나자빠진 주모가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때,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 끄어어어…….”
쿵! 하오문도의 입이 쩍 하고 벌어지더니 부글거리며 게거품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앞으로 몇 발자국 휘적거리며 걸어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어이쿠!!!”
그 앞에 있던 주모가 하오문도에게 깔려 팔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런 주모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
“허억…….”
주막 주변에서 구경을 하던 구경꾼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주막 안에서 내기를 벌인 주선(酒仙)들이 마신 주향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우르르 몰려가던 하오문도들이 마치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 퍼덕이면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꾹!
“에이씨!!!”
딸꾹질과 함께 감령이 그런 하오문도들에게 뚜벅거리며 걸어갔다. 위문 역시 그런 감령의 옆에 서서는 인상을 팍하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