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너처럼 강한 여자는 처음이야(2)2020.03.14.
“장군!”
“설 부장은 적들의 발만 묶어놓으면 되네.”
설운은 이천우를 애원하듯 불렀지만 이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상전하께서 걱정이 많으신 것은 알겠으나, 조사의 정도에 겁을 먹어서야 장수라고 할 수 없지.”
이천우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 넘쳤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고 나서 한동안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다. 백성들에게 평화는 기다려지는 것이지만, 공을 세우고 싶은 무장에게는 평화란 곧 출셋길이 막힌다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천우는 간만에 찾아온 공을 세울 기회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는…….”
“그만!”
이천우가 큰 목소리로 설운의 말허리를 잘랐다. 설운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대는 얼마 전까지 전하께 죄를 저지르고 갇혀 있었던 죄인이 아닌가? 전하께서 그대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는 공을 세워 그 과를 씻기 위함이지, 내게 조언을 하라고 보내신 게 아니네.”
“허나…….”
“전장에서는 군을 이끄는 장수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법. 전장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일어나지. 그러니 주상전하의 이야기는 그만하시게. 주상전하께서도 병법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니.”
설운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좋지 않았다. 이천우는 지금 적을 깔보고 있었다.
“안변 따위의 촌에서 병력을 키워봤자 얼마나 된다고. 반면에 우리는 삼천이나 되는 대군이지. 병력으로도 조사의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어.”
“…….”
“설 부장은 병력 이백을 내어줄 테니 하고 싶은 것을 하시게. 아시겠나?”
“……예, 장군.”
설운은 결국 그 자리에서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물러나는 설운을 이천우는 겁쟁이 같다면서 비웃기까지 했지만 설운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내어준 이백이라도 사수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함주의 상왕전하를 공격할 정도로 야심이 많은 조사의인데, 허술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설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천우의 말대로, 조사의의 군이 별 볼일 없다면 설운 자신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철혈왕인 지금의 임금을 알면서도 반란을 일으킨 조사의다. 그런 조사의가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나라도 적의 발을 묶는 수밖에.’
임금은 안주의 이천우에게 적을 무리해서 이기려고 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이천우는 임금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지전의 대가. 하지만 전면전은 연전연패. 그 오명을 씻고 싶어 하니…….’
임금이 이천우를 조사의의 반란군을 진압할 선봉군으로 삼은 이유는 그가 국지전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난전 상황에서도 용병술에 제법 능했기 때문인데, 대신 이천우는 전면전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패장이었다. 국지전의 대가라고는 하지만 정작 큰 힘과 힘이 부딪치는 전면전에서는 늘 연패를 했으니, 그 오명을 씻고 싶어 한 것이다. 더불어 전공까지 쌓을 수 있으니, 이천우가 눈이 뒤집히는 것도 당연했다.
‘어려워. 매우 어려워…….’
이백의 병사들을 이끌고 군문을 나서는 설운의 표정이 어두웠다. 하지만 설운은 그것을 휘하의 병사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며 크게 소리쳤다.
“안변으로 향할 것이다!!!!”
***** 만우는 팔을 옆으로 뻗어서는 동군영을 막아세웠다. 그런 만우의 눈에는 이채가 일렁였다. 동군영은 그런 만우를 쳐다봤다.
“뭐하려고 그런 표정을 짓는건가? 어서 표정 바꾸시게.”
“어사 나리. 끼어들지 마.”
만우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깃든 흥분을 느낀 동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만우를 보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네. 시간이 없어. 서둘러 길을 떠나도 모자를 판에…….”
하여간 임금의 어명을 이곳에 있는 이들은 무슨 옆집 할아범이 말한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듯 했다. 동군영은 그 때문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에이. 뭘 그런 걸 걱정해. 그 노인네, 강해. 게다가 지금 보니까 이놈들…….”
만우는 척사영의 손에 의해 죽어나자빠진 관병들을 힐끗 쳐다봤다.
“함주로 가려다가 저쪽 손에 작살이 난 것 같으니까.”
“누구냐고 물었다!!!”
만우와 동군영이 자신을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에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척사영이 뾰죡하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경력에 만우의 소맷자락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푸확!!!! 척사영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수준으로도 경지가 가늠되지 않는 자에 의해 자신이 쏘아보낸 경력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뒤, 뒤로.”
“미친. 여인의 몸으로 화경이라고?”
“검후의 후인이라고 되는 건가?”
하마터면 자신들도 모르게 내상을 입을 뻔했다는 것에 감령과 필두가 중얼거렸다. 이찬은 이미 양녕을 안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뒤로 물러나.”
만우는 그런 이들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볍게 한번 부딪쳐 본 것이지만 실력이 제법이었다. 만우가 물러나라는 말에 문형일과 마익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우가 뒤로 물러나라고 할 정도면 자신들을 지키면서 앞에 서있는 좌검우도의 여인과 싸울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무림구좌?’
무림십좌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우였다. 문형일과 마익후는 만우가 다른 무림구좌와 자웅을 겨루기 위해 떠날 때에도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문형일과 마익후를 보호해 가면서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 여인이 최소한 그 수준에 근접한 초강자라는 뜻이다.
“물러나자.”
“물러나.”
방매와 양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이찬은 그런 양녕을 꽉 붙잡았다. 돌발행동을 벌일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원에서 온 놈들이구나.”
척사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곡산척가는 근래 들어 중원에서 대량으로 유입된 무림인들로 인해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오죽하면 그녀가 세상에 출도를 하였겠는가. 조선을 어지럽히고 있는 무림인들을 단죄하는 것 역시 곡산척가의 임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척사영도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넌 누구지?”
만우를 보는 척사영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아직도 여전히 그 수준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뜻은 최소한 자신과 동수를 이룰 정도거나, 자신보다 뛰어난 강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척사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정도 수준의 강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글쎄. 본주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네 정체를 밝히는 것이 수순일 터.”
만우는 괘검을 뽑아들었다. 척사영 정도의 강자라면 검으로 상대하는 것이 더 편했다.
“본주…… 무림에서 그쪽 정도의 강자도 들어온 건가? 대체 조선에 뭐가 있다고…….”
척사영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곡산척가의 척사영.”
곡산척가라는 소리에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동군영은 비록 하급 관리였지만 장원급제를 할 정도였기 때문에 많은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선제일무가. 척준경에 의해 곡산에 터를 잡고 살아갔지만 그가 비명에 가면서 권력무상을 느끼고는 권력에 손을 대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무가. 그들이 무과에 응시한다면 단연코 모든 무관직을 그들이 꿰찰 것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곡산척가의 저력은 아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대는?”
척사영이 좌검우도를 늘어뜨렸다.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게 자연체를 취한 척사영을 본 만우가 히죽 웃었다.
“검주. 만우.”
만우가 자신의 이름을 밝힐 정도면 진짜배기란 뜻이다. 하지만 척사영은 곡산척가에서만 자라왔기 때문에 무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다. 문형일은 만우를 보고도 전의를 불태우는 척사영을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눈부신 재능인데. 제대로 한 번 꺾이겠네.”
척사영이 이룬 경지는 놀라웠다. 하지만 문형일이나 마익후는 만우가 질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재능파괴자. 만우를 만난 수많은 난다 긴다 하는 각 문파의 신동들과 후기지수들을 떠올린 문형일이 웃었다.
“검주. 검의 주인이라.”
척사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차디찬 그녀의 얼굴에 냉막한 조소가 서렸다. 만우의 별호가 광오하다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력 한번 보자.”
호승심이 들끓어오른 척사영이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번쩍하더니 만우의 코앞에 도달한 그녀의 검과 도가 짓쳐들었다.
“흐으.”
만우는 코앞까지 쇄도해든 척사영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번쩍!!! 카앙!!!! 주르륵!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빛이 순간적으로 지켜보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터져나온 굉음과 함께 달려들었던 척사영이 뒤로 밀려났다. 밀려난 척사영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이 서려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척사영은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검과 도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분명 공격을 먼저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의 반격에 되레 물러난 것은 척사영 그녀였다.
‘후발선제(後發先制)!’
척사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후발선제라 함은 한 수 이상 실력이 낮은 하수들에게나 통하는 법이었다. 척사영은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는 것에 분노를 했다. 만우는 그런 척사영에게서 분노가 느껴지자 히죽 웃었다.
“빠르긴 하네. 그런데 힘이 없잖아. 동작도 크고.”
만우의 괘검에서 검명이 터져나왔다. 웅웅거리면서 벌떼가 몰려다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괘검을 들어 올린 만우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공격을 하려면.”
스팟! 콰직!!! 만우가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만우가 밟고 있던 땅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본 척사영도 앞으로 튀어나갔다. 쾅!!! 주르르륵
“크으…….”
하지만 이번에도 뒤로 밀려난 것은 척사영이었다. 척사영은 부딪치면서 내부가 진탕된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깊은 고랑까지 만들어내면서 뒤로 밀려난 척사영과는 대조적으로 만우는 태산처럼 우뚝 선 채 괘검을 늘어뜨렸다. 스르륵.
“호오.”
하지만 만우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만우의 앞섶이 잘려 펄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척사영은 도를 휘휘 허공에 휘둘러 남은 힘을 털어냈다.
“베어냈어? 그 짧은 찰나에?”
척사영의 왼손에 만우의 검을 막아내는 사이에, 오른손에 들린 도가 만우의 앞섶을 벤 것이다. 만우의 힘이 약했더라면 앞섶이 아니라 살이 갈라졌을 것이다. 반대로 척사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힘이…….’
척사영은 만우를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처음에는 깔봤던 만우지만, 부딪쳐보니 그녀보다 모든 면에서 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근력, 속력, 거기에 공력까지. 하지만 좌검우도를 제 몸처럼 다루는 그녀의 진가는 그녀를 상대하는 이가 도객과 검객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그녀의 공격은 화경의 도객과 검객이 합격술을 펼치는 것 같은 느낌을 상대에게 준다. 그런데, 만우는 그것조차도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버렸다.
“무기를 두 개 드니까 까다롭긴 하네.”
만우는 펄럭이는 앞섶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좌검우도의 고수를 만나서 싸워보는 것은 만우도 처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선 것이기도 했다. 중원에서는 만나본 적이 없는 유형의 무기를 다루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주창. 확실히 그놈과 백중지세겠네.’
만우는 주창과 척사영을 같은 선에 올려놓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좌검우도라면 약간 더 우세야.’
만우도 좌검우도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앞섶이 잘렸다. 그렇다면 척사영이 더 강하다. 만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여물면 더 강해지겠어.’
하지만 동시에 만우는 척사영의 문제점도 보였다. 척사영은 아직 완성된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험과 함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근데 너.”
만우가 대경해서는 놀라는 척사영을 보면서 말했다.
“어떤 미친놈이 너보고 좌검우도를 들라고 한거냐?”
“……이 망할 놈이…….”
척사영의 두 눈에서 살기가 쭉하고 뻗쳐나왔다.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척사영의 반응이 그녀의 약점을 건드린 것처럼 격렬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만우는 부풀어오르는 척사영의 옷자락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부동심도 이루지 못한 반쪽짜리인가?”
아무리 약점을 찔렸다고 해도 무인에게 이 정도로 분노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공력이란 것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 같은 것이라, 언제 폭주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우는 괘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한 번 된통 깨져보면, 깨닫는 게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