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세자의 고모(2)2020.02.15.
콰가가가가가강!!!!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던 위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위문은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주창은 누군가와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둘러진 주창의 마련검이 허공에서 전부 막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
그리고 주창의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좌검우도를 휘두르는 사람이 여인이라는 것에 위문은 두 번째로 경악했다.
“화경!”
꽈르릉!!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며 그 여파가 주변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위문은 자신의 앞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가는 경력을 도를 세워 빗겨내면서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군!”
“위문! 옥령을!”
주창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위문에게 소리쳤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위문은 옥령을 발견하고는 몸을 날려 옥령의 허리를 낚아챘다.
“사화, 사화!”
“우…… 우욱!”
위문이 옥령의 명문혈로 진기를 흘려보내면서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내부의 기혈이 베베 꼬인 실타래처럼 엉망이었다. 옥령의 눈이 스르륵하고 뜨였다.
“위……위문…….”
“어째서.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
위문은 말을 잊지 못했다. 백영과 웅풍, 테무르와 함께 떠난 옥령이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쓰러져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다른 이들은. 마정과 일산, 악궁은 어떻게 된 것이야!”
위문이 옥령에게 묻자 옥령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위문은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조, 조심…… 이……이성계…….”
“이성계? 상왕?”
이성계의 이름이 옥령의 입에서 나오자 위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주창과 대등하게 맞서는 웬 여인뿐 아니라 상왕이라니.
“주군!!!!”
쾅!!! 마련검을 옭아맨 검과 도를 떨쳐낸 주창이 뒤로 물러섰다. 뒤로 물러선 여인, 척사영이 기수식을 취하며 뾰족한 목소리로 주창에게 소리쳤다.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무슨 짓이죠?”
“다른 이들. 내 부하들을 어떻게 한 거지?”
예상대로 주창은 옥령이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뒤, 척사영을 보고 오해를 한 상황이었다. 화경급의 고수가 아니라면 옥령을 저렇게 처참한 몰골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군! 저 여자, 저 여자가 아닙니다.”
“뭐?”
위문의 피가 맺힌 고함소리에 주창이 뒤를 돌아봤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척사영이 검과 도를 허리춤에 꽂으면서 허리를 폈다.
“무례하군. 다짜고짜 검이라니.”
주창은 척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분명 여인인데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인인데, 실력이 자신과 비슷했다. 혈세천마의 아들인 자신과 말이다.
“난 주창이라고 한다. 그쪽은?”
“척사영.”
“곡산척가인가?”
주창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무림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조선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무가(武家)가 곡산척가라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군. 가서 동료를 돌봐야 하지 않나?”
“음…….”
주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포권을 했다.
“연유를 묻지 않고 공격한 것을 사과하도록 하지.”
“사과는 받아들여졌다. 그럼.”
척사영은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저 멀리 사라졌다. 주창은 위문과 옥령 곁으로 다가와 옥령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대체 누가.”
“이성계, 이성계라고 했습니다. 이성계!”
“상왕? 상왕 이성계?”
주창은 이성계의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죽었다면 시체라도, 살아 있다면 구해야 한다.
“대주.”
“마일. 사화를 부탁한다.”
무공과 경공이 떨어지는 마일이 뒤늦게 도착했다. 마일은 상처를 입은 옥령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창은 그런 마일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남은 세 명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주창이 다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고, 위문은 이를 악물면서 옥령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이게 무슨…… 대체…….”
“상왕이오.”
“……이성계?”
“그뿐이 아니오.”
위문은 주창에 맞서 검은 비단결 같은 머리를 흩날리면서 격렬하게 부딪치던 여인, 척사영을 떠올렸다.
“화경…… 화경의 고수가 나타났소.”
마일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 두두두두!
“이랴, 이랴!!!”
신검조 소속의 왜인 무사들은 말의 엉덩이에 상처가 날 정도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만우는 그런 그들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붙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꼭 싸우고 온 놈들인 것 같은데?”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따라붙어서 관찰을 하자 그들의 흐트러진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어있는 것이 땅바닥이라도 구른 모양이었다.
“설마. 세자를 만났다고?”
왜인 무사들끼리 왜어로 뭐라뭐라 주절대는 것이 귀에 들렸지만 만우가 알아들을 리 없다. 하지만 저들이 저렇게 급할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어딘가를 통해 세자의 행방이 유출이 됐고, 길목을 지키고 있던 저들과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 이찬이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는 뜻이다.
“정말 문주에는 안 들린 모양이네.”
왜인들은 문주 안을 둘러보지도 않았다. 곧장 문주를 관통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만약 저들이 세자를 쫓고 있다면, 세자는 문주에 들르지도 않았다는 뜻이 된다.
‘하오문이나 개방이 없으니까 이런 게 영 불편해. 쯧.’
은월루는 만우도 찾아내는 방법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만우는 입맛을 다신 뒤 발에 힘을 주어 공력을 뿜어냈다. 창! 차자자장!!! 그런데 그때, 만우의 귀에 저 멀리서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우의 눈이 커졌다. 앞의 왜인무사들이 추격대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더 있다고?”
만우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왜와 조선이 가까운 나라라고는 하지만, 거리상 가깝다는 뜻이지 그 사이의 바다는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조사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왜의 무사들을 끌어들인 것일까.
“나라 팔아먹을 놈이네, 이거.”
아무리 현비 강씨의 친척이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어떤 군주도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런 순간 그 나라의 주권에, 힘을 빌려준 외세가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 차자장!! 어쨌든 전방의 소란을 감지한 왜인 무사들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은 만우였다. 그들이 뒤를 따르던 만우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타다다다!!! 더 이상 기척을 숨길 필요도 없어진 만우는 모습을 드러내며 신검조 무사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만우 때문에 놀란 신검조 무사들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애초에 만우가 파고들 때까지 내버려 둔 그들이 만우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물러가거라. 네놈들의 나라로.”
만우는 괘검을 뽑아들지도 않았다. 이런 놈들에게는 괘검조차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래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베어 죽이는 것보다는 몇 대 때리는 것이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는 만우다. 퍼버버벅!! 꾸에엑! 꾸엑! 크엑! 만우는 죄 없는 말들은 때리지 않았다. 말들이 무슨 죄겠는가. 인간이 타겠다고 하면 등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말의 운명이다. 그 때문에 만우의 박달나무로 만든 지팡이, 괘(掛)는 정확하게 신검조 무사들의 머리통과 울대를 후려쳤다.
“소말만 한 놈도 없네.”
만우는 자신의 일격도 버티지 못하고 말 등에서 붕하고 날아 우직소리를 내면서 떨어진 왜인들에게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뒤 달리는 말들의 고삐를 잡아챘다. 히히힝!!! 손이 안 닿는 고삐는 허공섭물까지 동원해 말들을 진정시킨 만우는 뒤에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는 신검조 무사들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자. 가라. 도망가든, 돌아가든 너희 마음대로 하거라.”
짝! 짜자작! 만우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들이 지금까지 달려 나온 곳으로 돌아가라며 엉덩이에 맴매까지 한 대씩 때려주었다. 히히힝!!!
“으, 으아아악!”
“사, 살려!”
물론 말들은 그 뒤에 낙마해 구르고 있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기수였던 이들을 알아보지 못 하고 말발굽을 선사했다. 콰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만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만우는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뇌전처럼 튀어나갔다.
“이 놈드으을!!!”
만우는 쩌렁쩌렁한 이찬의 목소리를 듣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이는 처참한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에 제대로 심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직까지 힘이 남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감히 왜인들이!!!”
촤악! 이찬의 검에서 피어난 예기가 주변의 공기를 예리하게 베어냈다. 그 한 번의 휘두름을 피하지 못한 신검조 무사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땅으로 픽 고꾸라졌다.
“攻撃!!”
신검조 무사들 중 두 자루가 아니라 세 자루를 차고,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머리를 풀어헤친 이가 소리치자 이찬을 포위한 사무라이들 뒤에 서있던 이들이 넓은 소맷자락에서 표창을 꺼내들었다.
‘독!’
만우는 먼 거리에서도 그 표창의 검날에 번들거리는 검은 독을 보고는 인상을 썼다. 이찬도 그것을 본 것인지 이를 갈았다.
“비겁한 놈들!”
쉬리릭!!! 이찬이 검을 고쳐 잡음과 동시에 그를 향해 수십 개의 표창들이 날았다. 표창이 까다로운 이유는 표창이 바람을 타기 때문이다. 비검과는 다르게 표창은 바람을 타기 때문에 그 궤적을 읽기가 어려웠다.
“흡!!”
쐐에엑!!!! 그 표창을 향해 이찬의 검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이찬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표창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쯧. 검이 독문병기가 아닌 모양이네.”
만우는 이찬의 자세를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이찬의 자세는 실력이 모자란 사람의 눈에는 흠 잡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우 같은 고수의 눈에는 아니었다. 조금씩 어딘가 엉성하고 식(式)만 외운 티가 난 것이다. 아마 이찬의 독문병기는 검이 아닐 것이다.
‘창.’
하지만 세자익위사인 이찬이 궐 내에서 검이 아니라 창을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창이란 무기 자체가 소지하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고,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차자자자장! 그런 것치고 이찬은 빛살처럼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표창들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만우는 어느새 관객이 되어 팔짱을 낀 채 이찬의 검술에 혀를 쯧쯧하고 찼다.
“아니. 검을 창처럼 찌르기만 하는 놈이 대체 어디 있어? 창을 썼다고 검으로 찌르기만 하다니…… 쯧쯧.”
이찬이 하는 공격의 대부분은 찌르기였다. 하지만 검은 단순히 찌르기 위해서만 있는 무기가 아니다. 휘둘러 벨 수도 있었고, 검면을 이용해 표창을 막아낼 수도 있었다.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검이란 무기는 다른 무기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종합해 놓은 무기다. 그 때문에 검을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부르며, 많은 무림인들이 애용하는 것이다. 이찬이 휘두르는 검은 검의 묘용을 절반의 절반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벽만 깬다면 능히 화경에도 오를 실력인데 말이야.”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그런데 세자는 어디로 간 거야?”
만우는 이찬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세자가 보이지 않았다.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만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굴렀다. 쫘자작! 쐐액! 만우가 발을 구르자 만우가 딛고 있던 바닥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공력이 발출되면서 갈라진 땅바닥의 파편들이 마치 당가 무인이 암기를 던진 것처럼 사무라이들에게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