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너도 내 동생해라(3)2020.01.21.
“그놈도 화경이다. 더불어 지옥 같은 강자존이 숭배 받는 마교의 소교주고. 교주의 아들이란 소리다.”
“!!”
권희달의 눈이 커졌다. 만우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진실이란 소리다. 임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은월루 놈들을 동원하건 어떻게 하건, 세자가 그쪽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야 할 거야. 아 참. 그리고.”
만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한쪽 구석이 찌그러져 있던 슌스케가 허공섭물로 들려서는 질질 끌려왔다. 무지막지한 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놈. 왜에서 온 놈이라고 하던데 실력이 쓸 만했다. 거기에 함주본궁을 습격할 정도로 앞뒤가 없는 놈들이기도 하고.”
“뭐, 뭣이라?”
임금의 두 눈에 불꽃이 화악하고 튀었다. 슌스케는 제왕의 기운이 자신을 덮쳐오자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임금은 만우와는 전혀 다른 기질의 강자였던 것이다.
“으…….”
“걱정 마. 상왕 그 영감, 이런 놈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으니까. 그 덕분에 이놈의 팔 한 짝 날아간 거, 안 보여?”
“크음…….”
만우의 말과 허전한 슌스케의 소매를 본 임금이 화를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슌스케의 얼굴에 혈색이 그제야 돌아왔다.
“그 덕분에 지금은 노비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벌은 본주가 줄 테니 걱정 끄고.”
“……알았다. 왜인들이라.”
“왜상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니, 위장과 변장에도 능한 놈들이었다. 너. 아는 거 없어?”
슌스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앞에는 만우고 그 뒤에는 조선의 임금이다. 왜에 있을 때는 무서울 것이 없다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았으며 무서운 존재는 더 많았다.
“저희는 낭인인지라…… 대부분 왜의 다이묘, 아니 대명들은 저희 같은 낭인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낭인?”
낭인이란 소리에 임금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만우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낭인이 초절정이야.”
중원에서는 낭황 같은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낭인들이라 함은 주로 삼류 무사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뒷배가 없고, 변변찮은 무공도 없어 표국이나 단발성 의뢰를 받고 돌아다니는 이들. 그런데 슌스케는 그런 낭인이라고 하기에는 그 무위가 지나치게 높았다.
“음…… 낭인이라는 의미가 다른 게 아니라…… 속가! 속가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슌스케는 다급히 자신의 말을 바꿨다. 속가라는 말에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임금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만우는 그런 임금에게 조선식으로 바꿔서 말했다.
“외거노비.”
“아.”
슌스케는 얼굴 표정을 구겼지만 만우가 보기 전에 얼른 폈다. 자신은 노비가 아니라 위대한 왜의 무사였다. 하지만 주변의 면면을 둘러본 슌스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보다 약한 이는 임금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임금마저도 슌스케를 단순히 기세로만 압도했다.
“어쨌든, 이런 놈들도 있으니 알아서 대처하도록.”
“위험한 놈들이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조선이라…….”
임금은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금의 머릿속은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조선에도 나름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대처 방안이 있었다.
“돌아가서 연락을 해봐야겠군.”
“뭘?”
만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지만 임금은 그저 웃어 보였다. 잠시 후, 임금이 만우에게 말했다.
“뭐, 고맙네. 여러 가지 정보들. 그리고 세자도 부탁함세, 아우.”
“안 한다니까? 무효라고!”
임금의 동생이라는 소리에 만우가 발끈하면서 손을 휘저었지만 임금은 킬킬거리며 한 번 웃어보이고는 권희달을 대동한 채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에휴. 세자라. 잘못하면 괜히 혹 하나 달고 가겠는데?”
만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슌스케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이 조금 늘긴 했어도, 똑같이 간다. 전력으로. 괜히 가다가 세자라도 발견해서 동행하게 되면 우리만 힘들어. 알지?”
“제, 제가 말입니까 주인님?”
만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슌스케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응. 우마(牛馬)야.”
***** 호선은 커다란 눈을 뒤덮은 눈썹을 꿈벅거리다가 하품을 쩌억하고 했다. 그러자 그 아래에서 경계를 서던 가별초 몇몇이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씨익. 호선은 그런 가별초들을 보면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이 그들에게는 호의적이 아닌 모양이었다. 집채만 한 백호가 사람을 보면서 웃으면, 먹고 싶어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심한데.’
호선은 간만에 방매와 만우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지루해졌다. 500년을 살아왔지만 속세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언제 오지? 방매랑 만우는?’
만우는 호선을 놓고 가면서 상왕 이성계를 도와 그를 지키는 데 힘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함주를 대범하게 습격한 마교의 투귀대가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더 좋은데.’
속으로 중얼거린 백호, 호선은 앞발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그 앞발로 털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예뻐야지. 호랑이여도.’
사람의 눈에는 그저 공포의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호선은 자신의 겉모습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이었다. 여성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만우처럼 괴물 같은 인간이 또 있을 줄이야. 만우보다 약간 손색이 있기는 해도…….’
하지만 호선은 여전히 만우가 왜 자신보고 이성계를 지키라고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성계의 무위는 만우보다 손색이 있기는 하나, 그녀고 500년을 살아오면서 본 이들 중 손에 꼽혔기 때문이다.
‘나도, 나도 선주(仙舟)만 있었다면.’
만우는 호선이 500년을 산 영물치고는 약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호선의 전력이 아니었다. 그녀가 등선을 실패하고, 낙선(落仙)이 되면서 500년이란 세월동안 수양을 한 선기가 담긴 선주를 분실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 호선의 500년이 그대로 들어 있었기에 낙선이 된 후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 있었더라도 이상한 도술사에게 붙잡히는 그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응?’
그런데 그 순간 호선의 시선이 산등성이 쪽으로 휙하고 돌아갔다. 인간의 모습일 때와 백호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는 분명히 능력의 범위에 있어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습이 더 좋다고는 해도, 호선의 본질인 호랑이로 돌아갔을 때 가장 모든 능력이 최상에 달한다. 기감도 마찬가지다.
커흐으응!!!! 호선은 산등성이에서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다. 결코 좋은 기운이 아니었다. 적의가 담긴 기운을 느낀 호선이 포효를 터뜨리자 콰창하는 소리와 함께 본궁의 문을 뚫고 화살이 튀어나왔다. 콰작!! 쐐액!!! 호선은 본궁의 문을 뚫고 튀어나온 화살이 자신이 포효를 터뜨린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사이 거대한 존재감이 그녀의 기감에 잡혔다.
“저쪽이더냐?”
크릉! 어느새 거대한 백룡궁을 챙겨든 채 무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이성계가 허연 수염을 흩날린 채 서있었다. 산등성이를 쳐다보는 이성계의 눈이 매서웠다.
“그 아이를 그렇게 보낸 놈들이 있는 곳이라, 이 말이지?”
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은 선명한 마기였다. 호선은 유성우처럼 그곳으로 폭사하는 이성계의 화살을 눈에 담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허공에서 번쩍하는 눈부신 빛무리와 함께 이성계의 화살이 터져나갔다.
“그놈이구나. 순일이를 죽인 놈. 그리고 함주 관아를 무너뜨린 놈!”
이성계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서렸다.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이성계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화살을 공중에서 격추시킬 정도의 활 솜씨를 가진 놈이 저 쪽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상왕 전하!!”
“전하!”
한발 늦게 변고를 알아챈 가별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성계는 그런 가별초를 힐끗 쳐다보고는 호선의 등 위에 올라탔다. 크흥?
[어마! 이 노인네가 어디 말만 한 처녀 위에!]
호선이 깜짝 놀라 몸을 뒤틀었지만 이성계는 강철 같은 허벅지로 호선의 등 위에 자리를 잡은 후였다. 이성계는 흡족하게 웃었다.
“탑승감이 좋구나. 허허허.”
크왕!
[내려욧!!!]
호선이 등을 뒤틀었지만 이성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 누군가를 태운 것은 만우가 처음이었던 호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노인네도 만우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괴물 반열에 드는 노인네다. 자신이 몸을 뒤튼다고 해서 쉽사리 포기하고 내려갈 인물이 아니었다.
‘활과 화살이라니. 난 샤냥꾼이 싫단 말이야.’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호선은 한숨을 훅하고 내쉬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내쉰 한숨에 본궁 바닥에 깔려있던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가별초는 본궁을 수호하라.”
“전하! 허나 저희의 본분은…….”
“내가 이유 없이 너희들을 떼어놓았던 적이 있나?”
가별초 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성계의 눈을 보니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런 고집스런 눈을 한 이성계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이건 조카 손자를 잃어버린 핏줄로서의 분노다. 그러니 가별초는 본분에 다하라.”
가별초의 본분은 상왕을 수호하고 함주본궁을 수호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었다. 가별초를 데려가 봤자 저들에게 살육을 당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가족처럼 아낀 가별초가 허무하게 희생당하는 것은 이성계도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함주본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하! 그렇다면 소신이라도 데려가 주소서.”
“그대는…….”
이성계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공력을 극성까지 끌어올려 경공으로 달려온 남자는 척준영이었다.
“소신, 곡산척가의 소사각 각주로서 이 조선에서 일어나는 무뢰배들을 단죄할 의무가 있나이다. 그것이 저희 곡산척가의 본분!”
척준영의 두 눈이 푸르게 빛이 났다. 척준영도 저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대의 실력은 저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척준영의 실력을 가늠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척준영의 실력은 절정이다.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모순이 있으나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척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본가에 함주의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나이다. 또한 소신의 몸에 추종향(追從香)을 묻혀두었으니…….”
“올 것이다?”
“이미 소사각의 제자들이 비명횡사 하였나이다. 응당 제자의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척준영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아직도 제자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었다. 관계가 각별하기도 했을 뿐더러, 결국 죽은 이들은 차세대에 곡산척가를 이끌어나갈 동량들이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
하지만 이성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선은 기감을 산등성이 쪽에 곤두세운 채 둘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릉!”
갑작스레 오밤중에 일어난 폭음과 굉음, 그리고 터져 나온 빛 때문에 놀란 함주의 백성들이 일어나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이성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산등성이 너머에서 느껴진 불길한 기운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있다고? 이 노인네를 상대로?]
모든 무기가 다 그렇지만 유독 활은 다른 무기들에 비해 불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활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원거리 무기이기 때문에 다루기 위해서는 적절한 원거리가 필요하고, 쏘아 맞히는 실력을 기르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어떤 놈들이기에.]
만우는 마교 놈들에 대해서 호선에 대해 경고하면서 각별의 주의할 것을 강조했다. 그곳에는 만우와 손을 섞어도 백 초 이상 버틸 수 있는 강자가 있다면서 누누이 강조를 한 것이다.
“어찌하여! 저희 척가를 못 믿으시는 것입니까!”
척준영은 이성계에게 소리쳤다. 이성계는 그런 척준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죽음을 도외시한 눈이구나. 그 눈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