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너도 내 동생해라(2)2020.01.18.
“호오. 왕이 변장하고 궐 밖으로도 나오나 봐?”
“검주…….”
권희달을 덜렁 옆에 대동한 왕이 짙은 색의 장포와 커다란 갓을 쓰고는 주막에 앉아 만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만우는 그런 권희달에게 손을 대충 들어 인사를 해주었다.
“여.”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하지 마라. 네놈과 친해질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만우를 본 권희달에게서 짙은 호승심이 풍겨져 나왔다. 만우는 코 밑을 슥하고 손으로 닦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누추하신 곳에서 이런 탁주 같은거 드시면 배에 탈이 날텐데?”
바로 어젯밤에 악귀 같았던 만우를 본 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를 쳐다보는 왕의 얼굴에는 약간의 공포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한 나라의 국왕인 것이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만우라고는 하나, 그는 수많은 조선 백성을 다스리는 군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만우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심한 것도 어릴 적 동북면에서 많이 먹어보았다. 명에도 다녀와 봤고. 걱정해 줘서 고맙군.”
난데없이 왕이 주막에 나타난 것에 사인방을 비롯한 방매가 눈을 부릅 떴다. 왕은 고개를 살짝 모로 꺾어 문형일의 손에 버둥거리는 방매를 확인하고는 만우에게 말했다.
“저 아이인가?”
“뭐가?”
“이방매.”
방매의 눈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방매는 상왕에게 ‘이씨’를 받았다. 그러니 왕의 여동생이 된 셈이다.
“아바마마도 참 주책이시군. 그 나이에 저런 어린 동생이라니.”
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인방은 조선의 왕을 대면했지만 별로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들에게는 검주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보거라.”
“…….”
왕이 방매를 부르자 문형일이 방매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방매는 왕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흐음. 그래도 명색이 오라비인데, 얼굴이나 한번 보러 왔다.”
만우는 코웃음을 쳤다. 방매를 보자고 그 바쁜 국왕이 이 주막까지 암행을 나왔을 리 없다. 만우가 고개를 휘휘 돌리더니 주막 한쪽에 처박혀 있는 슌스케를 불렀다.
“야. 우마!”
“예. 예! 주군!”
슌스케가 쭈뼛거리긴 했지만 만우의 부름에 재빨리 달려왔다. 슌스케를 본 사인방이 고개를 갸웃했다. 웬 놈이 검주를 주군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따악!
“내가 왜 주군이야. 주인이라 불러.”
“주, 주인님.”
슌스케는 만우와 함께 등장한 사인방을 보고 기겁한 상태였다. 그의 팔이 멀쩡하다 하더라도 도저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이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그래도 일월조의 무사로 왜에서도 당할자 몇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자부한 슌스케다. 오른팔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실력을 쌓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한 네 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보자 슌스케가 쭈그러들었다. 강자에게 약한 남자가 바로 슌스케였다.
‘여긴 괴물 소굴이란 말인가!’
그 전에 권희달을 보고도 이미 혼이 나가 있었던 슌스케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마음만 먹는다면 슌스케의 목을 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작은 나라라 하였거늘. 역시…….’
“내가 여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어, 안 했어?”
만우는 자신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온 슌스케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그를 잡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슌스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보다 고수를 어떻게 막으라고. 팔도 없는데.’
팔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목까지 내걸란 말인가? 하지만 슌스케는 만우 앞에서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만우가 자신보다 절대적으로 강한 강자였기 때문이다. 임금은 그런 만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선의 임금인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만우이니 그러려니 했다.
“잠깐만?”
만우가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만우가 일부러 슌스케를 임금 앞에서 잡는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간단했다. 만우는 슌스케에게 이곳을 막으라고 말했고, 그 말에서는 조선의 임금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임금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만우가 한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내가 이 아이 오라버니를 하기로 했는데 말이야.”
“오라버니?”
임금의 눈썹이 휘었다. 만우는 방매의 머리를 스윽하고 쓰다듬었다. 방매는 그런 만우의 뒤로 자신도 모르게 슬쩍 몸을 숨겼다. 왕의 눈길이 너무 따가웠기 때문이다.
“그럼 나도 국왕, 그대와 핏줄이겠군?”
만우의 어이가 없는 말에 권희달이 입을 떡 벌렸다. 방매는 상왕이 ‘이씨’란 성을 내려준 것이다. 하지만 만우에게는 그 누구도 ‘이씨’ 성을 하사한 적이 없다.
“그건 인정 못 하겠지?”
만우가 임금을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임금은 크흠하고 침음을 흘렸다. 만우의 능력은 분명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나, 만우는 머슴이다. 방매라는 아이도 상왕이 사성(賜姓: 성을 하사하다)을 한 것이지 그 신분은 미천하기 그지 없었다.
“왜. 나는 미천해서 안 되나?”
만우가 진하게 웃었다. 그런 만우의 얼굴은 무슨 웃음을 담고 있는 것인지 당최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권희달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으며 얼굴을 분노로 붉게 물들였다.
“검주!!!! 감히 전하를 우롱하려 드는 것인가!”
“우롱? 어찌하여? 내가 이 아이의 오라버니란 것은 거짓이 아니거늘. 그리고.”
싸악!! 권희달의 양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고 그것은 슌스케도 마찬가지였다. 만우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고…… 또 저러시네. 대장.”
문형일이 그 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감령과 필두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멀리 떨어져 있었고, 마익후는 저벅거리며 만우의 곁으로 다가가 길게 팔을 뻗어 슌스케의 뒷덜미를 잡아서는 뒤로 던졌다.
“우악!”
만우가 이렇게 한 번씩 행패를 부릴 때마다 나서서 정리를 했던 것이 괴검과 괴권이다. 쌍괴라 불리는 그 둘은 만우에게 말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대장님.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그래도 명색이 조선의 임금님이신데…….”
“내가 뭘? 내가 뭐라 하였더냐? 사실을 말했거늘.”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왕이 권희달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좋다! 너도 내 동생해라!”
“……에?”
만우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만우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왕이 사성을 했다 하여 방매에게 손 댈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자신을 동생으로 받겠다니?
“저, 전하!!!”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 신분이 무에 문제가 된다고.”
임금은 당황한 만우의 얼굴을 보면서 씩 웃었다. 늘 자신을 당황하게 했던 만우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을 본다는 것이 유쾌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리 손해도 아닌 것 같고. 그 성이나 신분 따위가 무엇이라고.’
자신, 그리고 아버지인 상왕도 엄밀히 따지면 아주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동북면에 원의 관리들이 고려를 통치하기 위해 세웠던 쌍성총관부, 그곳의 출신이 임금의 할아버지였다. 그 이유로 고려의 무신이라 불렸으면서도 중앙정치로 들어오지 못하고 동북면에서 세력을 키워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왕이 되었다고 신분 따위를 생각을 하다니.
‘방원아, 방원아. 너도 왕이 되었다고 배에 기름이 낀 것이구나.’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왕의 말은 특히 그러했다. 거기에 만우가 이미 내뱉은 말도 있었다. 그러니 왕은, 생각을 한 번 바꾸는 것으로 이제 완전히 칼자루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동생.”
“으엑?”
임금이 친근하게 만우를 동생이라고 부르자 만우가 기겁했다.
“과인에게 동생이 둘이나 생긴 기쁜 날이니…….”
임금은 경악한 권희달의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권희달은 그런 왕의 표정에 정신을 차렸다. 임금의 눈에 서린 장난기를 본 것이다.
“궁으로 돌아가 잔치를 해도 부족하지 않으나, 과인이 몹시 바쁘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있는터라 그 회포는 나중에 푸는 게 어떠한가?”
만우는 벙찐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임금에게 말했다.
“그거 거짓말이지? 장난이지?”
“글쎄. 본래 군왕의 한 마디는 천금만큼이나 중요한 법이지. 검주, 그대의 말은 어떠한가?”
임금의 반문에 만우는 할 말이 궁해졌다. 완벽하게 한 방을 먹은 것이다. 만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문형일이 그런 임금을 보면서 입을 헤하고 벌렸다.
“와 대박. 역시 왕은 아무나 해먹는게 아닌가봐. 그렇지 필두?”
문형일과 필두는 은근히 취향 같은 것이 맞았다. 생긴 것만 보자면 감령과 더 어울릴 것 같았으나 감령은 오히려 호쾌하고 단순무식한 성격이라 마익후와 더 잘 맞았다. 필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내가 이래서 귀족을 싫어하는지도…….”
한 마디의 말로 검주를 동생으로 두게 된 조선의 왕을 보면서 문형일과 필두는 함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이 몰라! 말 한마디에 그런게 어디있어. 물러! 물러!”
만우는 배 째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임금은 제대로 그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고는 만우에게 말했다.
“과인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그대들에게 부탁을 하나하기 위함이다.”
“무슨 부탁?”
동군영이 있는데도 직접 이곳까지 임금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 했던 만우다. 그러자 임금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첫 째, 양녕이 그대들을 따라가기 위해 몰래 궁에서 탈출했다.”
“양녕이라면…….”
“그 꼬맹이? 세자라던?”
임금의 말에 사인방의 입이 쩌억하고 벌어졌다. 세자라는 꼬맹이가 맨날 출근 도장을 찍듯 무각에 찾아오긴 했었다. 하지만 와서 딱히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고, 사인방과 설운, 권희달이 대련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옆에서 목검이나 휘둘렀을 뿐이다. 나중에는 그게 귀여워져 검의 파지법(把指法) 등의 가르침을 내린 적은 있다. 세자에게 검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무각에 갇히게 된 원인을 제공한 세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오는 것에 정이 들어서였다.
“이찬. 그이가 따라갔으니 특별히 걱정은 하지 않으나…….”
문제는 세자가 무각의 사인방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칫하면 만우 일행과 조우하지 않고 안변으로 들어갔다가 조사의에게 잡히면 끝장이다.
“그래도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 그리하여 그대들에게 부탁하고자 함이다.”
“차라리 사람을 풀어. 사람 많잖아.”
만우는 귀찮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꼬맹이까지 챙겨줄 정도로 한가롭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없어. 놈들이 함주로 밀고 올라가기라도 하면 끝이야.”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좌익찬 설운을 이천우의 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할 생각이니.”
“흐음…….”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반란군이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후방을 훤히 보인 채 함주로 달려갈 리 없다. 그러면 시간은 벌 수 있다.
“이천우는 산발적인 국지전에 능하니, 적들의 예봉에 밀린다 하여도 전선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임금은 만우를 쳐다봤다.
“아바마마를 모시고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면.”
우득. 임금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우득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임금의 두 눈은 잔혹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역심을 품은 놈들은 그다음 날 뜰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만우는 손을 내저었다. 임금의 살기가 짙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눈에 보인다면 챙겨주도록 하지. 하지만 이찬이라. 왕, 그대도 사람을 푸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찬이라면 궁에서도 권희달 다음으로 손에 꼽히는 무인이다.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 했지만 그 역시도 초절정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안변부사 조사의가 끌어들인 세외의 세력이다.
“동군영에게, 그리고 은월루주에게 들었을 터.”
임금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만우도 말은 하였으나 이찬이라면 충분히 대적이 가능하다 생각했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저놈도 못 이기는 놈이 마교에서 왔다. 보아하니 어리 그 계집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던데…….”
“설마…….”
마교라는 소리에 임금은 침음성을 흘렸다. 임금은 은월루와 마교 사이의 은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마교에서는 은월루에서 약속한 보수를 받기 위해 보내온 무인의 수준이 대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마교가 있는 곳이 조선에서도 몇 천 리는 떨어진 곳이라는 것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내가 못 이기는 상대는…….”
권희달이 얼굴을 붉히면서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만우는 단칼에 권희달의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