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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거래를 하자(1) (35/400)

035. 거래를 하자(1)2019.04.30.

그 순간 만우의 눈이 커졌다. 왕에게서 만우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기세가 노도처럼 일어났다. 만우의 것이 투기라면, 왕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위엄이었다. 수백 만 조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자. 다스리는 자의 위엄이 만우의 투기를 밀어낸 것이다. 왕은 고통스러워하는 용호군을 보면서 말했다.

16553195186803.jpg“검주는 기운을 거두어라. 내 그대에게 예를 바라진 않을 것이니.”

16553195186803.jpg“전하! 어찌하여!”

왕의 말에 권희달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왕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왕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운검의 철칙이다. 권희달은 이를 깨물면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16553195186803.jpg“용호군은 물러가거라!”

16553195186816.jpg“…….”

왕이 말했지만 용호군들은 머뭇거렸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문제는 저 강력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만우였다. 용호군의 존재의 의의는 왕의 생명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든지 왕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적이 버티고 있으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6553195186803.jpg“물러가라!”

왕이 다시 한번 강하게 말하자 용호군들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끝까지 만우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약하다고는 하나 그 기개만큼은 칭찬해 줄 수 있었다.

16553195186826.png“나도 조선왕을 해치지 않겠다 약조하지.”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16553195186826.png“애초에 검도 뽑지 않았다만.”

16553195186803.jpg“크윽…….”

검도 뽑지 않은 상대에게 이토록 밀렸다는 것에 권희달은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가 문득 안쓰러워진 만우가 입을 열었다.

16553195186826.png“그대와 나의 화후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으나, 보아하니 조선제일검이란 그대의 경험은 웬만큼 굴러먹은 낭인보다도 적은 것 같더군.”

16553195186803.jpg“…….”

만우와 권희달은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권희달이 만우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자신보다 실력도 좋은데 나이까지 어린 만우의 조언을 듣는 것이 권희달의 자존심상 허락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러건 말건 만우는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16553195186826.png“압도적인 실력 차이로만 이겨왔지 비슷한 경지에 이른 자와는 겨뤄본 경험이 거의 없어. 그렇지 않은가?”

16553195186803.jpg“…….”

권희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우가 하는 말에 별로 협조를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강해지고 싶은 무인이었다. 만우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날아와 귀에 꽂혔다.

16553195186826.png“조선의 왕이 정말 조선제일검을 아낀다면, 차라리 중원행을 1년 정도 시키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군.”

16553195186803.jpg“중원행?”

어느새 만우와 왕에게서 흘러나오던 기세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왕은 만우의 말에 관심을 보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16553195186803.jpg“허허. 난리가 났군.”

강녕전은 지붕이 다 무너져 그 잔재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강녕전에서 이런 사단이 났다는 것은 이미 다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16553195186803.jpg“운검. 나가서 알리고 오시게. 짐은 이자와 대화를 나눌 터이니.”

16553195186803.jpg“저, 전하.”

권희달은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부복했다. 하지만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우는 그런 왕을 보면서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16553195186826.png‘대범한 것인가. 아니면 멍청한 것인가?’

왕도 눈이 달려 있으니 만우가 손가락만 까닥해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나마 만우가 과격하게 나왔을 때 몇 합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것이 권희달이었는데 자리를 비우게 하려 하고 했기 때문이다.

16553195186803.jpg“무인은 자신의 검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지. 저자가 검을 뽑지 않았다는 것을 짐은 믿도록 하겠다.”

16553195186803.jpg“허나 전하!”

16553195186803.jpg“운검도 무인이라면 저자의 밀을 믿으시게.”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만우를 쳐다봤다. 자신의 말이 틀리냐는 물음이었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16553195186826.png“역시. 왕이라 그런지 화술 하나는 일품이군.”

만우는 어쩔 수 없었다. 왕이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여기서 괜히 꼬장을 피워서 속 좁은 놈이 될 순 없었다. 그리고 왕이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 이상, 만우도 왕을 적대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왕을 적대해 봤자 무엇 하겠는가.

16553195186826.png‘할 일이 잔뜩인데.’

굳이 왕이나 국가와 싸우지 않아도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잡혀간 네 명을 빼내는 것이 제1 목적이었다. 창!!! 만우가 허리춤에 달린 검을 빼들었다. 설미수의 집에 굴러다니던 철검을 아무 것이나 주어 왔기 때문에 무게도 잘 맞지 않았고 손에 익지도 않았다. 하지만 권희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만우가 진검을 드는 순간, 죽어도 저자를 이기지 못 했을 것이라는 거대한 격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16553195186803.jpg‘화후가 비슷하다고? 빌어먹을…….’

그래, 화후가 비슷하긴 했다. 같은 화경이니 말이다. 하지만 화경 안에서도 초입과 극이 있는 법이다. 권희달은 자신이 화경의 초입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우는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자신이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6553195186826.png“검에 대고 맹세하지.”

쑤욱! 만우는 검을 휘둘러 땅에 꽂았다. 단단한 바닥이 마치 두부처럼 갈라지며 검신이 반도 넘게 땅바닥에 꽂혔다.

16553195186826.png“나는 저 검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고, 조선왕을 해칠 생각도 없다는 것을.”

16553195186803.jpg“…….”

만우가 저렇게 나온 이상 권희달은 왕이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권희달은 만우를 향해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더 부라린 후 강녕전에서 빠져나왔다.

16553195186803.jpg“엉망이군. 하지만 지금 이 야심한 시각에 자리를 옮길 곳도 없으니, 어떤가. 달빛 아래서 이야기하는 것이.”

만우가 강녕전에 있기는 했지만 강녕전을 부순 것은 만우가 아니었다. 전부 용호군이 한 것이기 때문에 만우는 죄책감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3195186826.png“좋아. 궁궐에서 먹는 술도 한 잔 있으면 좋겠는데.”

16553195186803.jpg“풍류를 즐길 줄 아는 군. 좋아. 게 누구 없느냐!”

이 사단이 났는데 주변에 누가 없을 리 없었다. 안에서 용이라도 싸운 것처럼 굉음이 났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내시들과 궁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왕은 안색이 하얗게 변한 채로 뛰어 들어온 내시에게 명령했다.

16553195186803.jpg“가서 튼튼한 탁자와 의자 두 개를 내오거라. 주안상도 차려서 가져오고.”

16553195186803.jpg“예, 전하.”

왕의 앞에 남루한 옷을 입은 만우가 앉아 있었지만 왕이 내린 명령이기 때문에 내시는 허리를 숙이고는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잠시 뒤, 튼튼한 탁자와 의자가 무너진 강녕전의 잔해를 대충 치운 곳에 놓였다. 그 위에는 은은한 주향을 풍기는 백자 하나와 따끈한 안주들이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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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르륵.

16553195186803.jpg“운검, 아니 조선제일검 이야기를 해보시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조선 내에서 권희달은 무예의 정점에 선 무인이었다. 그는 왕을 따라 피의 길을 걸어 조선을 개국하고 왕자들의 난을 진압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왕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은 살아남았고, 그것은 온전히 권희달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런 권희달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53195186826.png“부족하지. 자신의 공부(工夫)를 온전히 체화하지 못하고 있던데.”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겠다 죽겠다 하면서 난리를 피웠던 만우와 왕이지만 둘은 마치 막역지우라도 된 듯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르며 이야기를 했다.

16553195186803.jpg“그는 우리 조선제일검이다.”

16553195186826.png“난 천하제일검이고.”

만우는 웃었다. 자신의 입으로 천하제일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조금 쑥스럽긴 했지만 그것이 틀리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16553195186803.jpg“…….”

16553195186826.png“조선은 군(軍)이 강한 나라다. 용호군 같은 경우는 명의 내금위나 동창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더군.”

조선은 강군(强軍)으로 유명했다. 의아해할 수는 있지만 조선이 대륙진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 나라의 정치가 너무나도 섬세하고 예민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었다. 나라는 작고, 인구도 작지만 조선은 늘 전쟁을 하는 나라다. 해안가에서는 왜구들이 활개를 치고 북쪽에서는 오랑캐들이 회전을 걸어온다. 동시에 나라의 삼면이 바다고, 평야와 험준한 산맥을 끼고 있어 다양한 병과의 강군을 키워낼 수 있는 자연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조선이 개국되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그 사병들을 중앙군으로 끌어들여 군의 규모를 키웠기 때문에 경험까지 다양하게 갖춘 정예들이 가득한 나라가 당금의 조선이었다. 반면 명은 지켜야 될 땅이 너무 컸다. 그만큼 인구가 많긴 했지만 지켜야 할 땅이 너무 커 숙련병들을 키우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다. 설령 키우더라도 국경선에서 쉽사리 빼올 수가 없었다. 땅이 크기 때문에 한 번 군대를 움직이는데도 막대한 물자와 비용, 그리고 시간이 소모됐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가 보기에 조선은 군이 강한 나라였다.

16553195186826.png“하지만 무인의 수준은 별로였어.”

사병혁파와 군 위주로 발달한 무예 때문일 것이다. 군(軍)이란 곳은 개성보다는 조직이 더 중요시되는 집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넓은 시야에서 다수와 다수가 싸우는 경우를 상정하고 훈련을 한다. 반면 무림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수 대 다수보다는 개인의 강함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코앞의 한 사람을 격살할 수 있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고 그곳이 무공(武工)이란 형태가 된 것이다.

16553195186826.png“아니, 아닌가? 내가 본 초절정만 해도 꽤나 많으니까.”

계방 무인인 이찬과 설운 모두 초절정이었다. 그중 설운은 막 이제 초절정에 들어선 정도지만 이찬도 꽤 강한 축에 속했다. 그리고 권희달까지. 땅덩어리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무인들이 나온다는 것이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16553195186826.png“무인들, 아니 우리 무림인들은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강자를 찾아가 강해지기 위한 고행길에 오르지. 그리고 무공을 보유한 문파들은 자신의 무공을 더욱 개량하고 보완하며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에 끊임없이 매진한다.”

왕은 만우의 얼굴을 보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16553195186826.png“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이제 자신의 것을 정리하게 되고, 되돌아보게 되지. 하지만 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싸우고 투쟁하면서 경험을 쌓아 자연스럽게 군더더기들이 정리가 된다.”

16553195186803.jpg“운검에게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것인가?”

16553195186826.png“그가 당신을 지키기 위한 것과 수련을 하는 것 이외에, 타인과 강함을 겨루기 위해 검을 뽑아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왕은 만우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16553195186803.jpg“없군.”

매 시를 빠지지 않고 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 운검이다. 그런 운검이 한가롭게 자신의 경지를 더 높이기 위해 수련을 할 시간이 충분할 리 만무했다.

16553195186826.png“어찌 보면 재능이 대단하지. 그 정도의 수련만 가지고도 화경에 올랐으니까. 중원의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능이야.”

그렇게 따지면 권희달의 재능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리였다. 만약 그가 운검이 아니라 중원으로 넘어와 무공에만 매진했다면?

16553195186826.png‘동이(東夷)에서 무림십좌의 두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했겠지.’

16553195186803.jpg“흐음…… 경험이라…….”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운검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운검도 무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 대신 왕의 그림자를 택한 충직한 신하이기도 했다.

16553195186803.jpg“그리고 다음 질문.”

왕은 만우의 잔에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그 잔을 들었다.

16553195186803.jpg“왜 짐을 찾아온 거지?”

왕이 만우에게 물었다. 이게 진짜 목적이었다. 권희달에 대해 물은 것은 수하를 위한 군주의 따뜻한 정이라고 하면 이게 바로 진짜 알고 싶은 것이다.

16553195186826.png“잡아간 네 명. 풀어줘라.”

16553195186803.jpg“…….”

왕은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만우가 찾아올 것이라고 한 번쯤은 예상을 했었다. 단지, 만우의 실력이 설운이 이야기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 때문에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16553195186803.jpg“……왜지?”

16553195186826.png“본주를 믿고 중원에서 이곳까지 온 자들이다. 본주가 이 조선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나를 따라온 이들이다.”

만우는 강력하고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16553195186803.jpg“저들은 세자에게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하여 검을 쥐게 만들었다.”

16553195186826.png“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만우는 왕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16553195186826.png“오늘 그대가 본 본주의 무위(武威), 괴력난신 따위 같아 보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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