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반역?(4)2019.04.27.
“전하. 괜찮으십니까.”
권희달이 아무 말이 없는 왕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왕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났을 뿐이다.”
왕에게 최근 들어 가장 큰 근심이 바로 부친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권희달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이찬이 부복한 채 왕에게 말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앙! 하지만 바로 그때, 권희달이 한 손에 검을 들었다. 갑작스런 출검 소리에 놀란 이찬이 고개를 든 순간, 권희달이 강녕전의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쩡!!!!
“큭!”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정확히는 순간적으로 고막이 찌르르 울릴 정도의 강렬한 충돌음이었다. 그 순간 강녕전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용호군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안의 변고를 눈치챈 것이다.
“전하를 보호하라!”
권희달이 움직인 다음에야 변고를 알아챈 이찬이 검을 뽑아든 채 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왕의 앞을 용호군이 우르르 달려와 막았고 나머지 용호군들이 권희달이 치솟은 곳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형성했다. 쿵!!
“흡.”
장정 세 명의 키 높이 정도로 지어진 강녕전의 어두운 천장에서 권희달이 뚝하고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올라갈 때와는 달리 땅에 착지하는 권희달의 발에서 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수.’
권희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었을 정도의 은신술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충분히 기습을 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손에서 느껴진 반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조선제일검?”
낭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어두운 천장의 서까래로 향했다. 강녕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서까래에는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채 만우가 앉아 있었다. 권희달은 그런 만우를 보고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반탄력 때문에 솟아올랐던 힘을 잃고 튕겨져 나온 자신이었다. 그런데 만우는 서까래에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 말인즉슨 권희달의 공격을 받고도 만우가 꿈적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검이 없다.’
“아흐. 손가락 따가워라. 그렇게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면 되나.”
권희달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검을 막아낸 것이 만우의 손가락이란 것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반탄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당연히 검으로 맞받아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우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베였잖아!”
만우가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허공에 털어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만우가 고개를 들어 강녕전의 천장을 쳐다봤다. 파앙!!! 와자자작! 강녕전의 천장을 둟고 철시(鐵矢)가 비처럼 쏟아졌다. 강녕전 지붕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숭숭 뚫렸다. 동시에 권희달을 비롯한 용호군이 천장을 향해 짓쳐들었다.
“합격진이라 이건가?”
권희달 정도의 고수를 품을 수 있을 정도의 합격진이라니. 만우의 눈이 빛났다. 원래 합격진이란 실력이 비슷한 이들이 더 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권희달의 실력은 용호군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합격진은 균형이 가장 중요했는데 권희달처럼 압도적으로 강한 이가 합격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합격진의 대전제를 비웃듯, 권희달이 용호군들과 함께 만우를 향해 짓쳐들었다.
“이건 앉아서 못 막겠는데?”
위기였지만 만우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애초에 내지 않아도 되었던 기척을 낸 것 자체가 만우의 노림수였다. 검주(劍主) 만우. 중원무림에서는 어딜 가도 언제든지 먹히는 이름이었지만 무림이 없는 조선에서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실력 발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정안군.’
이제는 조선의 삼대 국왕이 되었지만 대군 중 한 명일 때 그는 정안군이었다.
‘정안군 이방원.’
상왕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이자 어린 동생을 베고 난을 일으킨 형인 이방간을 베고 왕위에 오른 철혈의 왕. 동시에 만우의 어릴 적 주인어른이자 은인이었던 광산군 김약항을 죽인 주범 중 한 명. 삼봉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명을 달리했으나 아직 이방원과 은월루는 살아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 파고들기 전에 일단 어르신의 아들딸부터 찾아야지.’
하오문에 부탁은 해뒀지만 이제 하오문도 막 세력을 구축해두고 있는 때라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월루를 찾는 것이기도 했다.
‘암살과 정보는 떼려야 땔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만우의 몸이 서까래를 무릎 사이에 낀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만우의 앞머리를 스치며 철시가 반대편 지붕에 구멍을 뻥뻥 만들어댔다.
“왕의 침소인데 저렇게 지붕이 약해서야.”
약하기보다는 철시이기 때문에 기왓장까지 뚫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철시란 것 자체를 날린다는 뜻은 경지에 다다른 궁술을 쓴다는 증거였다. 그게 아니고서는 철시를 날려 보낼 정도의 활시위를 당기지도 못 했기 때문이다.
‘궁술은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무림에서 궁을 쓰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은 근접무기들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암기는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쏘아 보낼 수 있지만 화살은 한 번에 한 발만이 가능했고, 날아가는 화살에 공력을 담기 위해서는 최소한 화경의 무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놈!”
만우가 딴청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권희달에게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 권희달의 뒤로 검을 치켜든 용호군들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서컹!!
“흣차!”
권희달의 검이 서까래를 통째로 베어내었다. 강녕전 정도의 거대한 전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까래도 성인 남자보다 더 두꺼운 나무를 쓴다. 그것을 무 베어버리듯 권희달의 검이 베어냈지만 만우는 장난을 치듯 몸의 반동으로 다시 서까래 위에 걸터앉았다.
“쯧. 아까운 나문데.”
서까래가 잘리자 강녕전의 지붕 전체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서까래 위에서 만우는 나들이를 나온 듯 잘린 서까래를 보면서 혀를 찼다. 타다다당!!! 동시에 한 발 늦게 달려들던 용호군의 검이 한꺼번에 튕겨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떨어지는 용호군의 검은 모두 반토막이 나있었다. 공수입백인으로 용호군의 검을 만우가 일시에 모조리 부러뜨려버린 것이다.
“흐으.”
만우는 그렇게 부러진 검조각들을 이리저리 날려 보냈다. 그 순간 만우가 앉아 있던 서까래 위로 지붕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전각이 무너진다!”
“전하를 밖으로 뫼…….”
지붕이 무너지는 것을 본 이찬이 소리를 지르다 말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용호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왕도 두 눈을 부릅뜨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사를 쳐다봤다. 고오오오!!! 원래라면 우르르 무너져야 할 강녕전의 지붕이 마치 그곳만 시간을 느리게 돌린 듯 느릿느릿 무너지고 있었다. 그건 정말 그곳의 시간만 느리게 흘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우의 평범한 무명천으로 만든 옷이 나풀거리기 시작하더니 만우의 머리가 거꾸로 서면서 어마어마한 공력이 무너지는 지붕을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륵. 그 상태로 만우는 허공을 밟고 내려왔다. 그러니 만우가 내려가는만큼 받쳐지고 있던 지붕이 순차적으로 무너지면서 천천히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슥. 그렇게 계단을 내려오듯 허공을 밟고 내려온 만우가 용호군의 벽 너머 서있는 왕의 건너편에 내려왔다. 만우의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검이 반토막 나는 순간 내부가 진탕되어 움직일 수 없었던 용호군들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무너지는 지붕의 잔해 속에서 빠져나왔다. 고오오! 머리카락까지 거꾸로 솟은 채 심후한 공력에 의해 나풀거리는 만우는 용호군이나 왕의 눈에는 전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때 권희달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마주 공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만우에게 밀렸다고는 하나 권희달도 어엿이 화경이라는 고절한 경지에 든 무인이다. 그렇게 운검이 되기 위해 왕실의 지원을 받은 권희달의 공력이 만우에게 밀릴 리 없었다. 그렇게 두 화경의 공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치자 무너지는 지붕의 잔해가 마치 소멸되는 것처럼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만우는 권희달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쓸 만한 실력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권희달이 이를 빠득 갈았다. 설마 했는데 궁궐에 단신으로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다. 게다가 자신과 합격진을 이룬 용호군을 상대로도 이렇게 압도적일 줄이야.
“조선제일검이라 칭할 만하다. 너는 본주가 조선에서 본 검객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만우가 권희달의 실력을 인정했지만 권희달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고수가 하수에게 칭찬하듯 하는 어조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조선의 지배자를 눈앞에 두고도 오만한 만우의 태도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본주보다 약해서?”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우는 검을 한 자루도 쥐고 있지 않았지만 검이 없는 상태로도 권희달을 압도했다. 권희달은 루주라는 여인이 밝힌 것처럼 만우가 정말로 신검합일에 들었다는 사실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다면 화를 낼 필요 없다. 이 세상에서 검을 쓰는 자들 중 본주보다 강한 이는 없으니까.”
만우는 오만하게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만우의 태도나 웃음은 오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만우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자격이 넘쳤다. 천하제일(天下第一). 작은 조선이 아니라 저 넓은 명에서 천하제일을 논했다는 남자의 실력이 모두에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니 부디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말라.”
만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비면 곤란한 것은 만우였다. 아무리 만우가 지고한 경지에 들었다고는 하나 권희달도 마냥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든지 만우가 방심한 틈을 파고들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이 같은 화경의 무인이었다. 중원에서도 무림십좌만이 든 고절한 경지가 바로 화경이다. 단지 만우가 보기에 권희달은 실전경험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부족했다. 그렇다는 말은 하나였다.
‘비슷한 경지의 무인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자.’
고절한 경지에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무리 고절한 경지에 들었다고 해도 경험이 없다면 일류무인의 검에도 당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정한 무림의 세계다. 그리고 만우는 그런 중원의 수십 만의 무인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실전을 경험해 본 초극지경의 무인이다. 마교의 교주인 일패 혈세천마가 만우와의 일전에서 발을 뺐던 것도 바로 그것에 있었다. 경험. 그 정도 고절한 경지에 든 무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볼 만한 경험이 많이 있을 리 없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를 정도면 어릴 때도 충분히 천재라 불릴 만한 재능을 지녔을 것이고, 속한 세력에 의해 과보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천하제일을 입에 담았다. 적어도 만우가 검을 맞부딪친 자들 중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었다. 같은 화경의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온실 속의 화초였기 때문에 거친 야생에서 끈질기게 자라온 잡초인 만우를 이길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왕이 용호군을 물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것을 보고 놀란 권희달이 기세를 가라앉혔다. 제왕의 기도를 가지고 있으나 경지에 들어서지 못한 왕이 둘의 공력 싸움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오오오…… 권희달이 공력을 거두자 만우도 공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거꾸로 치솟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만우는 어깨를 쭉 편 채 걸어 나오는 왕의 눈을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황제? 아니 그보다 나을 수도.’
만우는 명의 황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만우가 중원을 유람하던 도중 만난 무인 몇을 꺾으면서 만우가 전승기행(全勝奇行)을 펼치고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 때였다. 무인과 그들의 기상을 좋아하던 명 황제는 만우를 불러 동창과 내금위 소속 고수들과의 비무를 즐겼는데, 그때 본 명 황제의 기도는 가히 일품이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의 권위가 가장 강성할 때이기도 하고, 그 자체도 대단히 정력적인 나이였기 때문에 황제에게서는 제왕의 기도와 함께 젊음의 혈기가 뚝뚝 흘렀다. 하지만 조선의 왕, 이방원은 그보다 더했다.
‘철혈.’
왜 그를 철혈이라 부르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철처럼 차가운 피를 가졌다. 하지만 철이 한 번 뜨거워지면 쉽사리 식지 않는다. 그처럼 냉철함을 유지하면서도 눈 속에 광폭한 혈기를 품은 이방원의 눈에 만우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엄하다!!!”
만우는 왕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태연한 표정을 짓는데 권희달과 용호군이 발끈해서 살기를 뿜었다. 만우는 살기를 뿜는 권희달과 용호군을 보면서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정녕 피를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인가?”
동시에 만우가 투기를 내뿜었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살기는 아니지만 투기도 그에 못지않은 험악한 기운이다. 싸워서 승리를 쟁취(爭取)한다! 천하를 홀로 독보하며 모든 승리를 쟁취한 만우의 투기는 그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상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검을 다뤄본 이들이라면 그 투기에 숨이 턱하고 막힐 수밖에 없었다. 투기는 공력과 다르다. 공력은 단전에 쌓은 기운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지만 투기는 공력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일종의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우 정도의 경험을 하고 수많은 사선을 거쳐 오지 않았음에야 만우만 한 투기를 발산할 수 없었다.
“크으으…….”
덜덜덜. 권희달은 조금 힘겨워 보였지만 그래도 버텨냈다. 하지만 다른 용호군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무 조선 왕실을 호위하는 최정예라고는 하나 만우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인물이 꼿꼿하게 서서 그런 만우의 기세를 받아냈다.
“갈(喝)!”
왕은 만우의 기세를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면서 노성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