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검주, 머슴이 되다!(5)2019.02.16.
와장창창!! 바구니가 뒤집어지고 판매대에 올려놨던 물건들이 흙바닥이 뒹굴었다. 예쁘게 지어놓은 무명옷은 흙투성이가 되고 맨 몸으로 파락호들을 막던 상인들이 바닥이 뒹굴었다.
“개판이네.”
양곡과 배가 땅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만우는 혀를 찼다. 파락호들 다섯 명이 행랑 두 개에 집중적으로 깽판을 피우고 있었다.
“보호비를 내야지. 안 내면 쓰나.”
“이놈들아. 바로 어제 경시감(京市監: 물가 조절, 상세 징수 등을 주관하는 감독 기관)에서 세금을 걷어갔는데 바로 네놈들에게 줄 돈이 어디 있어.”
“돈도 없는 놈이 무슨 행랑을.”
우당탕탕. 장년인 하나가 힘없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옆에서 쯧쯧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 또 누구한테 돈 받고 저 짓거리 하는 모양이네.”
“그러니까 저 난리겠지. 쯧. 또 누가 돈을 줬길래…….”
만우는 혀를 차는 두 남자의 대화를 단박에 이해했다. 누군가 웃돈을 주고 저곳에서 장사를 하겠다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강제로 나가게끔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아주 나는 새도 떨어뜨리겠어. 썩을 놈의 대물파 놈들.”
“대물(大物)은 무슨! 저놈들 대장 물건이 새끼손가락보다 작다는 게 동네방네 소문이 다 퍼졌는데.”
“쉿! 그거 들으면 저놈들 거품 물어. 킥킥.”
킬킬대면서 하는 말에 만우가 피식 웃었다. 대물파란 거창한 이름을 지은 이유가 두목인 대물이란 놈의 약점 때문인 듯했다.
“만 대협.”
“뭐야. 왜 이렇게 늦어. 튀려고 했던 거야?”
그때 감령이 인파 속에서 유령처럼 다가왔다. 산을 집 삼아 사는 산적이기 때문에 신법이 제법 절륜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만우가 사납게 웃자 감령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대련이라면 모를까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것은 아무리 감령이라고 해도 사절이었다.
“그럼 뭔데. 딱 봐도 견적 나오는구만.”
하지만 감령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이상한 걸 봐서 잠시 근처에 다녀왔습니다.”
“이상한 거? 뭔데?”
감령이 손가락으로 난장판을 피우고 있는 파락호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저기 저놈. 보이십니까?”
“응? 저놈? 호오…….”
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감령이 가리키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손등에 그려진 문양. 은병과 낫이 교차된 문양이었다.
“하오문?”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 문양이 파락호의 손등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명나라도 아닌 이곳 조선에서.
“조선에 하오문이 들어왔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만우의 입가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마침 만우는 하오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았다. 무화 임수미의 깜찍한 짓 때문에 감령과 필두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정보를 무림에 퍼뜨린 죄가 상쇄되지 않는다.
“야. 내가 하나 알려줄까?”
“네?”
하지만 만우는 직접 나설 생각이 없었다. 조선에서 무림의 흔적을 찾은 것은 의외지만 그는 은퇴를 번복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너랑 필두가 왜 나한테 붙잡혔게?”
“그, 그건 만 대협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저희가…….”
순간 감령의 고개가 바람소리가 일 정도로 돌아갔다. 감령과 필두는 바보가 아니다. 비록 그들이 산적과 수적이라고 하지만 초절정 고수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아야만 될 수 있는 것이 무림인이다. 모든 혈도나 내공심법의 구절들은 서책으로 전해져 내려오니까. 물론 그중 드물게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무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렇다는 말은 감령과 필두가 글을 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혈도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소주천이 가능한 초절정에 오른 것이다. 그런 감령이 만우가 하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크흐흐.”
그것을 알게 된 감령의 두 눈에서 살기가 쭉하고 뻗어져 나왔다.
“오호. 머리가 돌아가네?”
만우는 일부러 이죽거리며 웃었다. 자신이 최대한 얄밉게 보여야 감령의 하오문에 대한 분노가 극대화될 터기 때문이다. 만우가 시켜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감령이 분에 못 이겨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능률이 좋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떨어대면서 웃는 감령에서 진한 분노의 냄새가 느껴졌다.
“하오문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하오문 때문에.”
만우에 의해 백 일 동안 억눌러져 있었던 감령의 본질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만우는 씩 웃으면서 감령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내공도 못 쓰는 놈이니까 적당히 만져주고. 저놈 조져서 하오문의…… 그러니까 한양지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 할 수 있지?”
“맡겨만 주십시오.”
파락호에게서는 내공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내공을 익히지 못한 그냥 일반인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미 하오문이라는 것 이유만으로도 파락호는 감령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감령이 움직이려는 순간 시전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어디선가 요란하게 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짚으로 만들어진 시전의 지붕 위에서 누군가가 휙하고 뛰어내린 것이다.
“호오.”
만우가 빙글거렸다. 십오 년 만에 온 조선이지만 도착한 첫 날부터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졌으니까. 뻐억!! 파락호의 얼굴 정중앙에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졌다.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여자의 발에 얼굴 한 가운데가 그대로 찍혔기 때문이다.
“야! 고추 달린 계집놈들아! 사람들 괴롭히니까 좋냐!”
여자의 몸은 날다람쥐처럼 잽쌌다. 게다가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걸쭉한 입담이 적절하게 파락호들의 정신을 흩뜨려 놓았다.
“방매다!”
“방매잖아?”
방매라는 이름의 여인은 이 저잣거리에서 유명한 모양이었다. 만우는 방매가 등 뒤에 매고 있는 보따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방매라는 여인은 뭐하는 여인입니까.”
방매라 불린 여인은 다리를 기가 막히게 잘 썼다. 준족(俊足)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속도에 품(品)자 형태로 밟는 보법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 때문에 파락호들이 작은 여인네의 각법(脚法)에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만우는 그 각법을 보고 감탄하며 옆에서 같이 구경하고 있던 수염이 덥수룩한 장사치에게 물었다.
“방매? 매분구야 매분구. 양반네들 집 돌아다니면서 동경을 팔거나 저기 명에서 들여온 분이나 연지 같은 것들을 판다고 하던데.”
행상인이란 소리였다. 만우는 방매라는 여인이 사용하는 특이한 보법과 각법을 보면서 눈에 이채를 띄었다.
‘기천과 비슷해.’
기천과 저 여인이 사용하는 보법이 비슷했다. 그 때문에 관심이 생긴 만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저 방매라는 아이가 한양제일매분구인데 저렇게 왈가닥인데다 성격이 지랄 맞…… 어?”
말하기 좋아하는 남자가 만우에게 방매에게 설명을 하려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만우가 귀신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사람들이 와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 방금 내 옆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익!!!”
작은 단검을 꺼내든 파락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온 힘을 다해 용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락호의 손을 움켜쥔 만우의 손은 마치 족쇄처럼 풀릴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더 빨리 움직였어야지.”
“에?”
사라진 만우가 나타난 곳은 방매의 바로 뒤였다. 방매의 뒤로 단검을 든 채 접근하던 파락호의 손이 만우에게 붙잡혀 있었다.
“거기서 느리게 움직이니까 틈이 드러나잖아.”
만우는 파락호 사이에 선 채 방매에게 그녀의 보법에 대해 말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방매는 파락호의 손에 들린 단검에 분기탱천해 하며 달려들었다.
“칼을 뽑았다 이거지?”
방매가 품자로 보법을 밟았다. 만우는 그 모습이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뻐억!
“끄악!!!”
만우에게 붙잡힌 파락호가 중심을 움켜쥐고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만우는 그런 파락호를 보면서 혀를 차면서 손을 풀었다. 그러자 눈을 까뒤집은 채 거품을 문 파락호가 땅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었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남정네들이 자신의 중심을 잡으면서 몸을 움찔했다.
“무시무시하군.”
“역시 방매야.”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만우는 방매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유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만우에게 파락호 하나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네, 네놈은 뭐냐! 뭐길래 끼어들어!”
파락호들이 감히 덤벼들지 못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만우가 허깨비처럼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났지만 파락호들 중 이게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만우가 저벅저벅 걸어가 칼을 든 파락호를 제압하는 것을 모든 파락호들이 본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이 있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만우에게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흠…… 일단.”
만우가 방매를 쳐다봤다. 방매는 자신을 도와준 것이 만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방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궁금한 게 있으니까 조용한데 가서 물어봐도 되지?”
덥썩. 만우가 방매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만우가 방매를 끌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멍한 표정을 지었던 파락호들이 노성을 토해내면서 만우의 뒤를 쫓았다. 아니, 쫓으려고 했다. 퍼억!!!
“크흐흐흐.”
미친놈처럼 광소를 흘리는 감령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멈칫. 만우에 이어 또 다른 놈이 등장하자 파락호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감령의 생김새가 기생오라비처럼 호리호리하고 멀끔해보이자 파락호들의 기세가 올라왔다.
“넌 뭐야! 죽고 싶어?”
“감히 우리 대물파의 행사를 막다니!!”
사람들이 모두 보는 시전 저잣거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대물파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두목인 대물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으려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파락호들이 최대한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흐흐흐.”
하지만 감령이 기껏해야 삼류 파락호들에게 겁먹을 리 없었다. 아니 그는 애초에 파락호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십만 녹림을 이끌던 총채주다. 만우에게 눌려 그 사실을 잠시 잊었지만 자신을 이 수렁으로 밀어 넣은 하오문의 표식을 본 감령의 본성이 눈을 떴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감령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네 명의 파락호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네 명 모두 얼굴이 뭉개진 상태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당분간은 미음조차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듯했다.
“어…….”
손등에 은병과 낫의 문양을 새긴 파락호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순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모습을 드러낸 감령은 파락호들의 피가 묻은 주먹을 옷에 스윽 문질러 닦았다.
“크흐흐흐.”
감령은 나지막이 광소를 터뜨렸다. 애초에 그는 말보다 주먹이 더 편한 남자다. 비록 그의 독문병기인 풍월부는 없지만 주먹 하나만으로도 이런 파락호들은 백 명이라도 상대할 수 있었다.
“야. 너.”
조선은 무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중원의 무림인들도 굳이 바다를 건너 조선까지 올 이유가 없다. 그 때문에 파락호는 자신이 무림인을 만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조선 건국 이후, 양반들이 사병을 키우는 것이 금지되면서 무인들조차도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림인, 그것도 산적들의 제왕이었던 옥면산군 감령의 무위는 파락호의 혼을 빼기에 충분했다.
“하오문이지?”
감령이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파락호가 더럭 겁이 났는지 몸을 돌려 도망가가 시작했다. 하지만 감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리 제깟 놈이 발버둥을 쳐봤자 그의 손아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편이 좋았다. 그간 만우에게 당하며 쌓아왔던 울분을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흐흐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파밧!!! 땅을 박찬 감령의 신형이 사라진 파락호의 뒤를 따라 꺼지듯이 사라졌다. 웅성웅성. 그러자 남은 것은 갑자기 정리되어 버린 상황에 영문을 몰라 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