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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2화 (102/130)

102화

“하지만 제 생각은 『신의 대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왕자비님의 생각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더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요.”

어쨌든 발레린은 대신관과 의견이 맞아서 나름대로 괜찮았다. 덕분에 대신관의 집무실을 한 번 더 구경할 수 있었다.

마침 도착한 대신관의 집무실은 무척이나 깔끔하고 경외감이 절로 깃드는 곳이었다. 그러다 발레린은 어느 벽면에서 특이한 표식을 발견했다. 예전에 발레린의 가문이 적혀 있던 곳이었는데 유난히 눈에 띄게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발레린이 관심 있게 보자 대신관이 설명해 주었다.

“이전에 왕자비님께서 오셨을 때 제가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서, 이번에는 제대로 눈에 띄게 할 요량으로 주변에 울타리를 쳐 봤습니다. 그리고 울타리를 칠 만큼 중요한 신전의 재산이기도 하고요.”

발레린이 호기심 있게 자세히 보자 대신관이 이어서 말했다.

“사르티아 가문에서 이곳을 지켜 준 덕분에 수많은 경전과 진귀한 성물을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얀 옷을 입은 하인이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신관은 발레린에게 차분히 안내했다.

“이곳까지 오는데 힘드셨을 텐데 차 한잔 하시지요.”

발레린은 대신관의 안내에 꽤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금으로 세공을 한 것인지 유난히 눈이 부셨다.

발레린은 의자 팔걸이의 세공을 만져 보고는 감탄하듯 내뱉었다.

“이건 엘겐트 기법으로 세공을 한 건가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금 세공법』이라는 책에서 봤어요. 마력을 이용하지 않고 유연하게 깎는 기술이죠?”

“맞습니다. 특히 신전에서는 방어 마법으로 인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마력을 이용하지 않는 세공법을 선호하죠.”

발레린은 새삼 읽을 게 너무 없을 때 읽은 책을 기억해 낸 것이 뿌듯했다.

“그나저나 왕자비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제가 본 대로 왕자비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있잖아요. 왕자님도 저 못지않게 훌륭하신 분이에요.”

발레린이 강조하듯 말하자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쨌든 왕자비님을 제대로 보신 건 맞으니까요.”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찻잔을 들었다. 차 맛은 떨떠름한 맛 없이 깔끔하고 은근한 달콤함이 감돌았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보자 대신관이 얌전히 대답했다.

“신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키우는 찻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혹시 멜린드 잎인가요?”

발레린은 혹시나 물었지만 대신관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깜짝 놀란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어깨 위에 얌전히 지켜보던 그로프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멜린드 잎이 뭡니까?”

“신에게 허락된 자만 먹을 수 있다는 찻잎이야. 통상적으로 대신관이 된 자에게만 허용되는 차이기도 해.”

“그럼 왕자비님께서 먹은 게 대신관만 먹을 수 있는 차라는 말씀입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종종 나라를 지킨 영웅이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에게 주어지기도 하는데…….”

발레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대신관을 쳐다봤다.

“제가 이 차를 먹어도 되는 건가요?”

“물론 됩니다. 제겐 신적 동반자와 같은 분이니까요.”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신관을 바라봤다.

“신적 동반자요?”

“예, 여태껏 살면서 왕자비님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은 없으셨습니다. 그만큼 왕자비님께선 많이 깨달으시고 신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으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으셨겠지요.”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발레린은 일곱 살 이후 내내 탑에만 있었기에 신앙심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깨닫는 것은 둘째 치고 신을 위해 기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책을 여러 번 읽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굳이 착각하는 대신관에게 발레린은 더 토를 달지 않고 후루룩 차를 마셨다. 차 맛은 정말이지 여태껏 먹어 본 차 중에서는 일품이었다.

발레린이 행복한 얼굴로 차를 마시자 대신관이 문득 말했다.

“나중에 왕궁에 가실 때 챙겨 드리겠습니다.”

“멜린드 차를 챙겨 주신다고요?”

대신관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을 관리하는 것은 저의 소관이니 언제든지 챙겨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말씀만 해 주신다면…….”

“아니에요! 이렇게 챙겨 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대신관은 발레린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이전에 제가 대신관으로 한번 오시라고 청했을 때 오시지 않아서 서운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요.”

실제로 발레린은 대신관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배도스 공작은 물론 제르딘 생각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관은 나름대로 납득한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합니다. 왕궁은 신전 못지않게 시끄러운 곳이니까요.”

“신전 못지않게 시끄럽다고요?”

“사실 신전도 그렇게 조용한 곳은 되지 못합니다. 신관들도 사람인지라.”

발레린은 문득 『신전과 어두운 세계』라는 책이 생각났다. 신관의 범죄 사실을 밝히는 책이었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발레린은 문득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계세요?”

“여전히 저는 『신의 대화』를 읽고 있습니다. 그 책은 읽을 때마다 경이로우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 두꺼운 책인데도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는 책이었다. 그렇게 발레린은 대신관과 함께 책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신관은 의외로 발레린과 취향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특히 책을 보는 기준에서 대신관은 발레린과 뇌가 거의 일치하는 수준이었다.

발레린은 새로운 사실에 기쁘면서도 감탄스러웠다.

“대신관님이 저와 책 취향이 같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천년 왕국사』를 16번이나 완독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 책을 10번밖에 완독하지 못했는데.”

“두꺼운 책이긴 하지만 역사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어서 무척이나 깊이가 있어요. 그래서 더 재미있어서 여러 번 봤고요.”

대신관도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하인들은 대다수 놀란 얼굴로 대신관을 보았다. 대놓고 보지는 않았지만 대신관의 태도가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창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신관이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왕자께서는 왜 결혼 서약서 내는 것을 미루는 겁니까?”

“미룬다고요?”

“혹시 모르셨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르딘이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호텔에서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발레린은 호텔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약식인 서약서를 조금 더 보강하기 위해서 신경 쓰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쨌든 왕자께서 얼른 서약서를 제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자비님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절 위해서요?”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선에서 최대한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있지만 왕궁에서는 요상한 소문이 떠돈다고 하던데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대신관은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자께서 다른 왕국의 공주를 들이기 위해 왕자비님과의 결혼 서약서를 내지 않은 채 뜸들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물론 흔하게 떠도는 자극적인 소문 중 하나겠지만 요즘 신관들이나 귀족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걸 실제로 믿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그 소문을 실제로 믿는다고요?”

“안타깝지만 왕궁에 있는 귀족 중 절반이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사실에 발레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발레린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대신관이 급히 말했다.

“왕자비님, 저는 최대한 왕자비님을 위해서 아무 말도 섞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왕자께 하루빨리 서약서를 받아서 왕자와 왕자비님의 결혼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승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괴상한 소문도 더 돌지 않겠죠.”

발레린이 말없이 바라보자 대신관이 설명하듯 말했다.

“물론 왕자께서 약식보다는 절차에 맞게 서약서를 제출하기 위해 늦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원래 다 갖춘 서약서는 이렇게 늦게 내나요?”

“사실 왕궁에서 진행하는 결혼일 경우에는 1년 전부터 서류를 준비하는 게 절차입니다. 물론 왕자는 왕자비님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만약 약식으로 서약서를 신전에 제출하면 어떻게 되나요?”

“저야 약식이라도 승인할 수 있지만 계속 말이 나올 겁니다. 나중에는 왕자와 왕자비님 결혼 관계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말이 나올 거고요. 그리고 왕궁에서 버려지는 자식이나 망나니가 아닌 이상 절차에 따라 서약서를 제출하는 게 맞습니다.”

순간 발레린은 『천년 왕국사』를 떠올렸다. 왕의 사생아였던 어떤 왕자는 정식으로 서약서를 제출하고 싶어 했지만, 왕비가 약식으로 제출하도록 해서 끝내 약식으로 서약서를 신전에 제출했다고 했다.

“왕이 될 분은 절차에 맞게 서류를 준비하는 게 미래를 생각했을 때 좋은 방법이네요.”

“그렇습니다. 금방 헤어질 사람이 아닌 이상 정식으로 서약서를 잘 갖추어서 제출하는 게 정통성도 있고 바른 방법이죠.”

발레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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