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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1화 (101/130)

101화

“결혼 전에도 거의 다 만났잖아.”

“그래도 여러 사람을 만나면 지치지 않을까요?”

“아니, 지금은 오히려 결혼 전보다 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발레린이 강경하게 웃으며 말하자 루네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이 막 세드릭스 부인의 방문 신청을 보고 있던 때였다. 루네스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왕자비님, 대신관님은 어떻게 할까요? 이분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왜?”

“대신관님은 성격이 무척이나 예민하시고 다른 분들을 무시하면서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꽤 대하기 어렵거든요. 저는 처음에 대신관님이 편지를 보내신 것을 보고 무척 놀랐어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신데.”

발레린은 제르딘과 결혼하기 전에 만난 대신관을 떠올렸다.

“나도 처음에는 대신관님의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았는데, 막상 주제에 잘 맞는 대화를 하면 말이 통하는 분이었어.”

“말이 통한다고요?”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으로 말했었는데 나와 생각이 잘 맞기도 했고.”

루네스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신관님께도 찾아간다고 전해 줘. 그러고 보니 대신관님이 신전에 들러 달라고 하시긴 했는데.”

루네스는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왕자비님이세요. 다른 분이었으면 대신관님이 이렇게까지 편지를 주시지도 않았을 거예요.”

발레린이 호기심 있게 쳐다보자 루네스가 작게 속삭였다.

“웬만한 귀족들도 대신관님을 어려워하거든요. 거기다 대신관님도 그런 귀족들을 만나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요.”

루네스는 말을 마치고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실은 대신관님은 왕자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발레린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신관들이 왕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발레린은 그 말에 동의했다. 『천년 왕국사』나 다른 역사책에서도 신전과 왕족은 그다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루네스가 황급히 문을 열자 의사 여러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발레린에게 인사를 한 뒤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발레린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의사를 그저 흥미롭게 관찰했다.

마침내 그들 중 한 의사가 말했다.

“이제 이곳을 나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에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네스에게 눈짓했다. 루네스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혹시 불편하시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 곧바로 저희를 부르셔야 합니다.”

“알았어.”

발레린이 명랑하게 대답하자 그들은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마침내 발레린은 병실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그동안 너무 답답했던 탓이었다.

심지어 얼른 방문 신청을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루네스에게 물었다.

“루네스,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사람 있어?”

루네스는 급히 편지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신관님이신데요.”

“좋아! 곧바로 만난다고 전해 줘.”

“오늘 만나시려고요? 대신관님의 편지에도 당장 오늘 시간을 낼 수 있다고 적혀 있기는 한데…….”

“그럼 굳이 꾸물거릴 이유가 있어? 안 그래도 말도 하고 싶고 바깥 구경도 하고 싶기도 해서.”

루네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으로 돌아가셔요. 저희가 드레스와 함께 단장해 드릴게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프는 곧 발레린의 손에 올라와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발레린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아침을 먹을 시간이었다.

발레린은 병실을 나서며 루네스에게 물었다.

“루네스, 왕자님은 혹시 별말씀 없으셔?”

“무슨 말씀이요?”

“아침을 같이 먹자든가 말이야.”

“별말씀은 없으셨어요. 아침에 어떤 일이 터진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일?”

발레린이 곧장 관심을 가지자 루네스가 빠르게 말했다.

“보좌관님께서 무척이나 빨리 왕자님의 집무실 쪽으로 뛰어가더라고요.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왕자님께서 무척 화가 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가셨다고 듣기도 했고요.”

발레린은 걱정이 되었다.

“심각한 일일까?”

“그건 모르겠어요. 가끔 이런 일이 있어요. 왕궁이 늘 평화로운 곳은 아니니까요.”

“그건 그래. 역사책에서도 그렇게 평화롭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발레린은 묘하게 불안했다. 어차피 지금 발레린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지금도 배도스 공작이 가만히 있는데 움직였다간 괜히 제르딘만 난처해질 수 있었다.

결국 발레린이 할 수 있는 건 제 목숨을 지키는 것밖에는 없었다. 발레린이 죽지 않으면 적어도 제르딘이 할 일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더는 제르딘 주변에 있다가 죽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럴 확률도 적긴 했지만.

‘나를 누가 죽이겠어.’

발레린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사람이 있다면 입을 벌려서 독기를 내뿜을 계획이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제르딘이 난처해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새삼 발레린은 어머니가 말한 능력이라는 것이 제 삶을 지켜 주는 것 같아 빙긋 웃었다.

17. 단호한 결심

아침을 만족하게 먹고 단장을 마친 발레린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의 외출에 발레린은 마음속이 기쁘기만 했다. 대신관을 만나면 이야기할 게 많았다. 신전의 상황이나 배도스 공작에 대한 평판 등 궁금한 게 한 덩어리였다.

발레린은 기쁜 얼굴로 그로프와 함께 마차 창밖을 바라봤다. 마침 날씨도 좋아서 외출하기 좋은 날이었다.

“주인님,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님께서 독살당할 뻔했는데 가만히 있는 건 답답합니다.”

“할 수 없어. 그로프.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당한 뒤로 왕자님께서 힘을 얻으신 거잖아.”

“힘을 얻었다고요?”

발레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내가 독살당할 뻔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겠지. 그렇다면 수사권에 가장 영향력이 크던 배도스 공작 아니겠어?”

그로프는 눈만 크게 뜨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꽤 놀란 표정에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배도스 공작이 이렇게까지 책임을 지지 않았을 거야. 헤르틴 하녀장이 독살을 당했을 때도 그냥 넘어갔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그때도 주인님께서 먹었던 독과 같은 독 아니었습니까?”

“맞아, 하지만 그땐 하녀장이었고 지금은 왕자비잖아. 그리고 이건 곧 왕족을 위협하는 행위이고.”

“그럼 배도스 공작은 무리수를 두었던 겁니까?”

“그렇지. 지금 배도스 공작은 무척이나 어려울 것 같아.”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비록 발레린은 독한 독에 의해서 정신을 잠시 잃었지만 제르딘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독보다 독해서 오히려 보충제를 먹은듯한 경험이니 발레린에겐 썩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발레린은 기분 좋게 다시 풍경을 감상했다. 그로프도 한결 마음을 놓았는지 발레린이 가리키는 방향을 부지런히 눈으로 담았다.

어느덧 마차는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곧 마차 문이 열리면서 하얀 옷을 입은 신관이 고개를 숙였다.

“왕자비님을 뵙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왕자비님, 이제야 오시는군요!”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대신관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발레린은 의외의 환영에 잠시 얼떨떨했으나 예법에 맞게 인사를 했다.

대신관은 잠시 놀란 듯 발레린을 보았다가 활짝 핀 얼굴로 말했다.

“역시 왕자비님이십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예법에 맞는 인사는 왕자비님 이전에 보지도 못했는데. 언제 봐도 놀랍군요.”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전 오히려 더 건강해졌어요.”

발레린이 활짝 웃자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신전의 계단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왕자비님, 죄송합니다.”

뜬금없는 사과에 발레린은 의아해하며 대신관을 바라봤다. 대신관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차분히 말했다.

“왕자비님이 방문하시기 전에 직접 왕궁에 갈까 싶었지만 여러 신관들이 말리는 바람에 가지는 못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발레린은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관님은 커다란 일이 있을 때만 왕궁을 방문하시잖아요.”

심지어 역사책에서도 어떤 대신관이 방문한 때는 왕이 승하한 때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대신관이 왕궁을 직접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네, 그래서 신관들이 말렸습니다. 왕자비님을 뵈러 가는데 왕궁으로 가면 지나치게 일을 키운다고요.”

발레린이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대신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자비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이곳에 있는 신관뿐만 아니라 진정한 신의 의미를 아는 귀족들조차도 왕자비님같이 올바르게 생각하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이 그렇게 올발랐나요?”

“물론입니다. 이곳에 있는 신관조차도 왕자비님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경전을 읽고 기도를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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