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럼 독이 있는지는 왜 확인하려고 하십니까?”
“제가 맡은 게 정확한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래야 다음에 이런 일이 있을 때 활용할 것 같아서요.”
“그럼 제가 대신 파 드리겠습니다.”
제르딘이 발레린 곁으로 와서 모래를 파려고 하자 발레린은 급히 손을 잡았다.
“아니에요! 혹시나 여기에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위험해요. 차라리 제가 하는 게 나아요.”
발레린이 조심스레 제르딘을 살폈으나 제르딘은 발레린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발레린은 놀라며 손을 내렸다.
“죄송해요.”
그때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반응에 의아해서 그를 보았다. 제르딘은 웃음기를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린 결혼한 사이 아닙니까?”
“네?”
“결혼도 했는데 손잡았다고 사과하는 게 웃겨서요.”
“전 왕자님이 불편하실까봐…….”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의외의 말에 발레린이 쳐다보자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이 완전히 나오기 전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러곤 그는 모래를 파냈다. 발레린은 멍한 얼굴로 제르딘을 바라봤다. 제르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처음 봤다. 우아한 왕궁 생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르딘은 꽤 능숙하게 모래를 파냈다.
괜히 저 때문에 또 제르딘이 나선 것이다. 발레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제르딘을 더 괴롭히지 않기 위해 빠르게 모래를 파냈다. 그렇게 제르딘도 모래를 쓸어내던 때였다.
별안간 제르딘이 심장 쪽을 움켜쥐었다.
발레린은 손을 멈추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제르딘은 모래를 짚은 채 숨을 내쉬었다. 발레린이 다가가자 제르딘은 피를 토해 냈다. 발레린은 괜히 저 때문에 제르딘이 고생해서 이러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심지어 모래 바닥에는 핏자국이 선명해졌다.
그때 제르딘이 힘없이 모래 바닥에 쓰러졌다.
“왕자님!”
발레린이 서둘러 제르딘을 흔들었으나 그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발레린은 조급해졌다.
혹시나 제르딘이 약을 가지고 있나 싶어서 옷 이곳저곳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약은커녕 아까 제르딘이 보여 준 것이 다였다.
마력 탐지기와 육포. 그리고 칼.
발레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어떡하지? 왕자님이 이대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제르딘은 이런 일을 많이 겪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피를 토하고 쓰러졌잖아.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떡해. 내가 괜히 모래를 판다고 해서…….”
“주인님, 자책하지 마세요. 제르딘은 이미 약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기다려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까요.”
발레린은 그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차라리 동굴 밖이었다면 보좌관이라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당장 동굴 밖을 나갈 수도 없으니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그때 제르딘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의 팔을 흔들었다.
“왕자님.”
하지만 제르딘은 그저 숨만 내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발레린의 심장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제르딘이 잘못되면 어떡하느냐 하는 걱정뿐이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폈다. 그러다 유독 그의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굳게 닫힌 입술이었지만 선이 곱고 부드러웠다.
문득 결혼식 때 그와 입술을 맞췄던 것이 생각났다. 발레린은 곧바로 그로프를 돌아봤다.
“그로프, 예전에 왕자님이 내게 입을 맞췄을 때 기억해?”
“결혼식 때 말입니까?”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전엔 내가 독기를 조종할 수 없었는데, 왕자님이 입을 맞춘 뒤로 독기를 마음껏 조절할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설마, 지금…….”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하지만 주인님, 그래도 위험합니다. 제르딘은 피가 반쯤 섞인 늑대 수인이잖습니까.”
“왕자님은 그때 멀쩡했잖아. 심지어 내게 먼저 그렇게 하기도 했고…….”
그때를 생각하자 발레린의 볼이 발그레 변했다.
“그래도 제르딘은 이 상황을 예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제르딘이 깰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발레린도 이 상황이 충분히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르딘이 계속 피를 토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약 제르딘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발레린은 거기서 상상을 접었다. 그때 제르딘이 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피를 흘리면 안 될 텐데…….”
계속 피를 토해 낸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제르딘은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이 아무리 옆에서 말해도 제르딘은 의식이 없었다.
그래도 발레린은 혹시라도 제르딘이 깨어날까 싶어서 착실히 기다렸다. 피가 흐른 입술 주위는 남은 천으로 닦아 주었다. 하지만 워낙 피를 많이 흘려서 천이 붉게 물든 탓에 다른 천으로 갈아야 할 지경이었다.
발레린은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제르딘은 깨어나지 않았다. 거기다 피를 토하는 기침도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피 묻은 입술을 닦아 주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로프, 생각해 보면 내가 나서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아.”
“주인님?”
그로프가 걱정스레 묻자 발레린은 아까보다는 밝은 얼굴로 그로프를 보았다.
“그때 나도 그렇고 왕자님도 멀쩡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늑대 수인의 피가 나의 저주를 중화해 줬다면 나도 분명 왕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로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레린은 열심히 말을 이었다.
“물론 책에는 독기 있는 사람이 늑대 수인에게 도움 된다는 말은 없지만, 책에 없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잖아.”
그로프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책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아닐 겁니다. 책에서는 주인님께서 맡는 독 냄새를 과일 향이라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어쨌든 이전에 왕자님이 나와 입을 맞춘 뒤 멀쩡했으니까.”
그때 제르딘이 다시 피를 토해 내며 기침하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발레린은 눈을 감으며 제르딘이 피를 토해 내지 않고 멀쩡하기를 빌었다.
그렇게 잠깐의 입맞춤 뒤 발레린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눈을 뜨자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나자빠졌다.
제르딘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건드리다가 손등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내렸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아까 한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왕자님이 결혼식 때 제게 입을 맞춰서 제 능력이 드러난 것처럼, 지금도 제가 왕자님께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르딘은 말없이 발레린을 지켜봤다. 너무나 낯선 얼굴이었다. 더구나 그의 눈빛은 한층 어두워서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빨리 했다.
“왕자님께 일부러 입을 맞춘 건 아니에요. 저는 단지 왕자님이 너무 위험해 보여서…….”
“입 맞춰도 됩니다.”
“네?”
“입 맞춰도 된다고요.”
“하지만 왕자님, 그렇게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전…….”
“이미 저희는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이 상황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르딘은 전과 무척이나 달라 보였다. 특히 맑은 하늘빛을 띠던 눈동자는 어느새 완전히 검푸른 빛이었다. 거기다 너무나 노골적인 말에 발레린은 어리둥절했다.
눈이 마주치자 제르딘이 싱긋 웃었다.
“덕분에 제가 깨어났으니 공녀의 도움이 컸습니다.”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짙고 검푸른 눈동자에 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아무리 봐도 제르딘이 아닌 것 같았다.
“왕자님 맞으세요?”
제르딘은 오히려 그 질문이 반가운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맞다니요?”
“제가 봐 온 왕자님과 다른 것 같아서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상체를 살짝 숙였다. 약간 떨어져 있던 거리가 좁아졌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발레린은 흠칫하며 물러났다.
제르딘은 피식 웃으며 발레린과 시선을 맞췄다.
“제가 다른 사람이라도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라 발레린은 할 말을 잃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입술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들었다.
“제가 공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뜻밖의 말에 발레린은 그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입꼬리를 올린 채 발레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발레린은 너무나 숨이 막혔다. 입술 사이 닿는 숨결도 너무 가까웠고 그의 눈빛도 가까웠다.
무엇보다 더 난감한 점은 제르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