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7화 (67/130)

67화

그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대신전에 먼저 결혼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았던 건…….”

“제게 굳이 모두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왕자님께서는 제가 가장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괜히 욕심을 부렸던 거죠.”

제르딘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공녀.”

“왕자님, 거기에 대해서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전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왕자님께서 먼저 저에게 경고해 주셨던 부분이기도 하고 저도 제 할 일이 있으니까요.”

“할 일이요?”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왕자님께 최대한 도움이 되고 싶어요. 배도스 공작의 몰락도 보고 싶고 왕자님이 꼭 왕이 되시는 것도 보고 싶거든요.”

“제가 왕이 되는 걸 보고 싶다고요?”

“네.”

“왜요?”

오히려 묻는 태도에 발레린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곧바로 말이 나오지 않던 찰나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는 왜 내가 왕이 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겁니까?”

제법 진지한 태도였다. 발레린은 머릿속에 내내 생각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왕자님 같은 분이 왕이 되어야 이 왕국이 제대로 서니까요.”

제르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반응이 영 이상해서 그를 자세히 살폈다.

“혹시 제가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니요.”

“그럼 왜…….”

“이 나라에선 저를 보필하는 사람 외엔 공녀만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당연하잖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 왕자님께서 왕이 되어야 왕국이 바로 선다고요.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이 왕이 되면…….”

“어차피 배도스 공작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으니 멍청하지 않은 이상 왕이 되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누가 감히 왕자님의 자리를 탐하는 건가요?”

“배도스 공작은 직접 왕의 자리에 나서는 것보다는 헬릭스 공자를 거기에 앉히려고 할 겁니다.”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헬릭스가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로프도 마침 그 말이 떠올랐는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헬릭스는 멍청이 아닙니까?”

제르딘이 그로프를 쳐다보자 발레린이 황급히 말했다.

“헬릭스 님이 예전에 노란 장미를 보고 노란 물을 먹어서 노란 장미가 되었다고 말했었거든요.”

제르딘이 실소를 터뜨렸다. 발레린은 그 모습을 처음 봐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헬릭스가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노란 물을 주니 노란 장미가 나왔다고?”

“네, 빨간 장미도 그렇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제르딘은 정말로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발레린은 신기해서 잠시 제르딘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헬릭스 님은 왕자님이 예전에 장난기가 많으셨다고 했는데.’

언뜻 지금 제르딘의 얼굴에는 은근한 웃음기와 함께 장난기가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발레린이 저도 모르게 멍하니 보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헬릭스는 원래 무식한 인간입니다. 제 아버지가 아무리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라고 해도 공부와는 담을 쌓은 인간이죠. 그래서 만약 왕이 된다면 배도스 공작은 헬릭스를 허수아비처럼 앉혀 놓고 뒤에서 조종하겠죠.”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헬릭스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헬릭스 님은 그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공부에는 영 재미가 없다고.”

순간 제르딘의 얼굴이 굳었다.

“헬릭스가 그런 말까지 했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표정을 굳힌 채 있다가 발레린에게 물었다.

“헬릭스가 혹시…….”

이내 그는 말을 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단호한 제르딘의 태도에 발레린은 의아해하다가도 이내 차분히 말했다.

“여하튼 저는 헬릭스 님보다 왕자님이 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따지고 보면 헬릭스 님은 왕자님보다 아는 것도 많아 보이지 않고요.”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노란 물을 주면 노란 장미가 된다는 건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웃을 이야기 아닙니까?”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래서 공녀는 제가 정말 왕이 되었으면 합니까?”

다시 같은 질문이었다. 마치 그 답을 계속 듣고 싶은 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하늘빛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왕자님이 정말 매시드 왕국의 왕이 되었으면 해요. 지금 유일하게 왕자의 자리에 계시기도 하고 적장자이기도 하고 정통성도 있고…….”

“피가 문제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피는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해요.”

제르딘이 아무 말이 없자 발레린은 황급히 덧붙였다.

“제 입장에서는요.”

“잡종 피라도 말입니까?”

제르딘의 눈빛은 꽤 진지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공녀는 제가 밉지 않습니까?”

“미운 건 아닌데요.”

“그럼 아깐 왜 그렇게 방을 나간 겁니까?”

“아까는…….”

“공녀에게 상처 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저 저 때문에 공녀가 위험해진 것 같아 제 선에서 최대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더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제르딘도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제르딘은 막연히 창밖을 바라봤다. 발레린도 창밖을 보았다. 주변을 흐르는 강이 무척이나 잘 보였다. 델프스 지방은 확실히 강과 가까워서 어딜 가나 강이 보였다.

발레린은 강을 한참 보다가 제르딘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는 듯 굳은 얼굴이었다.

‘왕자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발레린은 내심 궁금했다. 제르딘이 정말 이 결혼을 완전히 무르고 다른 왕국의 청혼서를 받아들일지.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제르딘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발레린은 놀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저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게 본 것 아닙니까?”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머리 뒤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그와 동시에 발레린은 볼이 타오르는 듯했다. 제르딘을 몰래 본다고 했는데 그대로 그에게 들켰으니 부끄러운 감정이 앞섰다.

제르딘은 여전히 발레린을 지켜봤다. 그는 무감한 얼굴이었지만 시선만은 발레린에게 고정되었다. 발레린은 부끄럽긴 했으나 상황이 궁금하니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제르딘도 궁금하면 물어보라고 했으니.

“정말 저와의 결혼을 무르고 다른 왕국 사람과 결혼을 하실 건가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공녀와의 계약은 유효합니다.”

“그럼 배도스 공작이 완전히 몰락하면…….”

발레린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입으로 헤어진다는 말을 꺼내기 무서웠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배도스 공작을 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제가 나서는 이유도 공녀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발레린이 물은 내용과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히 지금은 배도스 공작의 몰락이 더 중요해 보였다. 거기다 위험할 수 있다니. 발레린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해 물었다.

“제가 위험할 수 있다고요?”

“배도스 공작은 지금 낭떠러지에 섰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보내려고 하고 있고요.”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심지어 그가 방 안에 독사까지 풀어서 그로프가 죽을 뻔했었다.

“그러고 보면 배도스 공작이 무리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무리요?”

“방에 독사를 풀어서 제가 푼 것처럼 만들려고 한다는 말까지 들었거든요. 실제로 그로프가 독사에 물려서 죽을 뻔했고요.”

발레린은 어깨 위에 앉은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개꿀개꿀 울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배도스 공작이 제 주변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건 유구했습니다. 이제는 괜히 저 때문에 남이 죽거나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르딘의 표정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도 무척이나 의지가 굳어 보였다. 예전과 같았다면 발레린은 그저 제르딘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제르딘의 감정에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하지만 제르딘은 남을 위해서 똑같이 친절함을 베풀어 주는 것뿐이었다. 발레린은 그동안 이를 특별한 감정이라고 착각하며 희망을 가졌었다.

‘원래 왕자님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인데.’

발레린은 이제야 그것을 깨달아서 씁쓸하긴 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래도 제르딘은 그동안 발레린이 생각했던 훌륭한 왕과 같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레린은 잠시나마 제르딘의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때 그로프가 옆에서 얌전히 물었다.

“그나저나 주인님, 왕자가 결혼 서약서를 대신전에 제출하지 않은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때 제르딘이 대답했다.

“이전에 준비한 건 약식이라서,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제출하려고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