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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6화 (66/130)

66화

발레린은 곧바로 그로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가 발레린의 손에 올라오자마자 발레린은 그로프를 어깨 위에 올렸다. 발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루네스.”

루네스는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이 힐끗 보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제가 들은 말이 있는데요. 혹시 왕자님과 다투셨나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다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레린은 사실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런 소문이 돈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다.

“왜 그런 소문이 돌아?”

“아까 왕자님께서 왕자비님이 내키지 않으시면 이곳에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기도 했고, 또 주변 하인들 말로는 왕자비님이 왕자님의 방에서 안 좋은 얼굴로 나오셨다고 해서요.”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가 말한 건 모두 사실이었다. 어쨌든 제르딘의 방에서 좋은 얼굴로 나온 것은 아니니까.

“왕자님과 다투지는 않았어. 다만 여러 가지 얽힌 일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들은 것뿐이야.”

“혹시 위험한 일인가요?”

“아니, 나보다는 왕자님이 더 위험한 것 같기도 해.”

“왕자님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발레린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더 기대를 했다간 아까처럼 슬픔에 못 이겨 눈물까지 흘릴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그렇게 울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어차피 울어 봤자 상황은 더 나아지지도 않았다. 우울한 생각만 깊어질 뿐.

발레린은 이내 표정을 풀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루네스는 내심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듯 계속 발레린의 눈치를 살폈다. 발레린은 궁금증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스스로 잘 알았기에 입을 열었다.

“루네스, 지금 내가 당장 이 상황에 대해서 말하면 일이 많이 엉킬 것 같아.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루네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께서 요즘 할 일이 많아 보이긴 했어요. 무척 바빠 보이기도 했고요.”

언뜻 들어도 제르딘은 할 일이 많아 보였다. 거기다 보좌관이 많이 걱정하는 듯 말했으니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루네스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저는 왕자비님 곁에서 어떻게든 힘이 되어 드릴게요! 무슨 일이든 시켜 주세요!”

루네스는 아까보다 눈빛이 더 빛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 발레린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고마워, 루네스.”

어느덧 호텔의 중앙 홀이었다. 그곳에는 제르딘과 보좌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주변에는 아예 주변 귀족들도 통제하는지 기사들이 서 있었다.

제르딘은 보좌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발레린은 살짝 마음이 안 좋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발레린에게 잠시 머물렀다. 은근히 따가운 시선이었다. 발레린이 잠시 머뭇대자 제르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금세 가까워졌는데 조금만 발을 움직이면 바로 닿을 거리였다.

발레린은 놀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제르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는 멀어진 거리를 잠시 쳐다봤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발레린은 제르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예법에 맞게 인사를 했다. 제르딘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저를 처음 만난 것도 아닌데.”

유난히 낮은 목소리였다. 발레린이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늘빛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발레린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낯설어 발레린이 고개를 숙이자 평온한 목소리가 울렸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네.”

“그럼 가시죠.”

발레린은 조금은 주춤거리며 제르딘을 따라나섰다. 일부러 제르딘과 떨어져서 걸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제르딘은 중간중간 멈춰 섰다. 그 탓에 주변에 있던 하인과 기사들은 한 번씩 제르딘의 걸음에 맞춰서 멈춰야 했다.

발레린은 적정한 거리로 조금 다가갔다. 하지만 제르딘은 앞으로 가지 않고 발레린을 보고만 있었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가까이 오세요.”

“네?”

“그렇게 저와 멀리 떨어져서 걸으면 하인들이 뒤따라오기 힘듭니다.”

할 수 없이 발레린은 제르딘의 옆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제르딘은 그저 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발레린이 쳐다보자 제르딘이 나지막이 말했다.

“더 가까이 오세요.”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그땐 왕궁이라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그 말을 들어도 발레린은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동하는 것은 지금이나 왕궁이나 같았다.

발레린은 이해하지 못하며 가만히 있자 제르딘이 먼저 다가왔다. 조금만 움직이면 옷소매가 닿을 거리였다.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이 정도 거리여야 하인들이 쉽게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발레린은 쉽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제르딘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하는데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린은 대번에 고개를 돌렸다.

마음은 어쩔 수 없어도 티는 내지 않아야 했다. 제르딘을 더 피곤하게 만들거나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제르딘이 움직였다. 발레린이 가만히 있자 그는 다시 멈춰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황급히 제르딘 곁으로 걸어갔다.

“앞으론 궁에서도 밖에서도 이 정도 거리로 걷는 게 낫겠습니다.”

“하지만…….”

발레린이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제르딘은 먼저 움직였다. 발레린은 황급히 제르딘을 따라가면서도 그의 마음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내 마음만 더 복잡해지는데.’

더구나 자꾸만 희망을 만들고 싶어지는 심정이었다. 발레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제르딘을 따라갔다. 그는 예전보다는 걸음이 느렸다. 확실히 발레린의 걸음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발레린은 힐끗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은 옆에서 봐도 너무나 멀끔했다. 차분한 눈매와 곧은 콧대는 절로 넋을 잃게 만드는 외모였다.

그러나 발레린은 더 보지 않고 고개를 내렸다. 이제 티는 내지 않아야 했다. 그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얼마나 제르딘에게 피곤한 존재였는지 생각해 볼 기회였다.

‘적어도 왕자님껜 최선이고 싶었는데.’

발레린은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안타까움과 함께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때 마침 제르딘이 멈춰 섰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마차가 서 있었다. 그때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다가와 말했다.

“왕자님, 조사관이 먼저 살핀 곳이 총 2구역인데 1구역은 둘러볼 곳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2구역은 금방 둘러볼 것 같은데 2구역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 쪽 시찰단이 더 많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많은 곳을 둘러보시기에는 시간이…….”

“그럼 우린 1구역을 둘러보고 나머지는 2구역을 둘러보면 되겠군.”

“하지만 왕자님,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어차피 여기에 3일 동안 있을 것이니 걱정 마.”

발레린은 확실히 제르딘이 왕이 될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그동안 발레린이 역사책에서 보던 훌륭한 왕의 태도였다.

“그래도 왕자비님께서 힘드실 텐데…….”

보좌관은 발레린을 보며 걱정스레 살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꾸준히 운동도 해 와서요.”

보좌관이 그래도 걱정스레 쳐다보기에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을 생각하며 말했다.

“저도 왕자님 생각처럼 저희 쪽 시찰단이 많다면 저희가 1구역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일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때 제르딘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갑작스럽게 물었기에 발레린은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공녀가 충분히 운동을 했다 해도 동굴 주변은 험할 수가 있어서요.”

정말로 사람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보고만 있자 제르딘이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이 이렇게 두 번 말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발레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해서 제르딘을 유심히 바라봤다.

“만약 공녀가 힘들다고 하면 곧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꽤나 의지가 보이는 말이었다. 발레린은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것 같아 황급히 말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중간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은 뒤 몸을 돌려 마차를 탔다. 뒤이어 제르딘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았다. 발레린은 제르딘 쪽은 보지 않고 창밖을 쳐다봤다. 델프스 지방은 하구에 위치해서 강이 무척이나 넓었다.

발레린이 신기해하며 구경하는 사이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공녀, 낮에 들었던 이야기는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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