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시에린의 깨달음
* * *
"플레아 그 소식 들었어?"
시에린이 내 머리를 손질해 주며 물었다.
근래까지는 일에 치여 살던 시에린이었지만 어지간한 일은 전부 끝난 지금은 내 머리를 손질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남은 상황이었다.
내가 아무리 군주라고는 하지만 남자기도 하니 관리를 똑바로 하라고 하는데 글쎄? 매력이 99에 달하는 데 고작 머리 관리 안 한 것 정도로 내 매력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소식?"
"아둔이 황제에 올랐데."
"당연히 들었지."
시간으로 따지면 아마 어제 오후 정도일거다.
제도와 우리 지역의 거리가 꽤 먼데도 시에린이 지금 시간에 정보를 들을 수 있던 이유는 영지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첩보병들 덕분이고 내가 그녀보다 정보를 먼저 안 것은 나만을 위해서 일하는 요원 섀도스탭 덕분이었다.
"아둔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것 같아?"
"일단 제도를 완전히 자기 손에 집어 넣으려고 하겠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제국을 지배해야 하고 제국 전체를 지배하려면 일단 제도를 완전히 집어 삼켜야해.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 지방은 지방의 세력을 키우고 있어서 제국 전체를 단숨에 지배하진 못하겠지만 제도 정도는 무난하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제도를 지배하는 데 지방파의 방해가 거의 없을 거라는 것이 사모아와 차이나는 부분이었다.
사모아는 귀족 출신이었고 아둔은 황가의 출신이었으니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그래도 너 덕분에 우리 가족들을 다 살았어. 네가 미리 대피하라고 해서 산 거지 아마 제도에 남아있다가는 꼼짝없이 돌아가셨을 거야... 혹시나 사셨다고 해도 아둔이 부모님을 모두 해고시키고 제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겠지."
"그걸 알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일이나 잘해."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을 했다고 그래?"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인 건 알고 있는 데 나한테 보고해가면서 해라?"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자 시에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인 걸 알면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있어 주면 어디가 덧나냐?"
"친구로서는 모르는 척 해줄 수 있지만 군신관계에서는 절대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어. 죄질이 나빴으면 바로 해고하는 건데 그나마 의도가 좋아서 봐주는 거야."
"그래 고맙다. 이놈아."
시에린이 비자금을 만들었다.
비자금이라고 해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상인들에게 뜯을 세금을 조금 더 뜯어서 나에게 부풀려서 보고한 것 뿐이었다.
그녀 입장에선 세수를 늘리기 위해서 한 일이겠지만 옳지 않은 방법으로 더 징수한 금액을 보고 내가 아리나 영지의 경제력을 착가할 수도 있으니 이런 건 최소한 통보라도 하고 해야 한다.
"아, 맞다. 사모아 공작이 처형당했데."
"사모아 공작은 병으로 죽은 거 아니었어?"
"그 공작 말고 딸 있잖아. 우리랑 같은 학년이었던 걔."
"당연히 처형당했겠지 감히 황가가 있는 데 황궁에 들어와서 황가의 인물을 전부 죽여버렸으니까. 아마 병으로 죽은 사모아 공작의 시체까지 꺼내서 오체분시했을걸?"
아둔 입장에서는 계탄일이다. 어차피 자신이 하고 모든 욕을 들어먹었어야 하는 일이데 그 욕을 사모아 공작가에게 넘길 수 있었으니까.
사모아 공작이 완전히 멸문했다는 소식에 기지개를 쭉 피며 뒤로 누워 눈을 감았다.
"... 아무렇지도 않아? 한 때는 적이었지만 친한 친구사이인척 한 적도 있었고 걔가 널 좋아했었잖아."
"그래서?"
그녀가 나를 좋아했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좋아한 적인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적이자 이용해 먹을 상대로만 대했는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하지?
"... 플레아, 너 상당히 냉혈한이구나?"
"군주의 피는 차가운 법이야."
"내가 죽어도 그렇게 차갑게 반응할거야?"
슬며시 눈을 떠서 그녀를 바라봤다.
내 성격대로라면 피를 식히고 복수하겠다. 정도에서 끝내야 옳지만 난세의 플레이 경험과 전생을 살면서 배워온 사람을 대하는 법을 이용해 대답했다.
"일단 하루 종일 울겠지. 미니멈으로."
이 정도 말만 해줬는데도 시에린의 기분이 상당히 업된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복수를 할거야. 감히 너를 죽인 놈인데 그 죄값을 물고 죽여버려야지."
"그 상대가 프레스티아 헬링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내 가신을 죽이는 것은 용서 못해."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니 그녀의 광대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려는 것이 보였다.
'때에 따라 거짓말이 사람의 관계를 이롭게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내 소중한 가신인 시에린을 프레스티아가 죽인다면 나는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원동력 삼아 프레스티아를 굴복시킨 다음에는... 글쎄? 시에린의 복수라면서 그녀의 엉덩이나 때리고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나를 그렇게 아껴준다니 고맙네."
시에린이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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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아 걔는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그의 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 너무 얼빠진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건가?
분명 내가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세력의 거의 모든 전략을 총괄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을텐데 대체 왜?
'아무리 그래도 헬링을 팔아넘기는 건 너무했지.'
그 이전의 말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헬링이 자신을 죽여도 복수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 이전에 했던 모든 말을 못 믿게 됐을 거다.
프레스티아를 향한 플레아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시에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나를 잊었을거라고 할 수도 없었을 테니 플레아의 심정이 이해는 가지만 말이야.'
물론 플레아가 시에린을 버린다고 말했더라도 나는 플레아의 곁을 떠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플레아를 사랑했으니까.
물론 내가 플레아와 이어질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레스티아 헬링이라는 강적이 눈 앞에 있는 이상 절대로 그와 이어질 수는 없겠지.
내가 대체 왜 그런 그를 사랑했을까?
처음에는 분명히 외모만 보고 반했다.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반해 그와 같이 있고 싶어서 듣지도 않을 교양마법까지 신청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플레아라는 남자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던 그의 두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차갑고 멋있고 진지해 질 수 있었으며 작은 몸에 담겨 있는 야망또한 대단했다.
귀여운 겉 모습과 그러지 못한 내면의 갭 차이 때문에 그에게 더 빠지게 된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물론 단순히 헌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름으로서 공작의 자리에 오르게 되겠지만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그에게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 사랑이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도 플레아의 사랑을 이뤄주기 위해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며 설령 내 목숨을 날려야만 그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찾아온다고 해도 나는 미련 없이 목숨을 버릴 것이다.
그것이 나의 다짐이었다.
'목숨을 던지네 마네 하기 전에 일단 할 일 부터 해야지.'
오전부터 플레아랑 같이 있다보니 일이 좀 쌓여 있을 것이다.
아리나 영지는 빠르게 안정돼서 이제부터는 할일이 거의 없었지만 어떻게든 돈을 더 뽑아내기 위해서 일을 만들어 낸다면 얼마든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너니까 돈도 안 받고 추가근무해주는 거야.'
그런데 뭐? 너니까 참아? 해고?
웃기는 소리 하고 앉아있어.
일부러 낮은 층에 잡은 내 집무실로 돌아가서 회계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기본적으로 계산이 빠른 존재들이었지만 이런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선 많이 알지 못했으니 조금 정도 조작하면 눈치도 못챈다.
이렇게 쇠 빠지게 고생해 봤자 1~2%정도의 세금을 더 얻을 뿐이지만 내간 너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한다 이말이야! 그러니까 칭찬을 달라고!
속으로 투정을 부리면서도 플레아를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계속 적어내려 가고 있으니 밖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 집무실 앞인데 이렇게 떠들어?'
복도를 지나갈 때는 주변에 내 집무실이 있다는 걸 알아서 조용히 하지만 창문밖에서 자꾸 지랄이다.
한 소리 하려고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 보니 영주관을 순찰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이것..."
"그 말들었어? 사모아 공작세력이 황가 사람들을 다 죽인죄로 오체 분시 당했데."
"그럴만도하지 직계 핏줄은 물론이고 황비랑 첩까지 다 죽였다고 하잖아."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첩,
그 한글자 짜리 단어가 계속해서 내 귀에 맴돌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 세상에 첩이 없는 황제가 어디있어?
"야!"
내가 크게 소리치니 경비들이 나를 올려다 봤다.
"헉! 마디안님, 죄송합니다! 이곳에 계신 줄 모르고..."
"아니야! 고맙다 야!"
나는 당장 창문을 닫고 플레아가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첩이라도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작업을 쳐야야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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